북한 원정대의 광주침략 작전
북한 원정대의 광주침략 작전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6.03.08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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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진들에서 찾아낸 작전의 주역 350명은 모두 북한인들이었다

▲ 위 기사의 인물들 4명을 최근 북한에서 찾았다. 이들은 모두 광수(광주 5.18 북한특수군)로 최첨단과학적영상판독법으로 확인되었다. ⓒ뉴스타운

작전 목적

게릴라전에 의한 남침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광주에서 광주시민들을 많이 살해 해놓고 이를 한국군의 소행으로 모략하고 이에 더해 유언비어를 유포시켜 광주시민들과 계엄군을 서로 싸우게 만들어 놓고, 폭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후 국제 여론을 한국에 매우 불리하게 악화시켜 남침의 명분을 마련한 후 해주에 대기시킨 10만 군과 연결시켜 남침의 승기를 잡으려 한 것으로 판단된다.  

침투 과정

197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되자 김일성은 남한에서 암약하는 간첩들에 광주를 거점으로 하여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키고, 이를 명분으로 하여 그의 숙원인 남침을 감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위해 그는 박정희 시해 직후인 1979년 11월부터 10-30명 단위의 소부대를 잠수함, 어선을 가장한 쾌속정, 산맥통로, 땅굴 등을 통해 침투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침투조들은 남한에서 암약하는 고정간첩들이 마련한 수많은 아지트에 은거 하다가 1980년 5월 이전에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에 머무르면서 작전지역의 지형을 답사하여 작전을 구상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한국의 동쪽에는 북한으로부터 휴전선을 통과하여 경상북도에 이르는 험준한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흐르고, 이 산맥은 경상북도에서 7시 방향으로 꺾여 전라남도와 광주 지역으로 연결돼 있다. 이 산맥통로는 1945년 이후 1953년 휴전이 될 때까지 이른바 '공비' 즉 빨치산들의 활동무대요 은거지가 되었고, 이후 남한에서 암약하는 수많은 간첩들의 통로로 이용되어 왔다.  

이러한 판단은 군사작전 개념과도 일치하고 탈북자들이 쓴 5.18 증언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2009, 4460쪽)에도 잘 설명돼 있다. 실제 광주에서 찍힌 사진들 중에는 손성모라는 고정간첩이 여러 장면에 등장해 있다. 그는 1981년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999년까지 수감되어 있다가, 199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에 의해 특별히 석방되었고 이어서 2000년 김대중에 의해 북송되었다.

손성모에 대한 재판 기록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피고인 손성모는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11일 전인 5월 7일부터 광주 증심사에서 승려로 신분을 위장하고 사찰의 위치 및 정황, 주지들 및 승려들의 신원, 경찰의 검문 사항, 광주사태와 관련한 민심동향 등을 지득하여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하였다."(서울고등법원, 1988.7.20. 선고 88노1367 판결, 대법원 1988.10.25. 선고 88도1568 판결).  

손성모는 전라도에 돌출한 반도지역인 부안군 출신으로 김일성 종합대학을 나온 고정간첩이었다. 그는 광주폭동 직전, 광주 외곽의 '증심사'라는 사찰에 은거 하면서 북한군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길안내를 하는 등 광주작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정체가 재판과정을 통해 드러났고, 수많은 현장사진들이 그가 행한 활동들을 증거 했는데도 폭동진압에만도 벅차 했던 당시의 정보당국은 5.18 광주에 북한군이 대규모로 왔었다는 가정 자체를 하지 않았다.  

광주에 왔던 북한 인력은 1,000명으로 추정된다. 이 속에는 남녀노소, 로열패밀리, 현직에 있던 북한판 CIA 국장도 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최상류층 인물들이 대거 광주에 왔다면 전라남도 해안은 거의 무방비로 뚫려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탈북자들이 한국의 서해안은 북한의 안방이라는 말들을 한다. 그리고 유독 전라도 지역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매우 많아 간첩들이나 북한군이 활약하기에는 최적의 공간이 되어왔다.  

