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이 밝힌 4.3 사태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치명적 역사왜곡을 불렀다"
"박원순이 밝힌 4.3 사태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치명적 역사왜곡을 불렀다"
  • 장호석 군사전문기자
  • 승인 2016.10.17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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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광덕 소장, "노무현정권의 4.3 진상보고서는 군과 경찰을 무시한 보고서"

▲ 한광덕 예비역 육군 소장 ⓒ뉴스타운

제주 4.3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은 "좌익세력이 살인 현상금을 걸고 경찰관 살해로 시작된 것"이라고 4.3 사태 진상규명위원회 군측 대표를 역임한 한광덕 예비역 소장은 기자가 취재 중에도 절규에 가까운 호소를 했다.

많은 예비역 장군들 중에서 군과 민간부문에서 존경을 받고 월남전에 참전했던 우리 군의 전승 중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 여겨지는 두코전투의 영웅인 한광덕 예비역 육군 소장은 "지난 2014년 1월 22일, '4.3 희생자추념일' 입법예고에 따른 문제점을 정부에 건의하는 세미나가 프레스센타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음에도 현장의 열기를 어떤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 장군은 "1948년 5월 8일이라면 한반도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5.10선거) 이틀 전입니다. 이날 기사에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읍면동에 인민해방군을 조직하고 목포에까지 김일성군이 내도 하였으니 안심하라"고 선동하며 "순경 1만원, 형사 2만원, 경위 이상 3만원의 살인현상금을 걸고 경찰관 살해를 촉구(당시 쌀 한가마니 가격, 300원)했다"며, "5월 8일 이전의 여러 신문에서는 제주 남로당의 각급 인민위원회 결성대회에서 긴급동의로 스탈린과 김일성이 명예위원장에 추대되었다."고 말했다. 한 장군은 당시에 "곧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시작 된다" "친일경찰을 사살하라"는 등의 선동문구가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기사만 보아도 5.10 선거를 부정했던 제주 4.3 무장폭동의 성격과 배경을 직감할 수 있음에도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는 소련군정이 단행했던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1946년 3월 5일)과 비밀화폐개혁(47.12.1일)이 한반도의 남과 북에 미친 영향은 기술되지 않았고, 오로지 그 폭동의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주민들의 희생만을 강조, 국군과 경찰이 학살주범으로 묘사되어 대한민국의 정통성까지 부정되는 결과가 초래되고 있었는데 이제 급기야는 그 폭동의 개시일자를 선택하여 '4.3 희생자추념일'로 정했다고 하니 과연 대한민국 대통령과 국회는 정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까?"며 역사인식이 한심한 정부와 국회를 비판했다.

또한 "노무현 정권시절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기획단(단장,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 박원순 현 서울시장)에서 작성된 이 보고서가 군과 경찰을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제안한 수정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상태로 2003년 10월 15일, 고건 총리 주재하의 4.3 위원회에서 강행 통과되던 날에 국방부와 경찰위촉의 4.3 위원 3명 전원은 서명란에 '부동의' 서명을 했고 일괄사퇴를 선언했음을 다시금 밝힌다."고 말했다.

한 장군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걷어찰 수 있었던 전환점은 미국에 대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었기에 민족해방의 기쁨에 대한 감사는 일단 미국으로 향하는 것이 정상이었음에도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대한 기대를 자극하는 선전선동 효과로 미군은 일본군을 계승한 점령군으로 매도되었고 소련군만이 민족의 해방군으로 환영 받는 기현상이 발생했었고 지금도 그 뿌리가 남아있음을 보게 된다"며 "UN의 축복으로 통일국가를 세우는 절호의 기회였던 5.10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거부했던 4.3 무장 폭동의 배경에는 소련의 스탈린이 있었음이 쉽게 확인된다"고 말했다.

당시에 "5.10 선거를 기초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일단 건국되었으면 모든 폭동은 자동소멸 됐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정권수립(48.9.9)이후에는 오히려 한라산의 인공기 계양이 증가되고 폭동의 강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고, 창설초기의 국군선배들이 어렵게 4.3 무장 폭동의 진압에 나섰던 것이며, 살인현상금을 걸었던 경찰관 살해로 시작된 4.3의 비극이 더욱 확대되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하길 "오늘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확인할 것은 북한의 소작농민들이 무상으로 분배 받았던 그 토지가 그 후 집단농장으로 바뀌게 되면서 드디어는 북한 주민 3백만 명이 굶어 죽어도 3대 세습독재에 데모 한번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며, 그들에게는 제주도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보다도 상상을 초월하는 훨씬 중한 비극이 오늘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 주민들은 동구라파 여러 나라를 소련 위성국으로 만들었던 스탈린 방식의 무상분배에 완전히 속았던 것이고 그 결과가 오늘의 북한 현실이라면 제주도에서의 4.3 무장 폭동진압은 오히려 국군과 경찰의 위대한 업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며, 많은 공부를 해서 세상의 앞날을 멀리 내다보았던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혜안과 용기와 함께 자유 우방국 미국에 대한 고마움도 더욱 새롭게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강조하기를 "왜곡된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수정보완 없이, 그리고 제주도를 수학여행 하는 학생들에게 반(反) 대한민국 정신을 주입하는 제주 4.3 평화기념관 전시물 내용의 대폭적 개편이 완료되지 않은 현 상태에서, 대통령의 선거공약이었다는 이유만으로 '4.3 희생자추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한다는 논리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을 동시에 부정하는 중대한 반역이 될 수밖에 없다"말했다.

