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게 '욤 키푸르 전쟁'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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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게 '욤 키푸르 전쟁'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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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마스를 무찌르려면 ?
- 이스라엘은 정보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 필요
1973년 10월 6일부터 25일까지 벌어진 욤 키푸르 전쟁 즉, 제 4차 중동전쟁 당시의 사진 모음. 사진 : 위키피디아 

1973년 10월 욤 키푸르 전쟁(Yom Kippur War : 제 4차 중동전쟁의 별칭)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이스라엘 의회의 새로운 의원이 된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은 이스라엘 크네세트(의회)에서 분노를 터뜨렸다.

“그들은 왜 군사 장비를 전선에 올리지 않았느냐?” 이스라엘과 이집트-시리아 연합군이 18일간 벌인 이 4차 중동전쟁은 2,000명 이상의 이스라엘 군대가 사망하는 결과를 낳았고, 국가의 정치적 기득권층에 충격을 주었으며, 군부의 신뢰에 타격을 입혔다. 베긴은 왜 정부가 분쟁에 대비하지 않았는지 알고 싶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인들은 소름 끼칠 정도로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가지구를 실효 지배하고 있는 정파(政派) 하마스(Hamas : 열의, 열정의 뜻)가 지난 10월 7일 이스라엘 영토에 대해 전례 없는 공격으로 1,000명 이상을 살해한 후, 이스라엘인들은 자국의 자랑스러운 정보기관이 하마스의 침입을 보지 못한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그들은 왜 이스라엘 군대가 가자 국경에 방어 장비와 인원이 너무 적은지 묻는다.

미국의 대외 문제 전문 매체인 ‘포린 어페어즈’는 20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제 4차 중동전쟁이 주는 교훈에 대해 이어갔다.

욤 키푸르(Yom Kippur)는 유대 달력으로 새해 첫 번째 10일 되는 날 즉 ‘속죄의 날(Day of atonement)’을 의미한다. 욤 키푸르 전쟁은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연합군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으로 두고 말하는 데, 제 4차 중동전쟁의 다른 비유이기도 하다.

욤 키푸르 전쟁은 오늘날의 이스라엘-하마스 큰 충돌과는 명백히 다르다. 텀단 무기로 잘 무장된 주권국가 이스라엘과 가내 수공업식의 로켓포 등을 가진 재래식 군대 하마스 정파와의 전쟁이다. 그 선동자들인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전 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를 원했다. 그 전쟁은 냉전의 그늘 속에서 벌어졌다.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전투원들을 도왔고 이를 끝내는 휴전 협상을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에게는 하마스의 공격이 가져온 굴욕적이고 놀라운 일이 1973년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충격적인 침공을 고통스럽게 연상시키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놀라운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이스라엘인들은 기습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국경에 관한 한 국가의 정치는 상대적인 자신감에 의해 지배됐다.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두어 아랍 6개 국가를 패주시키고, 영토를 4배로 늘렸다. 고대 이후로 유대인들이 그토록 안전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성경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예리고(Jericho :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도시 이름)를 정복하는 데 7일이 걸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967년의 승리는 결말 없이 승리를 가져왔다. 이집트는 손실을 만회하기로 결정했다. 이스라엘의 자신감은 이스라엘이 6년 후의 기습 공격을 준비하는 일련의 가정으로 이어지는 데 도움이 됐다. 이 가정은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공격에 앞서 세운 것으로 보이는 가정과 유사하다.

이스라엘군이 이집트 제3군을 포위하고 다마스쿠스 교외의 포병 진지 내에 진입한 후 휴전으로 욤 키푸르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이스라엘 대중은 정부가 전쟁 발발을 예측하지 못한 것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스라엘 정부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 광범위한 조사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원회 증언에서 이스라엘 정보 장교는 군대가 “카이로에서 일어난 일에 근거하여” 1973년 전쟁이 있을 수 없다는 잘못된 평가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수에즈 운하 근처에서 이집트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눈에 띄게 명백한 징후가 아니라 고위급 논의를 도청했다.

총소리가 조용해지면 이스라엘도 같은 종류의 조사를 소집할 것이 거의 확실했다. 1973년 위원회의 보고서는 2,200페이지에 달했지만 1973년의 몇 가지 큰 교훈은 이스라엘이 당시에 이해해야 했고 지금도 여전히 이해하고 있는 교훈임에는 틀림없다는 게 포린 어페어즈의 진단이다.

