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5.18 침략 사실에 대한 영상 고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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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5.18 침략 사실에 대한 영상 고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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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촬영된 폭동 현장의 얼굴(광수)들은 모두 북한의 고관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 인식돼 있는 5.18 광주사태는 1980년 전라남도 광주시민들과 국가 사이에 발생했던 10일간의 무력충돌 사건이었다. 1980년 5월 18일 09:30분경, 250여명의 학생집단이 전남대 정문 앞에 서있던 20명의 공수대원들에게 돌을 던져 7명에 부상을 입힌 순간부터 시작 됐고, 5월 27일 새벽 05시 23분 주영복 국방장관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시가 수복 되었음을 보고한 순간에 종결됐다. 1980년 당시의 사람들에게 5.18 광주사태는 국가를 상대로 하여 김대중 추종자들이 일으킨 '반국가폭동'인 것으로 인식됐고, 당시의 법관들도 그렇게 판결했다.

우익시대의 폭동사건이 좌익시대에 민주화운동으로 둔갑

대한민국 사법부는 5.18 재판으로 인해 이 국가에 치욕을 안겨 주었고, 대한민국 운명에 결정적인 가해행위를 했다. 5.18에 대한 재판은 1980-81년과 1996-97년 두 번 했다. 1981년의 법원은 우익판사들로 구성되었고, 1997년의 법원은 좌익판사들로 구성되었다. 전자는 5.18을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음모 사건이었다고 판결 했고, 후자는 5.18을 전두환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고 판결했다. 한 마디로 두 개의 재판 모두 다 정치재판 이념재판을 한 것이다.

전두환 시대의 사법부는 김대중을 때려잡는 데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상황일지에 기록돼 있는 자료들이 '5.18은 북한특수군 600명이 주도한 침략행위였다'는 것을 웅변해주고 있었는데도 여기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김대중을 제거 하는데 필요한 자료들에만 신경을 썼다. 김영삼 시대의 사법부는 오직 전두환을 때려잡는 데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상황일지에 기록돼 있는 자료들이 '5.18은 북한특수군 600명이 주도한 침략행위였다'는 것을 웅변해주고 있었는데도 여기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전두환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데 필요한 자료들에만 신경을 썼다.

특히 김영삼 시대의 사법부는 전두환을 때려잡기 위해 "당시 북한으로부터는 특이한 징후가 전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전두환이 최규하를 겁박하기 위해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을 과대 포장하여 5.17 계엄확대 조치를 취했고 민주화의 상징인 김대중 등을 체포했다"며 전두환을 옭아맸다. 600명의 특별한 시위대는 대한민국 헌법을 전두환으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결집한 준-헌법기관이라고 판시 했고, "이 시위는 전국적으로 빠른 기간에 확산됐었어야 했는데 전두환 등 신군부가 이를 조기에 진압한 것은 내란행위에 해당한다"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노골적인 이념재판이었던 것이다.

1981년에 이미 대법원 판결이 끝난 5.18 사건을 1997년에 다시 재판한 이유는 재심 사유가 발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공산세력이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5.18역사'를 뒤집기 위해 여론몰이로 제정한 '5.18 특별법' 때문이었다. 1997년의 재판은 재심재판이 아니라 헌법을 초월하는 이 5.18 특별법에 의한 정치재판이었던 것이다. 이 '5.18 특별법'은 헌법에서 규정한 일사부재리 원칙과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무시했다. 재심 사유가 없는 5.18 사건을 좌익판사들이 다시 판결한 것도 있을 수 없는 사법쿠데타였지만, 재판 내용은 그야말로 무법천지 그 자체였다 .

