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난화] 과학은 정치가의 통치수단에 불과한가?
[온난화] 과학은 정치가의 통치수단에 불과한가?
  • 김상욱 대기자
  • 승인 2021.05.0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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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난화 예측 개척자에겐 포기란 없다
사진 : NASA 홈페이지
사진 : NASA 홈페이지

<아래의 글은 로이터 통신이 지난 420일 게재한 특별 리포트의 주요 골자이다>

1969년 가을 미국의 한 젊은 박사과정의 학생이 모교인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이 발행하는 잡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다시 베트남전은 격화일로였다. 미국 대통령은 당시 리처드 닉슨이었고, 찰스 맨슨이 일으킨 일련의 살인 사건 때문에 미국 전역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젊은 학생, 마이클 오펜하이머의 마음을 흔든 것은 그 사건과 무관한 어떤 제목이었다. “인류에 의한 지구의 변용이었다.

기후과학의 선구자 고든 맥도널드가 집필을 한 기사의 첫 머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인류의 기술은 확실히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물리적 환경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 결과는 지구상 인류의 미래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기사는 화석연료의 연소와 그에 따른 이산화탄소 방출이 지구를 뜨겁게 달구어 변모시킬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 75세가 된 오펜하이머는 인류가 핵무기를 능가하는 대규모 환경파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당시 그 기사를 읽었을 때가 처음이라고 회고했다.

오펜하이머는 나로서는 하늘이 뒤집히는 충격이었다. 물론 지금 와서 보면, 그 충격, 환경파괴는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고 말했다. 천체 물리학자에서 환경운동가, 그리고 결국 기후과학의 거인 중 한 명이 된 오펜하이머의 느린 행보가 시작됐다.

과학자로서의 수십 년 동안 오펜하이머는 산업계 중진들에게 조언을 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많은 대학원생을 지도했다. 남극의 얼음이 녹음으로써 전 세계 도시에 미치는 위협에 주목했다. 해수면 상승에 대해 미국 연방 의회나 뉴욕시에 조언을 했고, 영국 마가렛 대처 총리에게 지구 온난화에 관한 강의까지 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1990년부터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에 참가, IPCC의 패널로서 최고참 리포트 집필자의 한 명이라는 점이다. 2007년 보고서 작성에 공헌한 IPCC관계자와 함께 미국의 엘 고어 전 부통령과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눈부신 공적이 있는 반면 오펜하이머와 그와 같은 과학자들은 어떤 면에서 결정적인 패배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세계 지도자들, 특히 호주, 미국 등 주요 화석연료 배출국의 지도자들이 많은 국민의 지지를 얻어가면서 지구온난화 방지 노력을 늦추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 행동이 일으킨 기후변화라는 연구 결과에 단호히 저항하는 지도자도 있다. 

오펜하이머와 같은 미국 기후학자인 제임스 한센이 미 의회에서 증언한 지 30년이 넘었다. 인류는 화석연료를 태움으로써 지구온난화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경고였다. 그 이후 수천 명의 과학자들이 인류에게 지속적으로 경고를 해 왔다. 그리고 그 예측은 차례차례 적중해 갔다. 그들이 예견했던 초기 단계의 환경 파괴는 이제 전 세계에서 관측되고 있다.

2020년 시베리아 북극권 일부에서는 기온이 40도에 이르면서 동토가 녹아 거대한 크레이터가 출현했다. 대조(大潮 : 조차가 큰 조석)시에 일어나는 이른바 맑은 하늘의 홍수는 세계의 많은 저지대 도시에서 볼 수 있게 됐다. 미국 서해안 삼림에서는 유례없는 규모의 산불이 일어나 대낮인데도 재()의 비()가 내리는 일몰과 같은 불길한 광경을 낳았다.