* 후츠파(Chutzpah)

우선 후츠파(Chutzpah)는 이스라엘에서 “담대함, 혹은 저돌적”이라는 뜻의 후츠파 정신을 말하는데,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질문하고, 도전하며 어떤 때는 뻔뻔하기까지 한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밝히는 이스라엘 특유의 “도전정신”을 말한다.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67년부터 1973년 사이에 이스라엘은 A-4 스카이 호크 전투기(A-4 Skyhawk fighter jets) 178대, F-4 팬텀 제트기(F-4 Phantom jets) 110대, 탱크 약 2,000대를 추가했다. 같은 기간 이스라엘 경제는 무려 85%나 성장했다.

6일 전쟁이 끝난 후 몇 달 동안, 이스라엘의 원래 1948년 국경을 따라 “위험”이라고 적힌 수많은 표지판이 여전히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중 하나에서는 누군가가 국경(Border)앞에 NO라는 단어를 스프레이로 칠했다.

사실은 양측의 갈등이 결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몇 주 만에 이집트는 이스라엘 해군 구축함인 에일랏(Eilat)호를 침몰시켰고,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를 따라 있는 이집트 도시들을 포격하여 보복했다. 당시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는 이스라엘의 국가 지위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이스라엘이 분쟁 중에 점령했던 시나이 반도를 되찾는 데 전념했다. 나세르는 종종 “강제로 빼앗긴 것은 강제로 돌려받을 것(that which was taken by force will be returned by force)”이라고 선언했다.

1969년부터 70년까지 공개적으로 갈등이 들끓어 올랐다. 440명의 이스라엘인과 수만 명의 이집트인이 사망했다. 당시 소련이 이집트에 첨단 SAM-3 미사일 시스템을 공급하자 이스라엘 공군은 놀랄 만큼 많은 수의 항공기를 잃기 시작했다. 평화를 중재하기 위한 미국과 UN의 다양한 노력이 시작됐다.

1970년 나세르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 뒤, 사다트(Sadat)가 그의 뒤를 이었다. 많은 이집트인들은 사다트를 그의 전임자와 비교하지 못했다. 그는 종종 나세르의 ‘푸들(poodle : 아첨꾼)’로 비방을 받았다. 거리 시위에서 군중은 “거인은 사라졌다. 당나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외국 지도자들도 사다트를 나쁘게 평가했다.

기록상 관리들은 그를 ‘과도기적 지도자(transitional leader)’라고 표현했다. 1970년 이스라엘 정보국의 연구에서는 사다트의 ‘지적 수준이 낮았다(intellectual level was low)고 결론을 내렸고, 1972년 말 업데이트에서는 그가 ‘약하다(weak)’고 추가했다.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이집트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무함마드 하피즈 이스마일(Muhammad Hafiz Ismail)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미국 국무장관이 만약 이집트가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한다면, “이스라엘이 다시 한 번, 1967년보다 더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다트는 자신이 약자가 아님을 재빨리 보여주었다. 1971년 쿠데타 시도 실패, 경제 파탄, 1967년 이집트의 패배에 대한 복수를 위해 애쓰는 군 장교단에 직면한 사다트는 전쟁에 나서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나세르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을 했다.

그는 국경을 상대적으로 조용하게 유지하고 참호에 있는 장교들을 비켜갔으며, 후배지만 높은 평가를 받는 직업 군인인 사드 샤즐리(Saad Shazly)가 이끄는 유능한 장군 그룹을 임명했다.

샤즐리와 엄선된 장교 그룹은 이집트 군대의 강점과 약점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이스라엘을 상대로 신중하게 전쟁 계획을 세웠다. 샤즐리는 적어도 시작하려면 시나이반도 전체를 점령할 필요는 없고 단지 6마일만 적의 영토로 진격하여 사상자를 가함으로써 이스라엘에 충격을 가하면 된다고 결론지었다. 소모전과 국제적 압력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1967년 이전 국경으로 철수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소련의 지대공 미사일을 이용해 이스라엘 공군을 무력화하고 견착식 로켓(shoulder-fired rockets)을 이용해 이스라엘 장갑차를 무력화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욤 키푸르 전쟁, 즉 제 4차 중동전쟁 당시인 1973년 10월 7일. 이집트 군트럭이 수에즈 운하를 건너고 있다. 사진 : 위키피디아 

무엇보다도 샤즐리의 계획은 놀라움이었다. 그는 소련이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을 때 서방 정보기관을 속이기 위해 성공적으로 사용한 전술을 사용했다. 즉, 공격에 앞서 반복적인 훈련을 수행하여 관찰자가 정상적인 군사 활동과 공격 준비를 구별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1973년 1월 1일부터 1973년 10월 1일까지 수에즈 운하를 따라 군대를 동원했다가 해산시키는 일을 반복했다.