검찰이 작성한 팩트들은 1980년 것이나 1995년 것이나 변함이 없었다. 단지 1996-97년에 재판을 주도한 판사들의 해석이 상식과 논리를 뛰어 넘는 막무가내였다. 증거도 철저히 무시되었고, 헌법도 법률도 무시되었다. 오직 허위사실들로 가득 찬 여론조작에 의한 북한식 인민재판만 있었다. 1996년에 발행된 이 사건 제2심 판결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법률도 아니고 헌법도 아닌 '자연법'에 의한다. 자연법이란 국민인식법이다". 1996년에 시작된 5.18 재판은 증거재판도 아니고 법률재판도 아닌 인민재판이었다는 뜻이다. 김영삼은 1995년에 시동을 건 제2의 5.18 재판을 군사독재를 처단하기 위한 재판이기 때문에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라 명명했다. 이 재판과정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들이 아무리 팩트와 법률조항들로 어필해도 판사와 검사들은 "이 재판은 접근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그 접근방식이라는 게 무엇이냐"는 변호인들의 거듭된 질문에는 끝내 답변하지 않았다.

이로써 한국 사회에는 좌익세력과 무산계급이 5.18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대한민국에 반역한 5.18 폭동이 갑자기 민주화운동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이로써 예전의 '내란세력'이 '헌법수호세력'이 됐고, '내란'을 진압한 '국가'는 '내란세력'이 됐다. 국가가 북한에 정복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이변이었다. 5.18 폭동에서 사망한 폭도들이 묻힌 곳은 국립묘지가 되었고, 그 묘지를 가려면 길 한 가운데 묻어놓은 전두환의 동상을 지금도 밟고 다녀야 한다. 전두환은 지금도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동상을 5.18 묘지 입구에 묻어놓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짓밟고 다니게 하는 것은 김정은 집단의 잔악성과는 어울려도 거룩하다는 민주화운동과는 어울릴 수 없다.

김일성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충신세력이 되었고, 반공세력이 역적세력으로 내몰렸다. 공산세력이 남한 사회의 주인이 된 것이다. 남한이라는 국가가 내용상 북한체제로 체제전환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계 역사에 이렇게 황당하게 뒤집힌 역사는 아마 이것 말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재판 모두가 다 5.18을 북한이 주도한 침략사건이라는 사실은 발견하지 못했다.

5.18 판결문은 한국 사법부의 주홍글씨, 6개의 "사실 오인"

5.18이 일반에 사실과는 정 반대로 잘못 알려진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5.18의 바이블이라는 황석의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이 북한이 날조한 대남모략용 유언비어를 종합한 것이었는데도 이것이 지금까지 "5.18 역사의 바이블"로 널리 읽혀왔다. 하지만 팩트들로 뒷받침되지 않은 이 내용들은 모두 북한의 대남모략용 책자들로부터 나온 것들이라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다른 하나는 1980년의 수사자료와 1995년의 수사자료를 음미하면, 광주사태는 북한특수군 만이 주도할 수 있었다는 결론을 금방 내릴 수 있었는데, 당시의 수사-재판 과정에 참여한 인물들이 분석의 초점을 오직 정치적 희생양을 찾는 데에만 집중한 관계로 이 중요한 사실에 대한 분석을 도외시 했다. 그 결과 개개인 모두가 살인기계요 맥가이버 능력으로 훈련된 북한특수군 만이 이룩할 수 있는 기적적인 작전성과를 놓고 광주대학생 600명이 이룩한 성과인 것으로 사실 오인을 하였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은 광주시민들 중 이 600명에 소속됐던 사람은 단 1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5.18은 북한의 공작세력이 와서 저지른 침략 및 살인 행위였는데 한국 사법부는 북한의 공작에 말려들어 이를 공수부대의 소행이라고 뒤집어 씌웠다. 이처럼 사실 오인된 판결문은 소각 절차를 밟아야 마땅할 것이다. 아래에 5가지 오인된 사실들을 정리한다.

사실 오인#1 : 총상 사망자 116명 중 70%가 시민군(북한군)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카빈소총 등에 의해 사망했는데 사법부는 이를 모두 계엄군의 소행인 것으로 사실 오인했다.

