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대만의 정체성
스크롤 이동 상태바
진화하는 대만의 정체성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중국의 ‘중국인 정체성’ 정책이 ‘대만인 정체성’을 부추긴 셈
대만독립시위. 사진=알자지라 뉴스 갈무리 

대만은 ‘대만인’, 중국은 ‘중국인’이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주창하고 있는 중국 본토는 대만은 중국 본토의 일부라면서 대만인을 ‘중국인’으로 생각하지만, 정작 대만 사람들은 ‘중국인(Chinese)’이 아닌 ‘대만인(Taiwanese)’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중국 정부의 정책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외교 문제 전문 매체인 ‘더 디플로매트’는 25일 ‘대만의 정체성의 진화’라는 글에서 이 같이 주장했다.

정체성(identity) 문제는 대만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총통 선거와 양안 관계 모두에서 중심 무대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대만에서는 ‘중국인 정체성(Chinese identification)’이 눈에 띄게 감소했다.

이러한 쇠퇴는 중화인민공화국(PRC)이 1970년대 이후 중국인 정체성을 독점한 결과라는 게 디플로매트의 진단이다. 베이징의 목표는 중국 민족주의와 문화적 매력을 활용하여 대만을 본토에 더 가깝게 만드는 것이지만, 대만을 밀어내는 역효과를 낳았다. 대만 사람들은 중국과의 차이점을 보여주기 위해 대안적인 정체성을 찾고 있다.

중국 본토에서 패배한 후 중화민국(ROC) 정부는 대만 섬으로 이전했다. 그러나 국민당(KMT)은 중국 민족주의 정당(당명을 직역하면)으로서의 충성심을 유지했다. 국민당은 “본토 재정복(reconquering the mainland)”을 대만 모든 사람의 임무로 삼았다. 이 섬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요새이자 국민당이 본토로 최종 복귀하기 위한 기지가 될 예정이었다.

중국은 줄곧 “대만은 중국 본토의 일부이며, 별도의 대만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으로 인정되어 대만의 주권은 중화민국(ROC)에 반환됐다. 그 전에는 1895년부터 이 섬이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다.

중국 민족주의를 보여주는 또 다른 방법은 문화 홍보와 보존이었다. 대만으로 후퇴하는 동안 국민당은 제국 왕조의 역사 원본을 포함하여 베이징 자금성에서 국보를 타이베이로 가져와 타이베이 고궁 박물관에 보관했다. 이 제스처는 ROC가 중국 왕조의 합법적인 상속자라고 주장하려는 국민당의 노력을 상징한다.

보다 광범위하게 ROC 정부는 중국 전체의 합법적인 정부라는 주장을 유지하기 위해 대만에서 중국 문화를 홍보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대만 정부(중화민국)는 유교의 미덕과 본토의 장소를 따서 타이베이 거리의 이름 을 바꿨다. 중국어는 학교의 공식 언어이자 유일한 언어가 되었다. 중국어를 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처벌을 받게 된다. 중국어가 아닌 라디오와 TV 프로그램은 하루에 몇 시간으로 제한됐다. 학생들은 본토 철도의 기차역을 포함하여 학교에서 중국 역사와 지리에 대한 모든 세부 사항을 배워야 했다.

ROC에 대한 국제적 인정은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유일한 대표자라는 주장에 달려 있다. ROC의 국제적 인정과 유엔 및 기타 국제기구 참여는 이러한 주장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에 장제스(蔣介石, 장개석) 정부는 삼국 시대의 말인 “진정한 중국인과과 반역자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의미의 “汉贼不两立” 정책을 채택했다. 한나라 황실의 후예들이 세운 사천성 촉한(Shuhan)의 재상 제갈량(诸葛亮, Zhuge Liang)은 이 말을 통해 중국 북부의 위나라와의 관계와 중국 통일을 위한 군사적 침략을 거부한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했다.

이 역사적 사례를 암시로 사용하여 장제스 정부는 중화민국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이고 본토는 반군의 통제하에 있으며, 중국과의 국제적 개입은 중화민국 정부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정책에 따라 타이페이는 베이징에서 중국 정부를 인정한 모든 국가 또는 조직과 관계를 끊는 것이었다.