소수의 이집트 최고위 군 장교만이 10월 6일인 제 23차 동원에서 군대가 운하를 건너라는 명령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은 이집트군 8,000명 중 단 한 명만이 공격 계획을 하루 이상 일찍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거의 모든 다른 사람들이 같은 날 아침에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 일부에 불과하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군대 전체를 과소평가했다. 비록 이스라엘이 국경 너머의 이집트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일련의 요새를 건설했지만, 지도자들은 카이로 군대가 번개 공격으로 그들을 압도할 만큼 충분한 능력이 없다고 느꼈다. 1971년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16시간 만에 3개의 보병 사단과 700대의 전차를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동시키는 전쟁 게임을 진행했다. 한 최고위 장군은 “그들이 성공할 가능성은 10%도 안 된다”며 당시 활동을 일축했다. 그는 “아랍 병사들은 지능, 적응성, 빠른 반응 등 현대전에 필요한 자질이 부족하다”고 했다.

* 맹목적(THEORY-INDUCED BLINDNESS)

이스라엘 신문 예디오스 아로노스(Yedioth Ahronoth)의 2005년 조사에 따르면, 1969년 어느 날, 키가 크고 흠잡을 데 없는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런던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에 들어와 모사드 요원과 통화를 요청했다. “나는 당신 밑에서 일하고 싶다.”고 그 남자가 말했다. “당신이 가장 터무니없는 꿈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알려 드리겠다. 나는 돈, 많은 돈을 원한다. 그리고 내 말을 믿어라. 기꺼이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참으로 기꺼이 돈을 지불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서비스를 제공한 사람이 안와르 사다트의 대통령 비서이자 나세르의 사위인 아슈라프 마르완(Ashraf Marwan)이었기 때문이다. 예디오스 아로노스 신문 조사에 따르면, 그는 이스라엘로부터 현재 가치로 2,400만 달러(약 324억 원)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생각해보면, 스파이 활동으로 가장 많은 돈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미국인은 CIA 이중 스파이인 알드리치 에임스-Aldrich Ames-였는데, 그는 오늘날 400만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만 받았다.)

다른 정보 중에서 마르완은 이스라엘 군사 계획가들이 이를 설명하기 위해 히브리어 용어인 컨셉치아(Conceptzia) 또는 ‘개념’을 만들 정도로 매우 중요해 보이는 정보를 처리자에게 제공했다. 이 컨셉치아는 이집트가 이스라엘 공군과 맞설 수 있는 소련의 첨단 전투기를 확보하기 전까지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군사 계획의 체스판에서는 동체에 다윗의 별이 있는 전투기가 가장 큰 부분으로 간주됐었다. 이스라엘 국방 예산의 거의 50%가 공군에 지출됐다. (실제로 1967년에서 1972년 사이에 이스라엘은 전체 GDP의 10%를 공군에만 지출했다.)

사다트는 소련 제트기를 구입하기 위해 모스크바와 계약을 맺었지만, 이 제트기는 1974년 말까지 이집트에 인도될 예정이 아니었다. 1973년에 이스라엘인들은 이 비행기를 조종할 조종사를 훈련시키는 데 최소한 1년이 걸렸기 때문에 앞으로 몇 달 동안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일부 이스라엘 관리들은 마르완이나 그들이 자랑하는 감시 기술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것을 걱정했다. 이스라엘 대령 요시 랑고츠키(Yossi Langotsky)는 1973년 중반 젊은 정보 장교인 훗날 이스라엘 총리가 될 에후드 바락(Ehud Barak)에게 왜 대부분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거기에서”라고 말할 용기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1973년 가을, 당시 이집트, 시리아와 분쟁을 벌이고 있던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골다 메이어(Golda Meir) 이스라엘 총리와 비밀리에 만나 이들 국가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무시됐다. 이스라엘 정보부는 주의해야 할 45개의 “전쟁 징후”를 식별했으며, 1973년 10월 초에 이 중 30개 이상이 현장에 존재했다. 그러나 컨셉치아에 갇힌 이스라엘 군사 계획가들은 이러한 징후의 대부분이 군사 훈련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즉 이론에만 함몰되어 현실 상황은 실명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르완은 전날 밤까지 공격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경고하지 않았다.

욤 키푸르에서 이스라엘 정보부는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가 자신의 컴셉치아를 보유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사다트의 군대는 이스라엘이 평화 조약 없이 시나이반도에서 철수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스라엘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스라엘 군대가 그의 군대를 포위하자 그는 제지당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려는 그의 계획은 성공했다.