사실 오인#2 : 5월 18일, 오전 9시, 책가방에 돌멩이를 준비해가지고 전남대에 주둔하는 7공수 33대대를 찾아가 공수대원들에 돌을 던져 7명에 부상을 입히고 금남로 충장로로 달려가 파출소들을 태우고 준비된 유언비어를 살포한 훈련된 250명을 사법부는 학생시민군으로 사실 오인했다.

사실 오인#3 : 가장 큰 사살오인은 광주에 만능 맥가이버 능력을 가진 학생시위대가 600명씩이나 있었다고 오인한 것이다. 가방에 돌을 넣어 감히 계엄군 집결지를 찾아가 7명의 공수대원에게 부상을 입히고, 공수부대원보다 더 빠른 달리기 속도로 달아나 광주 도심 파출소들을 불태워 시민들을 끌어모으고, 시민들에 준비된 공작용 유언비어를 살포하고, 감히 정규사단의 이동계획을 탐지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몽둥이 실력으로 기습을 가하여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 14대의 지프차를 빼앗아 몰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직행했다. 이 차량대열을 목격한 군용차 제조공장 사람들은 아연실색 했을 것이다. 당시는 자기용 운전시대가 아니라 지역마다 운전기사가 희소자원이었다. 이런 때에 600명의 맥가이버 집단은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신형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를 동시에 몰고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비밀규정에 의해 숨겨진 44개 무기고를 털어 5,408정위 총기를 탈취하여 시민들에 나누어주면서 사용법을 교육시켰고,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해 도청에 2,100발의 폭탄을 조립해놓고, 4,000명의 공수부대를 포위하여 몰살 상태로까지 몰고 가 공수부대로 하여금 구사일생으로 도망을 치게 했다. 한 두 사람이 맥가이버식 초능력자가 아니라 600명 전체가 맥가이버들이었다. 한국 사법부는 이 600명의 초능력자 집단을 광주학생들로 구성된 민주화시위대인 것으로 오인했다.

사실 오인#4 : 당시는 계엄령이 선포되어 전국의 모든 운동권 지도자들은 물론 대학생들 모두가 경찰 눈에 뜨이지 않기 위해 마음 졸이며 숨을 곳을 찾던 시기였다. 사법부는 이런 때에 세계최정상급 특공부대 이상으로 훈련된 대학생 600명이 광주시민으로 존재했다고 사실 오인했다.

사실 오인#5 : 당시 광주에서 불리던 '시민군'은 북한특수군이었다. 그런데 사법부는 이를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된 민주화 시위대'라 사실 오인했다.

가장 중요한 사실에 대해 오인을 한 판결문은 더 이상의 인권유린 등을 예방하기 위해 즉시 폐기처분돼야 할 것이다. 저자의 경우 이 판결문 내용과 다른 역사관을 표현 했다는 이유로 2002년에 5.18 단체들로부터 폭력과 린치를 당하고 서울근교에 살면서도 관할지역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지 못하고, 광주검찰에 체포, 광주로 압송되어 가면서 6시간 동안 수갑을 뒤로 채인 채, 화장실도 거부 당하면서, 아들 벌되는 경찰들로부터 온갖 욕설과 구타를 당했다. 2008년에는 2,270페이지의 5.18 역사책을 저술했다는 이유로 또 5.18 단체로부터 고소를 당해 5년 동안 재판을 받고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이어서 5.18을 북한군이 광주로 침투해서 직접 주도했다는 연구결과를 방송하고 인터넷에 게시하자, 대통령 직속기구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이 내용들을 검열하고 삭체 처분 했다. 이에 법적 소송을 제기하자 대한민국 판사들은 1997년의 대법원 판결만이 정통역사라며 소수의 역사관을 표현하는 것은 반사회적 범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저자의 소송을 기각했다. 이처럼 신성불가침으로 신봉돼온 1997년 대법원의 판결은 위와 같이 최소한 5가지 사실에 대해 '사실 오인'을 범했다.