1971년 중국의 유일한 대표라는 중화민국의 주장은 큰 타격을 입었다. 유엔은 1971년 10월 25일 총회 결의 2758호를 채택했는데, 이 결의는 “장제스의 대표들을 유엔과 관련된 모든 기구에서 불법적으로 점령한 장소에서 추방하라”는 것이다. 장제스는 더 이상의 굴욕을 피하기 위해 대표단에게 유엔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대만 독립시위./사진=알자지라뉴스 갈무리 

퇴장 후 대표단 단장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엄청난 희생과 공헌과 함께 유엔 창설 회원국임을 선언하고, 결의 2758호를 뮌헨협정의 유화정책과 비교했는데, 이 협정으로 인해 나치의 침략이 더욱 부추겨졌다.

중화민국이 유엔에서 탈퇴한 후 장제스의 선언에서 그는 중국 전체를 대표하는 대륙 중심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불러들이고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백만 중국 동포들을 숙청한 “마오주의-공산주의 산적 집단(Maoist-Communist bandit group)”이라고 불렀다. 장제스는 또 제2차 세계대전 후 유엔선언에 서명하기 위해 중화민국 정부가 중국을 대표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중화민국은 중국과 7억 중국 인민의 진정한 대표자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유엔에서 퇴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일본 등 서방 국가들의 인정을 잃게 된 것은 중화민국의 유일한 대표라는 주장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중국은 외국과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국제공세에 나섰고, 중화민국의 국제기구 가입을 주장했다.

중화인민공화국(PRC)은 대만의 국제적인 공간을 압박함으로써 베이징을 중앙정부로, 타이베이를 지방정부로 위치시키는 '하나의 중국 원칙(One China principle)'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중국은 점점 더 “중국인”의 의미를 독점하고 그것을 중국 정체성과 동일시했다.

중국 공산당이 보기에 중국인이라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정치체제와 당의 이념을 지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 공산당의 비전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배신자 또는 민족의 쓰레기(scum of the nation)”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1979년 “대만 동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Message to Compatriots in Taiwan)”는 중화민국이 미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날에 발표됐다. 중화민국이 가장 중요한 동맹국을 잃은 날, 그 메시지는 힘의 위치에서 타이베이를 상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베이징의 승리 선언으로 작용했다.

이 메시지는 “대만이든 본토든 모든 중국인은 중국 국가의 생존과 성장, 번영에 대한 강력한 책임이 있다”며 중국 전체를 대표해 전달됐다. 따라서 “조국 통일의 중요한 과제는 그 누구도 회피할 수도, 시도해서도 안 되는 문제”라고 선언했다. 통일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반역자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메시지는 “세계는 일반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유일한 합법 정부로 하여 오직 하나의 중국만을 인정한다. 최근 중·일 평화우호조약 체결과 중·미 관계 정상화는 이런 흐름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중국의 정체성에 대한 중국의 독점은 중국의 국제적인 인정을 더욱 뒷받침했다.

중화민국은 중국에게 국제적인 인지도를 잃었지만, 변화에 대한 국내의 압력도 증가하고 있었다. 1945년 국민당이 (대만 섬에)도착한 이후, 대만 원주민(本省人-본성인, benshengren)들은 중화민국 정권과 본토인들(外省人-외성인, waishengren)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2-28 사건은 대만 시위에 대한 국민당의 강력한 탄압 이후 이러한 상호 불신을 상호 증오로 더욱 악화시켰다. 대륙 중심의 중국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국민당의 정책에 대응하여 대만인들은 본토 테마를 대만 테마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귀화를 주장했다. 작가들은 지역 방언을 사용하고, 대만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등장인물들을 묘사했다. 대만의 정치 운동가들도 귀화와 독립을 기치로 내걸고 민주화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대만의 토착 정체성의 증가와 중국의 정체성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독점은 대만의 국민당과 외성인을 딜레마에 빠트렸다. 대만에서 2세, 3세의 외성인들이 태어나고 자랐으며, 중국 본토는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이었다. 이러한 세대교체는 젊은 외성인들이 본토에 대한 애정이 적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이 가본 적이 없는 곳이다.