작전 과정

1980년 5월 17일 자정, 김대중 내란음모자 24명이 전격 체포됐다. 김대중의 내란음모를 현장에서 연출하기로 돼 있는 광주시민들도 체포됐다. 1개월 이상 전국의 학생시위를 주도했던 주모자들도 전격 체포됐다. 국무회의는 기존의 계엄령보다 매우 강화된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에 따라 5월 18일, 새벽 2시를 기해 전국 136개 국가시설을 보호하고 31개 주요 대학을 점령하기 위해 25,000명의 계엄군이 배치됐다. 대부분의 공수부대들은 서울의 주요 대학들에 진주 했고, 광주는 위험지역이 아닌 것으로 분류돼 전북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여단 소속의 2개 대대(800명)만 뽑아 전남대와 조선대에 1개 대대씩 주둔 시켰다. 공수부대는 총을 등 뒤에 걸고 실탄은 일체 지급도지 않은 상태에서 폭도들과 육박전을 했다.  

5월 18일(일) 오전 9시경, 북한특수부대 250-300명이 학생으로 위장해 전남대에 주둔중인 제33대대 공수부대원들(400명)에 돌멩이를 던져 7명이 부상을 입고 얼굴 등에 피를 흘렸다. 해방 직후부터의 대한민국 역사는 끝없이 전개되는 북한의 대남공작과 이에 대한 진압작전으로 구성돼 있다. 이 모든 역사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언제나 경찰과 군을 먼저 공격 했고, 이에 대한 반작용이 발생하면 이를 유언비어로 만들어 무고한 국민들이 파쇼정부에 의해 공격당했다고 선전했다.  

5.18 폭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격은 광주 대학생으로 위장한 250-300명의 북한군이 먼저 했는데, 지금까지 한국에는 공수부대가 광주시민들을 학살 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무기고를 털어 항전하였다고 거꾸로 선전해왔다. 그러나 모든 팩트들은 서울검찰청과 군검찰단이 14개월 동안 조사해서 발표한 1995년의 수사보고서(216쪽)에 들어 있다. 하지만 광주사람들과 한국 내의 공산주의자들은 그 보고서까지도 부정하고, 북한 당국이 지어낸 유언비어들만 사실이라고 선동하고 있다. 거짓말도 100번 하면 참말이 된다는 레닌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전남대 정문에 서있는 20여명의 계엄군을 공격한 북한군은 공수부대가 무고한 광주학생들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체포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편성한 공수부대가 전라도 주민 70%를 죽여도 좋다는 전두환 명령을 받고 남자고 여자고 마구 살해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여성을 발가 벗기고 유방을 도려 내고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뿌렸다. 이에 격노한 광주시민들이 광주의 번화가로 몰려들어 위장한 대학생들에 합세했다.  

북한군은 번화가로 나가 파출소를 보는 대로 불태웠다. 파출소에 불을 태우는 목적은 1차적으로 광주의 천대 받는 도시빈민들, 껌팔이, 구두닦이, 양아치, 구두공, 목공, 석공 등 평소 파출소 경찰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은 10-20대들의 마음을 사서 그들을 부나비로 활용하기 위해서 였다. 오후 5시부터 공수부대들은 3-4명씩 주요 길목에 배치하여 폭도들을 향해 순진하게도 해산하라고 독려 했지만 북한군은 그들을 면전에서 공격했다. 이로부터 양측은 감정차원에서 육박전을 벌였다. 북한군에 합세한 20대들도 많이 맞았지만 공수부대원들도 많이 맞았다. 지쳐버린 공수부대가 주둔지로 복귀하면서 이날의 충돌은 마감됐다.  

5월 19-20일 양일간은 공수부대가 중과부적으로 매타작을 당하고 농락당하는 시간으로 일관했다. 19일, 오전까지 공수부대는 3-4명 단위로 골목골목에 흩어져 있다가 매타작만 당하자 대대 단위로 집결했다. 발 빠른 북한군은 즉시 대형 버스와 트럭을 지그재그 궤적으로 몰아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케 했다. 5월 20일에는 경찰 4명이 돌진하는 버스에 깔려 사망했다. 공수부대와 경찰은 이 지그재그 돌진 차량에 노이로제가 걸려 있었다.  

이 이틀 동안 MBC 및 KBS 방송국이 불에 타고 세무서가 불탔다. 경상도 번호판을 단 수 많은 차량이 소각되고 탑승했던 경상도 주민들이 몰매를 맞아 즉사하는 일이 벌어 졌다. 5월 20일 밤에는 광주역 앞 넓은 공간에 집결한 제3공수여단 5개 대대 모두가 포위되어 몰살당할 번 했지만, 어려운 과정을 통해 지급된 실탄으로 공포를 쏘고 최루탄을 발사하면서 포위망을 가까스로 뚫고 전남대로 철수했다. 그리고 이 5개 대대는 20일 밤 내내 포위전에서 밀려 전부대원이 유린당할 번했다.  