또한 "제 9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형근 대장은 '군번 1번의 외길인생'이란 자서전에서 당시의 군 수뇌부가 일선부대의 남침징후 보고를 묵살 내지 무시한 사건과, 6월 24일 저녁의 육군 장교 클럽 낙성파티, 6월 11일부터 발령 되어있던 비상 경계령의 6월 24일 0시 해제, 그리고 6월 25-27일간의 국군후퇴를 반격북진으로 허위 보도했던 중앙방송 등의 10가지 사건을 '6.25 전쟁의 10대 불가사의'로 열거하고 이 불가사의가 풀려야만 국가의 백년대계가 보장될 것이라 설파했으나, 그 이후 정부차원의 규명노력을 저로서는 확인할 수 없었는데. 북한의 김정일이 그 해답을 우리에게 주었다."며, 김정일은 1997년 5월 26일, "민족의 수령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 렬사"라는 노동신문 특집보도를 통해 '김일성 특사' 성시백의 대남공작 업적을 대대적으로 공식 찬양했었다.

이 특집보도 의하면 "남침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된 배경에는 물론 제주도의 4.3 무장폭동까지도 성시백이 영향을 미친 정황이 확인되었다."며 자신은 "'대한민국의 위기시작은 1997년 5월 26일'이라는 글로 이 특집보도의 존재를 알리는 노력을 해 왔으나 모든 언론과 방송은 아직도 침묵하였다"고 말했다.

한 장군은 강조하길 성시백이라는 인물을 정밀 분석했다면서 "성시백은 상해 임시정부시절 장개석 총통의 '수도경비사령관'에 해당되는 호종남(胡宗南) 장군의 유능한 참모로 알려졌으나, 실제는 18세 때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던 골수당원으로 대 국민당 공작원으로 활동했던 중국공산혁명의 공로자였으며" 중국 사람들도 그가 조선 사람임을 몰랐었다.

그런데 김일성은 대남공작 적임자를 물색하던 중 그가 조선 사람임을 알고 주은래에게 "성시백을 우리에게 보내주어 조선 혁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고, "주은래가 그를 조선 공작조직에 인계했다."며 "김일성으로부터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밀명을 받고 일본비자로 입국하여 대북 무역상으로 위장, 북한의 무상몰수 토지개혁과 비밀화폐개혁에서 발생된 무한대의 공작자금을 선박으로 제공받으며 대남공작활동을 하던 성시백은 간첩으로 체포되어 6.25 남침 발발 이틀 후에 처형된 바 있으며, 그 공로로 김일성으로부터 '인민공화국 영웅 1호'칭호를 부여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시백이 '공화국 영웅 1호'의 공작활동을 찬양했던 특집보도가 우리 사회에서 공론화되지 않은 가운데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있었고 대통령 김대중은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를 조건도 없이 북송해 주었고 대통령 노무현은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자는 막말을 계속했던 끔찍한 사실까지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97년 5월 이후 증가했던 각급 각종 명칭의 위원회 활동을 돌이켜 볼 때 국방부 위촉의 4.3 위원으로 활동했던 자신은 이 특집보도에 대한 장기간의 침묵이야말로 그간 우리사회의 각종 비정상을 초래했던 원인과 배경이 되어왔다고 확신하며 제 2, 제 3의 성시백이 또 다른 위장활동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4.3 희생자추념일' 시행에 수반되는 대한민국 정체성의 훼손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지역의 국회의원들과 안전 행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당부하길 "제주 '4.3 희생자추념일' 선정 시행에 앞서 먼저, 진상조사보고서가 수정되고 제주 4.3 평화기념관의 반(反) 대한민국적 운영도 시정되고 문제의 노동신문 특집보도에 대한 지난 15년간의 침묵에 대해서도 관계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일대 전기가 마련될 것을 사퇴한 4.3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의 한사람으로 간곡히 주장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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