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 새로운 경쟁 시대로 회귀 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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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 새로운 경쟁 시대로 회귀 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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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싱턴과 모스크바, 핵무기 경쟁으로 회귀할까, 협상테이블에 앉을까
- 우크라이나 침공과 푸틴의 핵무기, 핵전쟁 공포 불러일으켜
-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주는 교훈은 두 가지
- 미국과 러시아, 극복해야 할 가장 높은 장벽 “분노, 상호의심, 불신”
극복해야 할 가장 높은 장벽 중에는 이제 미국과 러시아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분노(anger), 상호의심(mutual suspicion), 불신(mistrust)”이 있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협상단이 합의 도출에 필요한 유연성을 발휘하기 어려워지고, 협상 전체를 희생하는 철통같은 검증에 집착하게 된다./ 사진 : 월드아틀라스 캡처
극복해야 할 가장 높은 장벽 중에는 이제 미국과 러시아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분노(anger), 상호의심(mutual suspicion), 불신(mistrust)”이 있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협상단이 합의 도출에 필요한 유연성을 발휘하기 어려워지고, 협상 전체를 희생하는 철통같은 검증에 집착하게 된다./ 사진 : 월드아틀라스 캡처

경쟁을 하다가고 잠시 휴전을 하기도 하고, 다시 치열한 경쟁을 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 역사이다. 역사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군비통제(arms control)'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의 이유 없는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2022224)이 유럽에서 재앙적인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대규모의 그리고 가장 위험한 전쟁이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다. 나아가 핵전쟁에 대한 공포를 대중의 의식 속으로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미국 외교정책 전문지 포린 폴리시(FP)’315일자 기사에서 핵전쟁, 혹은 핵무기에 의한 최후의 날(doomsday)시나리오는 여전히 가능성은 낮지만,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핵무기로 인해 고조될 위험이 커졌다고 진단했다.

워싱턴과 서방의 고위 관료들은 이제 세계를 핵의 문턱(nuclear brink)으로 내몰지 않고, 러시아의 도발에 대응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FP는 주문했다.

현재의 위기는 미국과 러시아의 핵무기 통제의 미래에 대한 의문을 강력히 제기하고 있다. 핵의 벼랑 끝 추진(nuclear precipice drive)은 결국은 워싱턴과 모스크바를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는 새롭고 보다 더 위험한 기능을 갖춘 냉전식 군비경쟁(Cold War-style arms racing)으로 회귀할까?

우크라이나 전쟁은 때때로 미국과 옛 소련의 군비통제가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 비교가 된다.

실제로 1963년부터 1968년까지 5년 동안은 핫라인 협정(Hot Line Agreement), 제한적 시험금지조약(Limited Test Ban Treaty), 우주조약(Outer Space Treaty), 핵확산금지조약(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이 체결된 그야말로 엄청난 협조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위기와 그에 따른 합의 사이의 관계는 처음에 보이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덜 선형적(linear)이다. 그 역사적 기록은 오늘날 우리의 기대를 알려야 할 몇 가지 중요한 미묘한 차이를 말해주고 있다.

첫째, 쿠바 미사일 위기는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깊은 불신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니키타 흐루시쵸프(Nikita Khrushchev) 소련 지도자의 쿠바 무기 철수를 훨씬 넘어선 것이다. 상호불신이 문제였다.

F. 케네디(John F. Kennedy)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서 196211월 흐루쇼프에게 공격용 무기가 설치되고 있다는 돌이킬 수 없는 사진 증거는 처음에는 정부와 그 다음에는 우리 국민 모두에게 깊고 위험한 충격이었다고 알렸다.

이런 상황에서 핵무기 통제는 위기 이후 8개월 동안에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1963년 봄까지 포괄적인 핵실험 금지에 대한 미-소 협상은 검증 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졌었다. 19636월 케네디가 핵실험의 일방적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후에야, 양측은 이 교착상태를 타개할 수 있었다.

둘째, 쿠바 미사일 위기는 케네디가 이미 고려하고 있고, 동시에 추구해야 할 중요한 무기 통제 목표를 촉진할 수 있게 했다.

전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된 포괄적 시험금지 협상도 마찬가지다. 아이젠하워, 그리고 소련과 미국 지도자들 사이의 의사소통 관계를 확립하는 것에 대한 초기 회담은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취임하자마자 케네디 자신은 우리가 해야 할 다른 모든 것을 너무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던 치명적인 군비 경쟁을 끝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1961년 가을 그는 이러한 노력을 운용하기 위한 야심찬 군축 계획을 고안했고, 그 계획에는 이후에 추진된 많은 군비 통제 아이디어의 씨앗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지 번(George Bunn) 미 군비규제 군축청(Arms Control and Disarmament Agency)의 법무 자문위원(General Counsel)이 후에 쿠바 미사일 위기는 미국과 소련이 협상을 추구해야 하는 관심을 일깨움으로써 이러한 노력을 촉진시켰다고 적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또 대통령에게 상원을 통해 어떠한 시험 금지 조약도 얻을 수 있는 강화된 권한을 부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위기는 케네디 대통령과 흐루시쵸프가 이미 고려했던 것 이상의 혁신적인 핵군축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촉발하지는 못했다. 군비통제 옵션이 아직 논의되지 않았다면 핵외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알 수 없다.

셋째, 쿠바 미사일 위기로부터 얻은 많은 교훈들이 군비 통제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의 크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2년에서 1968년 사이에 미국의 비축량은 거의 16% 증가한 반면 소련의 탄두 수는 거의 3배나 늘어났다.

1990년대에 미국 국방장관을 맡게 될 윌리엄 J. 페리(William J. Perry)군비와 긴장을 줄이는데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군비 경쟁을 다시 활성화하는 결정은 위기이후 환경의 "비현실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에겐 케네디가 쿠바에서 흐루시쵸프를 이겼다는 생각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 이미 진행 중인 핵 군비 경쟁을 가속화시킨 것이다. 이 이야기의 영향력은 케네디 행정부를 훨씬 넘어 후임 행정부까지 이어져 갔다.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은 자신의 첫 임기 동안 시작한 주요 군사력 증강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를 인용했다. 1983년 그가 관찰한 바와 같이, “그 당시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은 소련보다 81의 핵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그래서 우리가 일어서서 그들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눈을 깜빡였다고 했다.

레이건에게 그 사건은 핵전쟁에 빠질 위험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억지력의 가치에 대한 교훈이었다. 확실히, 쿠바 미사일 위기는 오늘날의 완벽한 전조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역사를 너무 문자 그대로 인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FP는 주의를 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통찰력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정책 입안자들에게 핵무기로 인한 위협을 줄여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더라도, 군비 통제에 냉담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극복해야 할 가장 높은 장벽 중에는 이제 미국과 러시아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분노(anger), 상호의심(mutual suspicion), 불신(mistrust)”이 있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협상단이 합의 도출에 필요한 유연성을 발휘하기 어려워지고, 협상 전체를 희생하는 철통같은 검증에 집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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