600명이 수행한 위 핵심 작전 내용들이 수사기록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데도 당시 판검사들은 이 신출귀몰한 특공작전을 광주대학생들이 주도했는지, 북한특수군이 주도했는지에 대해 추적하지 않았다. 전두환 시대나 김영삼 시대나 다 5월 21일의 적전내용이 무엇인지. 누가 했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건 발생 35년이 지난 시점에서 저자가 음미해보니 이 600명이 이룩한 업적은 절대로 광주의 개념 없는 10-20대 부나비들이 해낼 수 있는 업적들이 아니었다. 이렇게 저자의 눈에는 보이는 북한군이 어째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조사관들과 판검사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는가? 북한군에 대해서는 전두환 시대에도 무시했고, 김영삼 시대에도 무시했다.

이들 학생시위대 600명이 광주시민이나 학생이 될 수 없는 이유들

1980년 5월 18일 새벽부터 전국은 계엄령 확대선포와 폭넓은 예비검속으로 인해 전국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못했다. 운동권일수록 숨을 곳 찾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서울지역에 비해 시위가 활발하지 못했다. 광주의 학생운동권 지도자는 전남대 총학생회장인 박관현, 축산학과 학생회장인 윤한봉, 38세의 복학생 정동년, 5.18의 영웅이라는 윤상원 정도 였다. 그런데 박관현과 윤한봉은 5월 17일 밤부터 도망을 다니며 광주사태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정동년은 5월 17일 자정에 체포 됐고, 윤상원은 5월 21일까지도 숨어 있다가 5월 24일 오전까지 도청을 배타적으로 장악했건 북한세력이 안개 같이 사라진 이후 어슬렁거리며 도청에 들어가 5월 25일과 26일,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을 했다.

무시무시한 계엄령의 선포로 당국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받았던 모든 학생과 젊은이들은 모두 숨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광주에서만은 이렇게 다방면에서 고도로 훈련된 대학생들이 조직을 구성한 상태로  600명씩이나 존재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는 판검사들이 사실오인을 주도한 것이다. 이 600명 작전은 신출귀몰하다는 이스라엘 특공대의 엔테베 작전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고난도의 작전이었다. 세계 군사작전의 역사가 다시 쓰여야 할 엄청난 사건이 지금까지 숨겨져 온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검찰과 판사들은 매우 안이하게도 이러한 고난도 작전을 광주의 대학생 600명이 수행한 것이라고 간주했다. 광주에 600명의 대학생도 거리에 나올 수 없던 시대 였고, 설사 나왔다 해도 이런 고난도의 작전을 수행할 대학생 600명 집단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이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 검사들과 판사들은 지극히 비정상이었다.

5.18 사태가 종료되었을 때 주동자들이라고 잡힌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사형언도와 무기형을 받은 주동자들 모두가 다 5월 25일 이후 도청에 들어가 우쭐대다가 잡힌 10-20대 부나비들이었다.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며 엄청난 포상금을 주는 세상이 지금의 세상인데, 5월 21일 참가자들은 유공자들 중에 없다. 5월 21일 작전을 주도한 유공자가 있다면 그는 아마 10억 이상의 보상금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높은 보상금을 받은 유공자는 3억 2천만원, 경찰관 15명을 닭장차에 가둔 전공을 세운 19세의 윤기권이 2억을 받고, 1990년 간첩의 안내로 북한으로 가 대남방송을 하고 강연을 한다. 주동자라고 잡힌 자들 중 '대학생'은 5월 25-27일 도청에서 자기들끼리 갑론을박 하던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계엄당국은 5월 21일 활동한 폭도 대학생을 단 1명도 잡지 못했다. 잡기는커녕 그들에 스나이핑 당하지 않으려고 5월 21일 오후 5시 경, 여단장 등이 부하 몇 사람 데리고 무등산으로 줄행랑을 쳤다.