5월 21일, 전남대에서 5개대대의 공수부대(2,000명)를 압박하던 북한군은 5월 21일이 되자, 세기의 걸작(?)이라 할 만한 특공작전을 벌였다. 이스라엘의 엔테베 작전보다 더 컸고 더 정교 했고 과감했다.  

제20사단은 전투서열이 높은 정규육군 부대다. 부대의 이동계획은 극비사항이다. 그런데 북한군은 이 극비정보를 사전에 알고 지휘부 차량부대가 광주 톨게이트를 08:00시에 통과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북한군 300명은 몽둥이와 화염병 등을 가지고 매복하고 있다가 차량부대를 기습하여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 지프차 14대를 빼앗아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진출하여 위용을 과시해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를 탈취했다. 09시, 아시아자동차공장에는 또 다른 300명이 5대의 버스를 타고 왔다. 당시는 자가용시대가 아니라서 이렇게 많은 운전수를 확보할 수 없었다. 더구나 한국군에 지급되지도 않았던 최신형 장갑차를 4대씩 몰고 다닐 사람은 광주에 없었다. 5.18의 핵심유공자들 중에 이런 일로 포상을 받은 사람도 없다.  

무기고는 모두 대외비로 위장돼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미리 준비한 약도들을 가지고 전라남도 17개 시 및 군에 숨어 있는 44개 무기고로 돌진하여 불과 4시간(12-16시) 만에 5,408정의 총기, 수류탄,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했다. 그리고 이들은 전라남도 도청 지하실에 다이너마이트 폭탄 2,100개 순식간에 조립해놓았다.  

오후 5시, 공수부대들은 모두 광주를 버리고 북한군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서 구사일생으로 시 외곽으로 밀려 났다. 이날 밤, 북한특수군의 주력은 광주교도소를 6차례 공격 했고, 이 과정에서 450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나머지 150명은 전남도청을 장악하고, 로열패밀리와 김중린 등으로 구성된 400명 정도의 광주작전 총사령부를 호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150명의 북한군 중 우리는 113명의 얼굴을 찾아냈고, 비군인광수 400명 중 237명을 찾아낸 것이다.  

22일부터 도청에는 이른바 광주 유지들로 구성된 시민수습위원회가 있었지만 이들은 시민군본부로 위장한 북한군의 삼엄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유지들이 모이자, 이들은 "싸우자"는 파와 "총기부터 반납하자"는 파로 갈라져 하루 종일 싸우기만 했다. 무기를 탈취한 학생집단을 찾았지만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지상명령을 받고 온 북한군들이 나타날 리 없었다. 반면 그 시간 북한군은 복면을 쓰고 광주시 거리를 활보하면서 투쟁을 선동하기고 했고, 남한 당국의 스파이로 보이는 사람들을 찾아내 숙청하는 일을 했다.  

계엄군이 퇴각한 광주시는 한국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북한의 해방구가 되었다. 북한집단은 도청 지역에 모아 놓은 시체의 관을 독점하고, 광주인들로 위장한 남녀노소 집단을 이용하여 한국을 모략하기 위한 사진들을 찍었다. 5월 23일에는 북한군이 독일 기자 힌츠페터를 데려와 각가지 무대를 만들어 놓고 이를 촬영하여 세계에 방영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주력 전투부대원 대부분을 잃은 북한 지휘부는 계엄군이 광주를 재탈환하기 전에 서둘러 안개처럼 사라 졌다. 5월 24일이었다. 

어린 아이들까지 합쳐 550명 정도로 남아 있던 북한의 원정대가 단 몇 시간에 사라 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서해의 일부가 완전히 그들의 통제 하에 있었고 그래서 대형 선박들로 대량 탈출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5월 19일 북한을 떠나 5월 27일 새벽에 광주를 떠난 문제심(3성 장군)이 이끄는 50명은 지리산이 포함된 소백산맥을 거쳐 경상북도 문경 지역을 거쳐 태백산맥을 타고 1주일간의 행군을 하여 6월 4일 휴전선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 문경지역 산에 나물을 캐러 온 처녀가 자기들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을 의심한 북한군은 그 처녀를 무자비하게 죽이고 암매장 했다. 이는 실제로 그 침투조에 소속 됐던 탈북자 가명 김명국의 증언이다. 그 탈북자는 지금 국정원이 마련해준 국영기업에 취직해 있고, 서울 인근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이 50명의 침투조는 사진에 찍히지 않은 관계로 여기에 합산되지 않았다.  

