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오, 남재준 해임 주장 왜 나왔을까
이재오, 남재준 해임 주장 왜 나왔을까
  • 백승목 대기자
  • 승인 2014.03.16 16: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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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 사건 등 반공법, 국가보안법위반 5차례 투옥 앙금 탓?

▲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이 어떤 이유로 그와 같은 주장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민주당 김한길, 새정추 안철수와 함께 남재준 국정원장 해임을 주장하고 나섰다. 

함북 회령거주 화교(중국 공민)출신 위장탈북 보위부간첩 피의자 유우성 출입경(出入境)증거조작 의혹에 대한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른 것이 겠지만 한 때나마 국가권익위원장으로 검찰 경찰 국세청은 물론 대통령직속기구인 국정원과 독립적 헌법기구인 감사원까지 5대 사정기관 조정역을 자처해가면서 이명박 정권 2인자 행세를 하던 자 입으로 성급하게 떠벌일 얘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재오(69)는 남민전 민투책, 민통련, 전민련, 범민족대회(범민련) 등 반정부 반체제투쟁으로 일관된 전력(前歷)과 1973년 10월 1차 투옥에서 1989년 4월 5차 투옥에 이르기까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 전과가 화려한 인물이다. 

그런 경력을 가진 자를 누가 천거를 했는지는 몰라도 김영삼에 의해 1996년 1월 11일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에 '전격(電擊)입당' 우익에 편입된 이래 다양한 원내 경력을 쌓으면서 2007년 17대 대선에서는 MB계 수장으로 활약, MB정권 제2인자로 권세와 영화를 누리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재오는 1976년 2월 29일 결성, 1979년 10월 4일 일망타진 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서준비위원회=남민전'에 1976년 10월 3일 가입, 남민전 전위조직으로 주간사령부라고 통칭 한 '민주투쟁국민위원회=민투책(民鬪責)'을 역임한 자로서 1980년 12월 24일 대법원에서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 형이 확정 (1981.10.20. 대검찰청 공안부 좌익사건실록 12권)복역 중 1983년 8.15 특사로 석방 되었다. 

그 후로도 이재오는 민통련 조국통일위원장과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을 역임, 1989년 4월 범민련결성 전단계로 범민족대회를 추진 중 문익환 밀입북사건 관련, 5차로 투옥을 당했다가 1990년 2월에 석방, 같은 해 11월 10일 민중당이 창당되면서 사무총장을 역임하는 등 지속적으로 반체제 활동에 몸을 담아 왔다.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5 차례나 투옥 경험이 있는 이재오가 국정원을 비롯한 검찰 경찰 대공수사보안방첩기관에 심정적으로 우호적일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집권여당의 중진의원으로서 국가안보중추기관인 국정원에 대하여 '민변'과 같은 시각을 가지고 민주당과 같은 주장을 한다는 것은 '무책임의 극치'라 하겠다. 

이재오는 그의 저서 함박웃음(2009.8.29)에서 첫 번째 구속사건인 1973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 유신반대시위 배후 조종 및 내란음모죄로 장훈고등학교에서 수업도중 체포되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고 "기존체제에 분노와 좌절을 느낌" 이라고 적고 있다. 

이재오는 이어서 1979년 11월 2일 긴급조치해제로 석방당일 남민전(南民戰)사건으로 재 구속 되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 할 정도로 고문을 당했다며, 12월 2일 자신을 면회 온 부친으로부터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지난10년 간 투쟁이 옳은 것이라면, 앞으로의 감옥생활 역시 당당하게 맞서라. 감옥을 집으로 알고 살아라."는 부친의 격려에 오열하면서 부친에 대한 존경과 "삶에 대한 의지가 확고해 짐" 이라고 적었다. 

이재오가 5 차례의 투옥 중 서신을 모아 1991년 10월 5일 출간한 옥중 서간집 '긴 터널 푸른 하늘' 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복역 당시 자신의 심경과 결의를 담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위 서간집 1980년 10월 7일자 부모님 전상서와 1982년 1월 14일자 서신에서도 논어 자한편(子罕篇)에 공자가 겨울이 돼서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늘 푸름을 알게 됐다는 뜻으로 말 했다는 "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라는 구절을 빌어 불굴(不屈)의 투지와 지조(志操)를 스스로 다짐 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모습은 옥중에서 누군가에게 "이를 갈았음"을 짐작케 하고 "(?)투쟁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겠다는 결의와 다짐"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위 논어 자한편에 "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삼군가탈수야, 필부불가탈지야)"라고 대장군의 지위는 빼앗을 수 있어도 비록 보잘 것 없는 자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는 구절이 있듯이 이재오가 35~37세 당시의 다짐이 무엇이었으며, 그 다짐이 언제까지 갔느냐 하는 것이 궁금할 다름이다. 

이재오에게 있어 벗어날 수 없는 멍에와 지울 수 없는 낙인(烙印)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南民戰) 주간사령부 민주화투쟁국민위원회=민투(民鬪)책(責)이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에 대해 이재오는 기회 있을 때 마다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고 주장하면서 몹시 억울해 하고 있다. 

그러나 1982년 12월 24일 대법원 확정판결이나 노무현정권 당시 '경찰청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조사보고서(2006.9.14)'에 의하면, 남민전 사건은 "용공조작(容共造作)이 아님" 이란 결론과 함께 "고문 가혹행위에 대한 객관적 증거는 찾을 수 없음" 이라고 끝을 맺은 사건이다. 

이런 조사결과는 사건 당시 수사관행이나 시대 상황으로 보아 수사과정에서 구타 같은 강압수단이 없었다고 확언할 수는 없겠으나 사건의 내용이나 성격 자체가 고문과 잔혹행위 등 강압에 의한 용공조작이 아니라 사상최대의 간첩사건이라는 경찰수사와 검찰 기소, 법원판결이 맞는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이재오 의원이 인용한 송백지절(松柏之節)은 옥고를 견뎌내기 위해 스스로에게 다짐으로 그쳤을 뿐, 그가 가입했던 남민전 강령과 규약을 실천하고 남민전 가입선서, 남민전 전사생활규범, 비밀사수 등 '전사의 4대 임무' 이행 관철에 대한 투지를 불사르려는 다짐이 아니었기를 바란다. 

남민전이 김일성에게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와 "경애하는 주석 김일성 동지"라는 충성맹세를 한 간첩조직이었다 할지라도 이재오가 옥중에서 다짐한 지조(志操)는 김일성이 말한 '혁명적 지조'는 아니었어야 한다. 

김일성이 "비록 한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당과 수령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하려는 각오가 되여 있고 단두대에 올라서도 혁명적 지조와 절개를 지킬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주체의 혁명관이 튼튼히 선 참 된 혁명가(1985 평양 과학백과출판사, 정치사전)"라고 강요한 '혁명적 지조' 와는 전혀 별개라고 믿고 싶다. 

현시점에서 이재오가 할 일은 남재준 사퇴 주장이나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빈정거림이 아니라 5선 중진여당의원 답게, MB정부 2인자 답게, 국가정보원의 체질을 개선하고 기능을 강화하는 데 앞장설 일이지 뒷전에서 뒤통수나 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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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백정 2014-03-17 15:29:02
삘갱이짓 하다 빵깐별 다섯개면 경력이 참말로 훌률하요... 리맹박동무와 호형호제지간으로 권세 누릴만도
하요. 이런 인재를 발굴한 영생이동무가 삘갱이 균을 배양해서 시방 적화가 다 됭것 아닝게비여. 다음참에
정권 바뀌면 적화통일 대박도 터질껏이고 좋아서 워쩐다요, 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