가장 중요한 5월 21일의 번개작전을 누가 수행한 것인지에 대한 조사 없이 무조건 광주학생 시민들이 이룩한 민주화 성과라고 단정해 버린 재판부는 주홍글씨를 달아야 할 존재들이다. 이렇게 엉터리 같은 재판 결과를 놓고 무조건 1997년의 재판결과를 존중하라 강요하고 재판결과에 어긋나면 범죄라 하는 이 국가는 참으로 미개한 국가다. 우리 국민은 이제부터 1997년의 역사재판이 가장 중요한 핵심 사실들에 대해 사실오인을 한 것이라는 기막힌 사실을 널리 전파해야 할 것이다.

5.18 광주폭동의 주역이 북한특수군 600명이었다는 사실은 검찰기록에 이미 암시돼 있었다

검찰과 국정원이 작성한 정부문서들에는 광주의 대학생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특공작전' 내용들이 '대학생 시위대 600명'이 수행한 작전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편으로는 신출귀몰하는 자신들의 날랜 솜씨를 발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공작을 수행했다. 한국 사회에서 천시 당하는 전라도와 광주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유언비어들을 확산시키고, 잔인한 시체들을 만들어 이를 한국군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고, 광주시민들을 등 뒤에서 쏘아 쓰러지게 하는 방법 등으로 광주시민들을 분노케 하여 폭동에 참가시키는 고도의 정치공작을 병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작전 내용들은 세계 최고수준의 특수부대만이 이룩할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당시의 수사관들과 판검사들은 순진하게도 그것을 600여명의 대학생들이 수행한 전과라고 판단했다.

계엄당국이 체포하여 군법회의 제1심에서 유죄로 판결 받은 폭도들의 숫자는 겨우 328명, 이들은 대부분 10대 및 20대의 개념도 조직도 없는 도시근로자들이었다. 살인과 파괴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광추출신 폭도들의 수가 600명이기는커녕 겨우 328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때 광주에서는 물론 전국을 통털어서라도 600명이라는 날랜 학생폭력 집단이 형성될 수 없었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서슬퍼런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광주는 물론 전국의 운동권 출신들과 대학생들은 예비검속을 통해 체포되었거나 공포에 떨며 꼭꼭 숨어 있었다. 따라서 검찰기록에 명시돼 있는 "학생시위대 600명"은 도저히 한국의 대학생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특기해야 할 사실이 있다. 당시 한국군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328명 중에는 이 600명에 소속된 사람이 단 1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광주에서 촬영된 폭동 현장의 얼굴들은 모두 북한의 고관들

저자는 2002년부터 12년 동안 5.18관련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18만 페이지, 북한자료, 통일부자료 등을 연구하여 3,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8권의 다큐멘터리 역사책을 썼고, 2014년 10월에 마지막으로 "5.18 분석 최종보고서"라는 단행본을 통해 결론을 내렸다. "5.18은 북한의 김일성이 600명의 병력을 보내 국가를 전복시키고 적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일으킨 게릴라 침략이었고, 여기에 김대중을 추종하는 광주의 공산세력이 동조했던 여적사건이었다."

무려 12년에 걸친 연구를 통해 저자는 단호하고도 똑 부러지는 문장으로 이 결론을 냈다. 이 결론을 가장 축복해 준 존재는 하늘이었다. 2015년 5월 5일부터 위 결론을 사실로 입증하는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가 이끌고 있는 단체에는 영상분석팀과 전략분석팀이 있다. 이들은 1980년 광주에서 촬영된 폭도들의 얼굴이 북한정권의 핵심 얼굴들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 어찌 기적이 아니겠는가? 모 언론사의 영상데이터베이스로부터는 1980년 광주에서 촬영된 사진들을 획득하고, 통일부 데이터베이스로부터는 북한의 주요인물정보를 획득하여 이들을 대조 분석한 결과 였다. 시력을 소진시키는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 지금까지 무려 400명의 북한 전쟁범죄자들의 얼굴을 특정해낼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오직 애국을 위한 신념과 극기와 감동적인 열정이 없으면 이룩할 수 없는 땀의 기적이었다.