국민당은 대만 독립설화를 거부하고 대만 원주민의 정체성을 의심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중국의 정의는 중국 공산당의 민족주의적 비전을 거부하는 등 이질적인 것이기도 했다. 중국에 대한 정의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독점이 증가하는 것은 대만 사람들이 중국을 전 세계적으로 정의하는 방식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딜레마에 직면한 국민당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려고 했다. 장제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장칭궈(蔣經國-장경국, Chiang Ching-kuo)를 시작으로, 국민당은 대만 원주민의 정체성 요소를 선별적으로 수용하여 국민당의 정통성을 재활성화했다.

1973년에서 1979년 사이에 국민당 중앙상임위원회의 대만인 대표는 두 배 이상 증가했다. 1982년, 장칭궈는 타이완 출신의 기술 관료인 리덩후이(李登輝-이등휘, Lee Teng-hui)를 부주석으로, 후에 그의 후계자로 올려놓았다. 다가, 장칭궈는 계엄령을 해제하기로 결정했고, 신문, 다른 출판물, 그리고 정당에 대한 금지를 취소했고, 이것은 대만인들에게 더 많은 정치적 권력과 대표성을 부여했다.

리덩후이가 대만 출신 최초의 국민당 총재가 되었을 때, 그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그는 1992년 민족통일지침에서 국민당의 하나의 중국과 민족통일 원칙을 유지하면서 점점 중국인의 정체성을 독점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 서사와 구별되는 2천만 명 이상의 대만인에 대한 집단 정체성을 형성해야 했다.

이 불가능한 집단 정체성을 해결하기 위해 리덩후이는 대만인(본서인), 외성인 사이의 민족적 차이 사이의 차이를 메우려고 노력한 뉴 타이완의 개념(concept of New Taiwanese)을 소개했다. 그는 뉴 타이완 사람(신대만인-新臺灣人)을 “대만에 살고 대만을 사랑하는 사람(anyone who lives in and loves Taiwan)”으로 정의했다. 이 정의를 통해 외성인은 정체성 위기를 해결하고, 이 새로운 개념으로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게 됐다.

또한 대만의 민주화와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외성인과 대만인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연관시켰다. 민주주의는 또 대만 제일주의의 정체성을 강화시켰는데, 왜냐하면 국민당이 대만의 유권자들에게 호소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리덩후이 이후, 이 가치관에 기반 한 정체성은 대만 대중들에게 점점 더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국민당 마잉주(馬英九-마영구, Ma Ying-Jeou) 전 주석은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가 양안 평화 발전의 “역사적 전제조건”이라고 표현하고, “민주주의, 자유, 인권, 법치”가 “대만의 핵심 가치”이며, 중화인민공화국(PRC) 정부가 이러한 가치를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대만과는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대만의 두 민진당 주석인 천수이볜(陳水扁-진수변, Chen Shui-bian)과 차이잉원(蔡英文-채영문, Tsai Ing-wen) 역시 민진당의 전통적인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 대만 국민 전체를 통일하려는 가치관적 정체성을 받아들였다.

오늘날, 서로 다른 정체성이 양안 차이(cross-strait differences)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성공적인 대만 정책을 만들기 위해 대만의 정체성 진화를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대만 정체성은 문화적 실체로서의 중국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에 대한 거부이며, 2019년 이후 홍콩에 대한 탄압은 이러한 거부를 더욱 악화시켰다. 중국의 지속적인 중국 정체성 독점은 대만 사회를 밀어내고, 대만 대중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대안을 찾도록 강요할 뿐이라는 게 디플로매트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매체는 중국은 대만의 정체성 논의에 영향을 미치려면 개방적인 접근법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첫째, 중화인민공화국은 대만의 민진당을 포함한 대만의 모든 정치 세력과 협력해야 한다. 민진당을 대화에서 배제한다면, 대만의 정체성 정치 형성에 어떤 돌파구도 마련되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중국의 개념과 중국의 정책을 분리하고, 대만, 홍콩, 마카오, 화교를 초청하여 중국을 공동으로 정의해야 할 것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