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2017년, 기억에 남는 세상을 등진 사람들
격동의 2017년, 기억에 남는 세상을 등진 사람들
  • 김상욱 대기자
  • 승인 2017.12.27 1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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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 떠난 사람들, 김정남-류샤오보-노리에가-헬무트 콜

▲ 한 시대를 풍미하며 어떤이는 충격을, 어떤 이는 감동을 주는 등 2017년도 격동의 해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 4명에 대해 다시 한 번 회상해 본다. ⓒ뉴스타운

매년 그러하지만 2017년도도 격동의 국제사회로 기록되고도 남을 듯하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정권 출범,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의 제 6차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지속적인 도발 행위 등 중대한 뉴스들이 잇따랐다.

올해 들어 특히 기억에 남을 만한 말을 남기고 떠난 몇몇 인사를 되돌아본다.

◕ 김정남 암살 “개인적으로 3대 세습에 반대한다”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위원장 겸 국무위원장의 배 다른 형(이복 형)인 김정남(45세)이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2층 로비에서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출신 여성을 2명을 동원 신경작용제인 VX가스를 이용 암살시키는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세기적인 암살 사건이 발생, 충격을 주었다.

홍콩의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CMP)는 김정남을 “북한의 잊혀진 아들”이라고 요약했다. 아버지 김정일의 장남으로 한 때 총애를 받았지만, 2001년 위조 여권으로 일본 입국으로 구속된 사건을 전후해 뉴스에서 사라져버렸다. 김정은으로의 3대 권력 세습을 개인적으로 반대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이후 김정남은 ‘세습 반대’발언으로 늘 신변의 위험을 안고 살다가 말레이시아에서 이복동생인 김정은에 의해 암살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 노벨 평화상 수상자 중국의 류샤오보(劉暁波) “나에겐 적은 없다. 미움도 없다”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류샤오보는 2017년 7월 13일, 향년 61세로 사망했다.

1989년 6월 이른바 톈안먼 사건으로 그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해 4월 베이징에서 학생운동이 들불처럼 거세게 일어나자 살고 있던 미국에서 귀국을 단행했다. 그는 2개월 후인 6월4일 톈안먼 사태 후 학생운동을 조정했다는 혐의로 체포, 투옥됐다.

2008년도에는 중국 공산당 일당 독재 종식을 내세우며, 얼논 자유 등을 목표로 이른바 ‘08헌장’의 기초를 주도적으로 작성한 혐의로 중국 공산당 당국에 구속됐다. 국가전복혐의로 지역 11년을 선고받았다. 2010년에는 옥중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지만, 중국 공산당 정부는 그의 출국을 허락하지 않아, 그가 앉아 있어야 할 노벨평화상 수상자 의자에는 주인공이 없었다.

미국에서 사실상 망명 생활을 보낸 중국의 시각장애인 인권운동가이자 변호사인 천광성(陳光誠)은 “인권옹호를 위해 일어난 용감한 사람들이 중국에서는 온이 나고 있다”며 류샤오보의 죽음이 바로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 마누엘 노리에가 파나마 전 장군 “미국은 파나마에 대해 행하고 있는 것은 침략이자 심리전을 하고 있는 것”

마누엘 노리에가 전 장군은 2017년 5월 29일, 향년 83세로 세상을 등졌다. ‘노리에가 장군’으로 불리며 1980년대 중미의 파나마에서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며 군정을 이끌었다.

강대국 미국을 농락하고, 미국에 질린 삶이었다. 냉전 시대 중남미 좌파세력의 봉쇄를 노리는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와도 관계를 맺긴 했지만, 1989년 “마약 퇴치‘ 등을 내세운 미국의 파나마침공을 허용했다.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하였을 때 ’노리에가‘는 바티칸 대사관으로 피신했지만 미군은 대사관 주변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큰 소리로 음악을 틀었다. ’노리에가‘는 열흘 만에 항복했고, 미군에게 생포되어 미국으로 압송됐다.

‘노리에가’는 2007년 석방될 예정이었지만, 프랑스의 범죄인인도 요청으로 미국을 나가지 못했다. 프랑스는 그의 돈세탁 건에 대해 궐석재판을 통해 이미 유죄판결을 내렸고, 2010년 4월 26일 ‘노리에가’는 불법자금 세탁혐의에 대한 재판을 받기 위해 프랑스로 이송되었으며, 7월에 열린 재판 결과 돈세탁 혐의로 7년형을 언도받았다.

‘노리에가’는 2011년 10월 23일 프랑스 항소법원의 본국 송환 결정으로 11월 12일 22년 만에 파나마로 송환되었다. 이듬해인 2012년 2월, 고혈압과 뇌졸중 증세를 보여 산토 토마스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1990년에 구속됐고, 미국 등지에서 투옥되어 복역했다. 그의 죽음을 두고 파나마의 바레타 대통령은 :우리 역사의 1장이 끝났다”고 자신의 트위터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 헬무트 콜 독일 총리 “내 목표는 통일이라는 일에는 변함이 없다”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는 2017년 6월 16일 향년 87세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유럽연합(EU)의 장 클로드 융커 위원장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안타까워했다. “전후의 위인이 우리를 떠나고 말았다”

유럽연합이 주최하는 첫 유럽의 무대가 “위인”의 마지막 메이저 무대였다.

헬무트 콜 전 총리는 3개의 큰 업적을 남겻다. 그 첫 번째는 동서독의 통일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서독 총리 헬무트 콜은 “10항목‘을 제안하는 등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장벽 붕괴 1년 안에 통일을 실현했다.

두 번째 업적은 유럽단일통화 ‘유로’를 도입했다. 서독의 ‘자랑거리’인 ‘독일 통화 마르크’화의 포기에는 반대론이 아주 강했지만, 콜 총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유로화 도입을 밀어붙였다.

마직막 업적으로는 앙겔라 메르켈 현 총리를 발굴해낸 장본인이다. 옛 동독 출신 연방의회 선거에서 첫 당선된 메르켈을 1991년 첫 입각시켰다. 메르켈 현 총리는 지금 새 정부 수립을 함에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만일 총리 재선되어 임기를 마치게 되면 무려 16년이라는 장기 통치를 하는 전후 최장 총리로 기록될 것이다. 메르켈 총리의 4선 연임에 성공하면 자신을 발탁한 헬무트 콜 전 총리의 16년과 같은 최장수 총리기록을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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