▲ 1980년 광주에서 찍힌 얼굴들을 오랜 동안 광주시와 방송3사가 나서서 전시하고 "여기 이 광주 민주화운동의 주역들의 얼굴을 찾는다"며 애타게 호소 했지만, 지금까지 광주 주역의 얼굴이라고 나선 사람은 없다. 우리가 11개월 동안 400명의 광수를 찾아내고 얼굴을 대조 분석하여 모든 접속자들에게 공개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광주시장과 5.18 단체들이 광주시청 로비 등을 상시 사진전시장으로 열고 광주시의 유명한 장소들에서 전시회를 열면서 "이 얼굴들 좀 제발 나서 달라"고 호소 했지만, 지금까지 400명 중 "이 얼굴이 바로 내 얼굴이요" 하고 나서는 광주사람 없다. ⓒ뉴스타운

반면 1980년의 광주 사진들 속에서는 광주사람들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5.18에 북한군이 관련돼 있지 않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광주의 5.18 단체들, 광주시장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큰 방송국 3개사가 1999년부터 공개적으로 나서서 1980년 광주에서 촬영된 '5.18의 주역'으로 알려진 4명의 얼굴들과 닮은 사람들을 애타게 찾았지만 한국 국민들 중에는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광주에서 찍힌 폭도사진 속의 400명 모두가 북한 사람들이고, 이 400명의 얼굴 중, "이 얼굴이 바로 내 얼굴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광주인이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북한군 600명의 지휘자는 3성 장군 리을설, 총체적 대남공작 지휘자는 김중린

이 영상 분석에 의해 북한특수군 600명은 당시의 인민군 상장 리을설(1921)이 지휘한 것으로 발견되었다. 이와는 별도의 대규모 행정 엘리트, 예술인, 체육인, 소년단, 유아로 구성된 정치공작팀과 지휘부가 활동했던 사실도 영상분석 결과 발견되었다. 후자의 팀은 대남모략 공작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이었고, 대한민국을 접수하기 위해 필요한 엘리트들이었다. 한국을 살인극의 나라로 모략-선전하기 위해 북한은 사진들을 촬영하여 세계에 전파 했다. 광주의 전남 도청 일대에 북한 사람들로만 남녀노소를 골고루 섞어서 집합시켜놓고, 마치 그들이 광주사람들인 것처럼 위장하여 촬영을 한 것이다. 이 사진들이 이 책에 집중 분석됐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5.18 광주작전은 군사작전, 모략작전, 국가접수작전으로 구성되었다. 이 통합작전은 북한판 CIA국장인 김중린(1923)이 총 지휘한 것으로 분석됐다.

5.18 사진들을 촬영해 국제사회에 전파한 독일인 기자의 정체

"푸른 눈의 목격자"로 알려진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는 독일 출신으로 당시의 기자로서는 유일하게 광주의 폭도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취재를 했다. 독일인 힌츠페터는 일본특파원이었다. 그는 1980년 5월 20일 광주로 잠입하였다가 21일에 광주를 빠져나가 일본에 가서 취재자료를 독일에 송고했다.