5월 24-26일, 북한군이 떠난 도청은 비로소 광주사람들의 소유가 되었다. 이때부터 전남도청에 들어온 광주시민들은 개념 없는 10대의 어린 학생들과 20대 막노동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 역시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져 2일 내내 말싸움만 했다. 그리고 25일 밤중, 복학생인 김종배와 26세의 트럭운전수 박남선, 19세의 구두공 윤석루 등이 이끄는 20대의 강경파가 온건파를 총으로 위협하여 내쫓고 계엄군을 향해 "결사항전"을 선포했다.  

이 기간에도 3-4명에 이르는 대학생들 말고는 광주폭동에 참여한 대학생은 없었다. 도청을 점령한 20대들이 "결사항전"을 선포하자 바짝 긴장했던 계엄당국은 5월 27일 새벽시간에 도청지역 점령한다는 작전을 계획했다. 그리고 계엄 군법회의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주동자들은 5월 26일 하루 도청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난동을 부렸던 자들로 10명에 불과 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5월 21일의 빛나는 작전을 자기들이 수행한 것이라고 국민을 속여 개국공신에 해당하는 금전 및 복지 혜택을 받고 있으며 전쟁 유공자보다 더 높은 연금을 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찾아낸 광주사진들에서 찾아낸 작전의 주역 350명은 모두 북한인들이었다.  

개념 없는 20대 도시근로자들이 도청 건물에서 서로 싸우던 5월 25일과 26일 양일동안, 계엄군은 다이너마이트 조립 전문가 1명을 도청으로 보내 온건파 학생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2,100발의 다이너마이트폭탄을 해체 했다. 이 폭탄이 해체되지 않았더라면 5월 27일의 광주시 재진입 작전은 계획되지 못했을 것이다. 폭도들은 이 폭탄에 불을 질러 광주시 전체를 날려 버리겠다고 정부 당국을 협박하고 있었다.  

5월 27일, 한국군의 작전비밀은 대책 없이 새나갔다, 그래서 광주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하던 지역계엄사령관은 작전시간을 여러 번 변경하여 간첩들을 교란했다. 공수부대 전부(4,000명)를 작전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 350명 정도만 사용했다. 외과적 수술을 하듯 점 공격을 하였기에 17명의 어린 학생들과 20대 개념 없는 도시근로자들만 멋모르고 저항하다가 죽었다.  

이날 아침 05시 19분경 소준열 중장은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작전종료를 보고 했고, 05시 23분에는 국방장관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하였다. 이로써 김일성이 주도한 침략작전, 김대중의 추종자들이 동참한 여적사건은 종결되었지만, 간첩 공화국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대한민국은 감쪽같이 속아 왔다. 그리고 북한군이 이룩한 작전성과는 5월 25-26일 동안 도청에 들어가 무모하게 결사항전을 선포해 군법회의에서 중죄를 선고 받은 어린사람들의 공로로 왜곡되었다. 여기에 폭동기간 중 당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사람들, 뺨을 맞고 왔다는 사람들이 끼어들어 5.18 유공자가 되었다. 제1심 재판에서 유죄를 받은 사람은 불과 328명인데, 여기에 5,400명의 유령 유공자들이 합류하여 지금은 5,700명의 5.18 유공자들이 대한민국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호강을 하고 있다.

폭동 10일 동안 북한군은 광주시민들을 등 뒤에서 총으로 쏘았고, 몽둥이 등으로 사살 했다. 그리고 이를 공수부대 소행으로 뒤집어 씌웠다. 하지만 시민들이 죽은 장소를 일일이 살펴 보면 이들 대부분은 공수부대가 없는 지역들에서 사망했다. 기간 중 총상으로 사망한 시민은 116명, 이들 중 7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시민들이 소지한 카빈 총 등에 의해 사망했다. 당시 공수부대는 M16 소총만 휴대하고 있었다. 이것이 광주민주화의 본색인 것이다.

▲ ⓒ뉴스타운
▲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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