* 보다 더 밝은 여파

‘욤 키푸르 전쟁’을 촉발한 역학관계와 오늘날 사이에는 놀랄 만한 유사점이 있다. 하마스는 산만한 훈련을 강화하고 이스라엘-가자 국경을 따라 전사들을 반복적으로 이동시키고 지난 몇 달 동안 후퇴하는 등 이집트와 유사한 전술을 사용했다. 이스라엘은 또 하마스의 자신감, 계획 능력, 감시 회피 능력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했다. 하마스 고위 관리인 알리 바라카(Ali Baraka)는 소수의 하마스 고위 지도자들만이 10월 7일 전사들에게 국경 장벽을 뚫으라는 명령이 내려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은 조사위원회를 소집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1973년 11월 18일, 이스라엘은 욤 키푸르 전쟁의 참패를 조사하기 위해 시몬 아그라나트(Shimon Agranat) 대법원장이 이끄는 아그라나트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90명의 증인으로부터 청취하고 수사관들이 다른 188명의 증언을 수집하게 했다. 보고서는 컨셉치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극소수의 이집트 소식통으로부터 나온 “황금 정보(golden intelligence)”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비난했다.

이스라엘의 모든 후속 조사위원회는 아그라나트 위원회의 그늘에 존재한다. 이 단체는 이스라엘인들이 현재 ‘참수의 문화(culture of decapitation)’라고 부르는 것을 확립했다. 이는 실패에 책임 있는 사람들을 한통속으로 처단하여 실패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대량 해고와 사임으로 대응하려는 본능이다.

1974년 4월 2일 위원회가 예비 보고서를 발표한 지 일주일 뒤 메이어는 사임을 발표했다. 이스라엘 국방장관, 외무장관, 재무장관도 교체됐다. 메이어는 욤 키푸르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영웅이 있다면 바로 데이비드 엘라자르(David Elazar) 군 참모총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역시 해고됐다.

오늘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뒤따를 조사위원회는 이스라엘의 현 지도부에 더욱 가혹할 수도 있다. 아그라나트 위원회는 이스라엘이 명백한 전쟁 징후를 무시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가오는 조사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잘못된 핵심 가정은 1973년에 가졌던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했으며, 거의 20년 전 가자지구에서 철수한 이후 이스라엘이 채택한 전략의 핵심에 이르렀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철수하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관리들은 억지력(각 공격에 대한 날카로운 대응)과 경제적 인센티브를 통해 국경이 비교적 조용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22년에 이스라엘은 67,000대의 트럭에 보급품을 가자지구로 보냈고 20,000명의 가자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에서 일할 수 있는 허가를 발급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하마스가 그러한 정도의 물질적 지원을 잃을 위험을 결코 감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한동안 이 전제는 옳은 것처럼 보였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수시로 로켓 발사를 교환하고 여러 차례 ‘미니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분쟁은 관리 가능한 것처럼 보였고 이스라엘 납세자들은 수십억 달러를 절약했다.

2005년 이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점령 비용은 연간 약 15억 달러, 즉 2000년대 중반 이스라엘 GDP의 1%에 해당하며, 이는 팔레스타인 인구를 지원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8,000명의 이스라엘 정착민을 보호하기 위해 24,000명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러한 재정 부담의 완화는 의심할 바 없이 2005년부터 현재까지 이스라엘 GDP를 거의 4배로 늘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더 이상 가자지구에 군대가 영구적으로 주둔하지 않게 되면서 이스라엘의 사상자 수도 급격하게 감소했다.

그러나 하마스 공격이 명백히 보여주듯이 이스라엘은 안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스라엘 관리들은 적의 가장 심각한 위험을 효과적으로 대처할 생각을 하지 못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적의 동기를 오해했다고 너무 일찍 결론을 내렸을 수 있다.

2006년 레바논의 헤즈볼라(Hezbollah : 신의 정당)와의 전쟁에 대한 이스라엘의 조사인 위노그라드 위원회(Winograd Commission)에서 전 이스라엘 총리이자 의회 의원인 시몬 페레스(Shimon Peres)는 전쟁은 실수들의 경쟁이며, 가장 큰 실수는 처음에 전쟁에 돌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욤 키푸르 전쟁 이후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반환하고 이집트가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는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오늘날 평화에도 비슷한 기회가 있을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하마스를 축출하기 위해 작전을 펼치면, 누군가 가자지구에서 권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끄는 다국적 아랍군이 안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미국의 안보 보장과 민간용 우라늄 농축 허가에 힘입어 라말라에 기반을 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가자지구로 복원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욤 키푸르 전쟁 이야기는 수많은 오래된 가정이 뒤집힐 때 팔레스타인 영토에 이중 국가 해결책(two-state solution)이 없거나 효과적인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가정과 같은 해로운 가정도 바뀔 수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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