각국 정부는 중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많은 나라가 태양광 발전을 시작해 지구에 친화적인 에너지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88IPCC 설립부터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소방법에 초점을 맞춘 2016년 지구온난화 대책의 국제적인 기본틀 파리협정까지 획기적인 지구온난화 저지 대책으로 협력을 강화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 협정에는 배출량 삭감에 대한 강제력은 거의 없다. 보다 발본적인 대책을 지지하는 목소리는 적대적인 석유 산업의 로비 활동이나 일반 시민의 무관심, 재생 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의 어려움 등으로 약해져 왔다.

오펜하이머의 오랜 경력을 돌이켜보면, 세계를 기후 변화에 일깨우려던 그의 노력의 성공과 좌절을 더듬을 수 있다. 그의 동료 중에는 지구가 직면한 곤경에 절망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해법은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거의 비과학적인 신념을 갖고 있다. 운명론에는 알레르기적인 반발심을 품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지구 온난화에) 정면으로 대처를 하지 않고, 우리가 그 결과에 괴로워할 가능성은 항상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증명할 수는 없지만.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신뢰와 나의 낙관주의에서 오는 생각이지만, 어느 쪽도 특별히 합리적인 근거가 없으니 너무 따지지 말라고 오펜하이머는 말하고 있다.

* 시작은 오이스터(oyster : )

오펜하이머의 아버지는 뉴욕 주 롱아일랜드에 사는 한 남성 밑에서 보석상을 하고 있었으며, 가족을 동반해 이 남성의 집을 자주 방문했었다. 그곳은 석조로 만든 큰 저택으로 부지 내에는 개울이 흘러 해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오펜하이머 소년은 굴(oyster)이 서식하는 것을 발견했다.

소년 오펜하이머는 6~7세 때쯤 개울가에 들어가 놀다가 굴을 발견했다. 한 다스(dozen) 이상의 굴을 파내어 집에 가져가서 엄마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어머니는 깜짝 놀라 물이 오염돼 있기 때문에 먹으면 병이 난다며 모두 버리게 했다.

소년 오펜하이머는 그 이후에도 계속 그 일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내가 환경보호 운동가가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이 체험에 있다고 말했다.

20년 후 어른이 된 그에게 환경 문제에 다시 눈을 돌릴 계기가 찾아왔다. 인간이 지구 온난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잡지 기사를 읽었던 같은 해 캘리포니아 주 샌타바버라 인근 바다에서 석유 유출 사고가 발생, 그를 비롯한 많은 미국인이 충격을 받았다.

석유 유출이 미치는 환경에의 피해손실을 호소한 활동가들의 노력도 있어, 1970422일에 첫 지구의 날(Earth Day)가 개최되어 수백만 명의 미국인이 환경보호 규제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했다. 오펜하이머는 이날 시카고 북부의 한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지구에 대해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했다. 그해 12월 닉슨은 환경보호청을 설립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과 환경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융합해야 할지 이때까지 오펜하이머는 알지 못했다. 그는 1971년 하버드 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학센터에서 박사 연구원 자리에 올랐다.

“5년 예정이었다고 그는 말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풀타임의 연구·교육직을 얻게 되어, 10년을 심우주(深宇宙)의 가스 연구에 소비했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경력 선택은 그를 계속 괴롭혔다. 1975년 미 항공우주국(NASA)에 혜성의 가스와 화학적 프로세스에 관한 논문을 제출해 찬사를 받았다.

매우 높이 평가받았다. 그리고 나는 너무 침울해졌다. 왜냐하면 연구자로서는 더 이상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과학의 틀을 벗어나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오펜하이머는 회고했다.

1981년 그는 마침내 하버드대를 그만뒀다. 우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래도 좋다. 지구에서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말이다.

마음의 소리를 따른 그는 비정부기구인 환경방위기금(EDF)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이 기금은 과학적 근거와 정치적 주장을 조합해 미국의 정책 결정을 압박하는 활동을 해왔다. 1960년대에는 살충제 DDT에 대한 규제 도입을 주도했고, 1974년 식수안전법 통과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펜하이머는 EDF에 들어가자 우선 산성비의 원인에 착안해 석탄 연소로 인한 배출물을 줄이기 위한 법률 제정을 위해 움직였다. 석탄 연기에 포함되는 이산화황이나 질소산화물이 대기 중의 수분과 결합하면 황산과 질산이라고 하는 부식성의 화합물이 생겨 그것이 빗물이 되어 지구로 돌아와 버리는 것이다.

