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북한특수군 황장엽과 김덕홍
5.18 북한특수군 황장엽과 김덕홍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5.06.30 10: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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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과 김덕홍은 5.18 광수 찾기 작전의 완벽하고 화려한 휘날레

▲ ⓒ뉴스타운

황장엽은 1923년 생으로 만56세에 5.18 광주에 왔고, 김덕홍은 1938년생으로 만 41세에 광주에 왔다. 김덕홍은 무기 적재장의 특수군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찍혔고, 황장엽은 실로 무서운 모습으로 찍혔다. 황장엽의 직책은 '특수군 보위방첩소대'의 소대장으로 보이며, 광주시내에 침투했을 한국측 정보요원을 탐지하고 무전기를 통해 부하들을 시켜 끌고 가는 고약한 역할을 수행했다. 사진에는 키가 큰 한 국민을 의심자로 점찍어 그를 연행해 가는 모습이 담겼다. 연행돼 가는 키 큰 우리 국민은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 살해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황장엽이 들고 있는 총은 M16소총인데 거기에 유탄발사기까지 달려 있다. 무거운 총과 묵직한 무전기를 들고 활달하게 걷고 있는 황장엽의 모습은 우리가 본 학자의 모습이 전혀 아니다. 황장엽은 M16으로는 계엄군이나 광주시민을 죽였을 것이고, 유탄발사기로는 멀리 계엄군을 향해 위력 높은 유탄을 발사 했을 것이다.

1997년 2월, 두 사람은 함께 귀순했지만, 황장엽은 자유로운 몸으로 미국까지 다녀 왔지만, 김덕홍은 이제까지 사실상 연금상태에서 밀봉된 생활을 해왔다. 무엇이 이런 차별대우를 유발했는가? 황장엽은 5.18의 비밀에 대해 함구하겠다 약속했고, 김덕홍은 사실을 털어 놓겠다 고집했다. 아마도 김덕홍은 이 때문에 감금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황장엽은 광주에서 악역을 담당했다. 그러면서도 가증스럽게도 학자 인생을 살아온 것처럼 위장하여 대한민국을 두 번 농락했다. 그는 지금 국립묘지에 묻혀있다. 부관참시 돼야 할 것이다.

황장엽은 2010년 10월 10일 사망했다. 사회장으로 5일장을 치렀고, 김영삼이 장례명예위원장을 맡았다. 그를 반드시 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여론이 우세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전현충원에 묻기로 했다. 현충원에 묻어주기 위해서는 1등급 훈장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에 행자부는 그에게 '무궁화장'이라는 훈장을 추서했다. 그는 대한민국에 공을 세운 사람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농락한 사람이며, 특히 1980년 광주에서는 수많은 국민들이 그의 눈초리에 정탐자로 낙인찍혀 사살됐을 것이다. 그는 무서운 총과 무전기를 가지고 다니며 민첩하게 활동했다.

황장엽이 광주에서 찍힌 모습은 노숙자담요님에 의해 소개될 것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증명이 될 것이다. 황장엽과 김덕홍은 55일 동안 진행되어온 광수 찾기 작전의 완벽하고도 화려한 휘날레가 될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반기고 기대하고 대우해준 두 사람은 대한민국에 귀화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망명을 고집한 사람들이다. 끝까지 북조선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인 것이다. 위키백과에는 내가 그의 현충원 안장을 반대한 사실에 대해 이렇게 기술돼 있다.

"지만원은 황장엽이 김정일과 관계가 악화되자 남한을 피신처로 이용한 사람이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황장엽은 귀순하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망명자 신분을 고집해 왔던 사람"이라며 황장엽의 현충원 안장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우리 국민은 검증을 하지 않는 국민이다. 검증 마인드가 없고, 검증 시스템이 없다. 쥐떼처럼 이리 쏠리고 저리 쏠려다니는 국민 문화가 오늘날 이런 치욕의 화로불을 얼굴에 덮어 쓰게 된 것이다. 황장엽을 싸고 돈 사람, 황장엽을 관리해 온 사람들은 그 경솔함에 대해 비난받아야 하고, 더러는 그 의도에 대해 사상적으로 의심받아야 할 것이다. 그가 갖고 있는 비밀 중 가장 큰 비밀은 5.18의 비밀이었다. 그 비밀을 끝까지 감추도록 그를 관리한 사람들이 누구들인지, 차차 조사돼야 할 것이다.

▲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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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2015-07-01 20:21:56
5.18 광주에 황장엽이 직접 올 수 밖에 없는 이유(路上)

1970 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일성의 권력구조가 서서히 노쇠해가고 1974 년 2 월 13 일 당중앙위원회에서 김정일이가 정치위원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김일성의 정식 후계자로 지명되어 1980 년 까지 김정일의 당내 권력구조가 전방위적으로 그 기반을 공고히 해 내갈때 곁에서 그런 추이를 지켜 보고있던 소위 김일성 권력구조의 초실세중의 한사람이었던 황장엽도 그의 추후거취가 무척 불안해 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대가 바뀌면서 김정일과 더불어 김정일 측근들은 이러한 김일성 새대의 공신들이 부담이 되었을 것이고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며 숙청대상이 될수 밖엔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황장엽은 백두혈통도 아니고 그렇다고 군부실세도 아니어서 아무리 김정일의 개인교수로서 주체사상의 창시자라 하더라도 그의 위상은 늘 풍전등화였음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군부실세에 버금가는 뭔가 구체적인 공적을 세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김일성이 자기의 혁명동지인 황장엽에게 광주사태의 감독지휘조로 남파되어 김정일이 쉽게 무시 못 할 그런 공적을 세우기를 권유하였을 것이고 이를 황장엽은 흔쾌히 수락하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또한 광주에는 600 여명의 특수 부대 뿐만 아니라 북한의 고위급 남녀 간부들이 대거 남파 됨에 남한의 자유분방함 속에서 혹시 있을 지 모르는 그들의 이탈을 늘 바로 곁에서 감시 감독 하며 필요에 따라 현장에서 사상재교육을 수시로 감행 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며 수시로 그들의 지척에서 암묵적인 이탈방지의 냉엄한 감시의 눈초리를 보냄으로 인하여 그들을 효과적으로 조종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공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이가 권력 제 1 인자로 등극하면서 황장엽은 구세대로서 점점더 소외감을 느끼며 차별대우를 받게 됨에 따라 5.18 남파 동기인 최측근인 김덕홍과 함께
남한 망명을 결심하게 되고 이 5.18 을 남한 사회에 폭로함으로서 김정일에게 보복을 결행하고자 하나 이미 종북좌파의 서식처가 되어 버린 남한정권의 냉대와 압박으로 인해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황장엽은 결국 의문사 비슷한것을 당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김덕홍의 추후 신변변화를 아주 주의깊게 관찰해야 하며 가능하다면 외부의 인권협회의 힘을 빌어서라도 그를 밖으로 끌어내어 모든 신변위협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에서 그의 자백과 증언을 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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