5월 23일 그는 북한 특수군의 호위를 받으며 계엄군이 없는 비밀 통로를 따라 다시 광주시에 소재한 전남도청으로 직행했다. 도착하자마자 미리 준비돼있던 북한의 연출 장면들을 촬영했고, 이 사진자료들은 전 세계에 '한국군부가 저지른 살인만행'이라는 내용으로 방송됐다. 힌츠페터가 샛길을 따라 전남도청으로 호위되는 과정을 촬영한 동영상이 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2015년 10월 10일 장대하게 치러진 북한 노동당창건 제70주년 기념행사장 앞좌석에서 다시 발견됐다. 푸른 눈의 목격자는 북한이 고용한 공작원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세계인들은 힌츠페터가 마련한 보도내용을 북한이 연출한 모략공작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위장탈북자들로 구성된 트로이목마, 그들도 광주에 왔었다

저자측의 전략팀과 영상분석팀은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400명의 광수들 중 50명은 현재 서울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탈북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현재 대한민국 최고 랭킹의 유명인들이 되어 있고, 사회 심층부에 뿌리를 내리고 정치적 파워를 행사하고 있다. 한 개의 사진에 탈북자들을 빼닮은 사람이 50여 명 씩이나 들어있다는 사실은 확률의 결과가 아니라 팩트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이들 50명은 '서울광수' 또는 '위장광수'로 명명하고 있다.

이들이 위장간첩으로 의심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들이 직접 광주에 왔으면서도 이 사실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5.18에 북한이 연관돼 있다는 근본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이 그들의 영상을 공개한 저자에 대해 "정신병자다", "미국대사처럼 칼침을 맞을 것이다" "납치하여 가두겠다"는 등 북한식의 험한 표현으로 협박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보를 제작한 목적

이 화보의 내용은 2015년 5월 5일부터 인터넷에 공개 됐고, 3차례에 걸친 8쪽 분량의 호외신문과 각종 인쇄물을 통해 대한민국 곳곳에 전달됐다. 그 결과 아마도 국민의 60% 이상이 5.18의 진실에 대해 알고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진실을 알게 된 많은 국민들은 그동안 속아 온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이에 침묵하는 정부와 언론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한 애국단체가 공산주의로부터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 정도의 결과를 내놓았으면 당연히 국가가 나서서 규명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정부와 언론은 어째서 이토록 무관심하고 냉담할 수 있느냐?"

당연히 정부가 나서야 할 엄중한 국가적 이슈이건만, 매우 기이하게도 오히려 현 정부는 이러한 결과가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는 것을 공권력으로 저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매우 이상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화보집은 언론들의 냉담한 태도와 국가의 방해 속에서 수많은 애국 국민들의 격려와 성금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세 가지 목적을 위해 무료로 배포된다.

첫째, 1980년 5월, 북한은 살인기계요 맥가이버로 특별히 훈련된 600명의 특수군과 또 다른 전문 엘리트 및 꿈나무 공작원들을 광주로 보내 대한민국을 전복한 후, 남침으로 연결시킬 목적을 가지고, 선전포고 없이 한국 영토에 비밀 침투하여 국가전복 활동을 수행 했고, 수많은 광주시민들을 잔인한 모습으로 살해해놓고 이를 한국군의 만행으로 뒤집어 씌웠다. 북한의 이러한 침략행위 양민학살 행위를 국제사회에 고발하고자 한다.

둘째, 1980년 북한이 광주에 데려왔던 북한의 10대 소년들이 김대중 정권 시절에 주로 탈북하여 지금은 수많은 방송국에 고정출연하여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상당한 규모의 팬-그룹을 키우면서 통일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스스로를 가장 훌륭한 애국세력이라고 자가선전하고 있다. 매우 위험한 이 트로이목마의 존재를 고발하고자 한다.

셋째,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5.18 역사가 온갖 허위사실들로 포장되어 국가정체성이 북한에 있는 것으로 확산 교육되고 있다. 이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과 국민들은 대한민국을 증오한다. 이 위험한 현실을 고발한다.

세계에 유례가 없을 이 영상 고발장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물론 모든 세계인들의 관심을 초대한다. 북한의 이 잔인무도한 악행과 세계를 속이는 허위선전 행위는, 세계평화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UN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역량들이 일치단결하여 응징해야 할 인류 공동의 적인 것이다.

▲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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