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반란사건, 억울한 사람 과연 몇이나 될까?
4.3 반란사건, 억울한 사람 과연 몇이나 될까?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4.01.21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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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빨갱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김대중 시절에 혐오의 단어라며 터부시 하게 만들었던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이다. 빨갱이들 눈에 비친 미국과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미군은 노근리 거창 등 수많은 지역에서 양민을 학살했고, 한국의 경찰과 군은 제주도에서 2-3만의 양민을 무고하게 학살했고, 한국군은 미국의 용병이 되어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에 끼어들어 무고한 양만을 기관총과 불도저로 대량 학살했다." 이것이 이 나라에서 호의호식하고 있는 빨갱이들의 철학(?)이고 신념이고, 선전내용이다.

노근리 양민학살?

1950년은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학살당하고 짓밟힌 역사에서 벗어난지 불과 5년이 되는 해였다. 해방직후, 9월 총파업, 대구폭동사건, 4.3사건, 여순-순천 반란사건을 위시하여 동족간에 집단 살인 행위들이 즐비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동족상잔의 전쟁이 북의 남침으로 발발했다. 전쟁준비가 미미했던 남한은 소련제 무기로 장비된 북한의 적수가 아니었고, 그래서 서울은 불과 3일 만인 6월 28일 오전 10시에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미국의 스미스 대대가 폭우를 뚫고 부산으로 날아오면서부터 미군이 한국에 속속 들어왔다. 18-19세의 어린 병사들이 바로 미군이었다. 3년 동안 180만이 한국전에 참전했다. 그 결과 미군은 56,000여명의 생명을 잃었고, 11만5천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미국은 한국을 도와주려고 왔는가 아니면 한국주민을 학살하려고 왔는가?

노근리에서였다. 양민을 가장한 게릴라들, 여성을 내세운 부녀자들이 수많은 미군들을 속여 미군을 학살하고 미군을 곤경에 빠트렸다. 수류탄을 던져서 검문하는 미군들을 집단으로 살해하고, 임신부처럼 꾸며 무전기를 배에 안고 후방으로 들어가 북괴군이 쏘는 포탄을 목표지점으로 유도했다. 이런 피해를 많이 당한 미군은 민간인들이 몰려 있는 것만 보면 노이로제 상태가 되었다. 민간 복장을 입은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겼다. 이들이 보기에 당시 노근리 주민들은 매우 수상하게 보였다. 이런 것을 놓고 빨갱이들은 미군이 선천적인 전쟁광이라서 한국 주민을 죽이기 위해 참전했다고 선전한다.

일본이 본 "한국전쟁"이 전집 10권으로 구성돼 있다. "日本陸戰史硏究普及會" 발행이다. 이 책에 기록된 노근리 사건을 일부 발췌한다.

"당시 많은 피난민이 영동으로 몰려들었다가 다시 황간- 대구로 남하하고 있었는데, 북괴군과 게릴라들이 그 속에 끼어서 사단 陣內로 들어왔다. 한 임산부의 모양이 수상하여 조사해 보니, 소형 무전기를 숨기고 있었다. 그녀는 미군의 포병 위치와 북괴군의 射彈을 조종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짐 속에는 경화기가 숨겨져 있었고, 쌀을 운반하는 바구니 속에는 박격포 탄약이 들어 있었다. 또한 미군 보초가 갑자기 피난민으로부터 사격을 받기도 했고, 지뢰탐지기에 의해 총기를 발각당한 무리들로부터 습격을 받는 등 그야말로 마음을 놓을 겨를이 없었다. 보급차량도 종종 습격을 당했고, 도로에는 지뢰가 매설돼 있었으며, 불시에 미군 포병이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p.252).

"영동의 7월 26일, 날이 밝아올 무렵, 먼저 수백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횡대로 늘어서서 전진해 왔다. 그 후방에는 전채 4대와 약간의 보병이 뒤따르고 있었다. 피난민들이 진지로 접근해 왔을 때, 지뢰가 폭발하자 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차와 보병이 용서 없이 도망가는 피난민을 사살했다. 피난민들이 어쩔 수 없이 다시 대오를 정리하고 전진을 계속하자 지뢰들이 또 폭발했다. 사실은 북괴군이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피난민들을 앞세워 희생시키는 만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여기서 기병사단은 피난민을 사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뢰지대를 통과시킬 수도 없는 그야말로 난처한 입장이었다."(p.254-255).

미군은 한국 국민을 사살하러 온 전쟁광인가?

"미국 최초로 참전한 미제24사단은 1주일 동안의 전투에서 사단병력 15,965명 중 4,525명을 잃었다. 이어서 오산-옥천 전투를 치르기까지 17일간의 전투에서 7,305명의 병력과 장비의 60%를 잃었다."(P.237).

"24사단장 딘 소장은 부상병이 요구하는 물을 뜨러 가다가 벼랑에 떨어져 어깨, 늑골, 머리에 부상을 입고 금산 지역을 헤매다가 자신을 도와주던 한국청년의 밀고로 36일째 되던 8월 25일 북괴에 포로가 됐다. 평소 체중은 86kg이었으나 체포됐을 때의 체중은 58kg이었다. 그는 3년간의 포로생활을 하다가 1953년 9월 4일 판문점으로 돌아왔다."(p.239)

당시 미군 장성 142명이 아들을 한국전에 보냈고, 그 중 35명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아들을 보냈고, 워커 장군이 아들과 함께 참전했다가 스스로는 전사했다. 클라크 사령관이 아들과 함께 참전했고, 밴프리트 장군이 아들과 함께 참전했다 아들을 잃었고, 해리스 해병사단장이 아들과 함께 참전했다가 아들을 잃었다. 이 때 한국에서는 아들을 전쟁터에 바친 장군들이 거의 없었다. 과연 미국 장군들은, 미국 대통령은 한국에 가서 한국 주민들 죽이라고 아들들을 보내고 자기도 와서 전사했을까?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민간인들은 얼마나 억울할까?