산성비는 기후변화와 사촌뻘인 것으로 나타났다. 온난화 또한 화석연료 사용으로 대기 중에 배출된 이산화탄소 등 가스에 의해 일어나고 있음이 과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진 것이다. 이것을 기회로, 오펜하이머의 경력은 학술 연구자에서 EDF의 과학자 겸 활동가로 변신했다.

그는 나는 환경운동가 중 누구보다 과학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의 연구와 일치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오펜하이머의 활동도 있어, 미 의회는 1990년에 대기 정화법을 개정했고, 석탄 화력을 사용하는 시설의 연기에서 이산화황과 질소산화물을 제거하는 규제를 가했다. 정책 과정에서 과학의 가치와 한계를 포함해 정치적 프로세스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내부적으로 매우 많이 배웠다고 오펜하이머 씨는 회고한다.

그 밖에도, 배운 것이 있었다고 한다. 의욕이 있는 사람들은 9년 동안 집중해서 노력하면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와의 하루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오펜하이머를 포함한 기후변화학자들의 주목도가 높아진 시기였다. 그 무렵만 해도 오펜하이머는 EDF에서 일하면서 산성비에서 기후변화로 서서히 눈길을 옮기고 있었다. 이어 해수면 상승과 이와 관련된 남극 얼음의 융해 등의 문제를 주목했다.

특히 지구온난화로 인해 서남극 빙상(남극 빙상의 일부, 서남극을 덮는 빙상)이 붕괴될 경우 해수면 상승 위험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만약 이 얼음이 모두 녹아버리면 해수면이 3~3.66m 정도 상승한다. 만약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대폭 감축돼 빙상 대부분이 상처 없이 남더라도 2100년까지 해수면은 수십cm 상승할 것으로 예상됐다.

빙상 붕괴 위험이 시사하는 것은 기후상의 위험 지대가 섭씨 2도 안팎이라는 것이 나의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이는 궁극적인 물음인 허용할 수 없을 정도의 온난화는 어느 정도인가에 답해 기후정책을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894월 대처 영국 총리는 오펜하이머와 25명 안팎의 과학자들을 런던 총리관저로 초청해 이 새로운 연구 분야에 대해 각료들과 함께 강의를 들었다. 대처 자신이 법률가로 변신하기 전에는 옥스퍼드대에서 화학을 전공했고, 과학 소양이 있었다. 이 스터디 모임은 아침 9시 반부터 오후 3시 반까지 계속됐다.

대처는 그 약 1년 후 퇴임할 때까지 1992년 체결되는 유엔기후변화협약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등 몇 가지 과학적인 노력을 추진했다.

대처의 스피치 라이터(speech writer : 연설문 작성자)는 석유가 나는 텍사스가 기반이어서 온난화에 회의적이었던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대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1980~1990년대 미국 정치우파 사이에서 신흥 기후연구에 대한 반대론이 힘을 얻었다. 또 대처도 그 후 자세를 180도 전환. 2002년 회고록에서 대처는 세계 각국이 화석연료 사용에 따른 이산화탄소 등의 배출을 제한하는 것을 목표로 한 교토의정서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도 했다.

대처는 회고록에서 오늘의 종말론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는 기후변화다. 세계적인 초국가적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훌륭한 구실이 될 것이라고 적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교토의정서에 서명은 했으나, 공화당이 다수인 상원에서 부결될 것을 예상하고는 의회에 자문조차도 하지 않았다.

이 글을 옮기면서 생각나는 한 마디 : “과학은 정치가들의 통치 수단에 불과한 것인가 ?”

사진 : NASA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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