1952년 7월, 런던타임스의 한 기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썼다. 많은 한국인들은 이에 대해 본노했지만 이 기자의 진단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맞는 말이다. 지금의 한국은 자유방임이고 쓰레기통 그 자체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 기자가 또 정확하게 맞춘 것이 하나 더 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1966년 5월 29일 자, 런던타임스에 그는 "한국군이 월남전을 맡았거나, 미군이 한국군의 전술을 채택했더라면 벌써 승리로 끝냈을 것" 이라는 평가를 했다. 이것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채명신 사령관은 주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 게릴라전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 "모든 장병은 주민의 마음을 얻는 외교관이 돼야 한다" 그가 거의 매일 강조했던 명령이었다.

당시 월남에서는 따이한이 최고였다. 따이한 좋아하지 않는 민간인은 별로 보지 못했다. 사실이 이와 같은데도 1999년부터 김대중 일당은 노근리 사건, 매향리 사건, 미군부대 하수구의 독극물 발견사건을 부각시키면서 한국군이 미군의 용병으로 값싸게 팔려가 무고한 양민을 보는 대로 학살했다고 선동했다. 월남에 파견됐다는 이름 없는 여자특파원이라는 구수정, 한겨레21의 고경태 기자, 한홍구, 강정구가 앞장섰다. 이로 인해 파월장병들은 식구들로부터도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었었다.

제주도에서 4.3관련하여 죽은 사람들 중 누가 억울할까?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내놓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에서 4.3관련하여 죽은 사람이 14,000명 정도라고 기록했다. 제주도에서는 생명에 대한 테러, 파괴, 방화, 강간 등의 반란행위들이 9년 동안이나 지속됐다. 반란세력과 이를 진압하기 위한 토벌대와의 전투가 9년 동안이나 이어져 온 것이다.

충돌에는 당사자가 있다. 한쪽은 빨갱이, 다른 한쪽은 토벌대. 부락 주민들 사이에도 토벌대 편이 있고 빨갱이 편이 있었다. 토벌대의 편에 선 사람들은 동네 유지, 애국청년 등 국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고, 빨갱이들은 반란자 편에 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제주도는 고립된 지역이라 동네결혼, 근친결혼을 해서 마을 전체가 8촌 이내로 구성된 씨족사회였다. 한 사람이 빨갱이 되면 마을 전체가 빨갱이 부락이 되었다.

1921년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수재 김명식이 제주도에 '반역자구락부'를 조직하면서 출발한 제주도 공산화(소련의 국제공산화 작전의 일환), 이로 인해 확산된 빨갱이 세력은 1945년 독립 당시, 제주도 주민의 80-85%나 되었다. 한라산에는 무장유격대가 준동했고, 산의 중간 지대에는 이들 민간 빨갱이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 마을은 사실상 무장유격대의 동조부대요, 보급창고요 짐을 나르는 수송부대요 첩보부대 역할을 수행했다.

필자는 1967년-71년 사이 월남전에서 4년 동안 전투를 했다. 마을 부근의 도로를 지나다 보면 늘 민간 마을들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부하가 쓰러진다. 지휘관들은 부하가 죽으면 눈이 뒤집힌다. 월남 도지사나 군수의 허가를 받아 그 마을을 통 채로 불바다로 만든 적이 많다. 그보다 20년 전인 제주도 빨갱이들이 어떻게 죽고, 빨갱이 부락들이 어떻게 불탔는지 필자의 눈에는 훤히 짐작이 간다.

당시 빨갱이들은 경찰과 그 가족, 마을 유지와 그 가족들을 찝어서 공격했다. 임산부를 윤간하고, 찌르고, 사지를 자르고, 생매장 하고, 톱으로 목을 베어 잔인하게 죽였다. 빨갱이들이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김정은이 장성택을 죽인 방법과 똑같다.

이들 빨갱이들에 의해 죽은 군인과 그 가족, 경찰과 그 가족, 마을 유지와 그 가족들은 참으로 참혹하게 죽었고 그래서 가장 억울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빨갱이들은 그들의 죽음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경찰은 미제의 검은 개이고, 군인은 미제의 노란 개 노릇을 하며 혁명을 방해한 반동분자라는 것이다. 경찰은 검은 옷, 군인은 노란색 카키 옷을 입었기 때문이 빨갱이들이 붙인 이름이다.

제주도의 우익인사들까지도 14,000명중 12,000명 정도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산간마을에 살면서 빨갱이들의 보급창, 수송대, 첩보부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고, 의심가는 행동을 해서 죽은 것이다.

군인과 경찰은 의심이 가는 주민들을 빨갱이들처럼 잔인하게 죽이지는 않았다. 적성마을로부터 피해를 당하면 그 마을은 집단적으로 피해를 볼 수 있다. 노근리에서처럼 의심받을 만한 짓을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총을 쏘았다. 의심받는 자들 옆에 있는 사람들도 일부 죽었을 것이다.

마을에서 빨갱이들이 피해를 입으면 빨갱이들이 마을을 태웠고, 마을에서 토벌대가 피해를 입었으면 토벌대가 불을 질렀다. 이것이 한국에서나 월남전에서나 다 같이 볼 수 있었던 빨갱이들과의 전쟁이었다. 제주도 주민의 80-85%가 빨갱이었다면 당시의 충돌 양상으로 보아 28만 제주도 인구 중에 1만여 명만 죽은 것은 매우 적게 죽은 것으로 평가된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게릴라와 분리시키기 위해 선무활동을 많이 했다. 나중에는 산간부락 주민들을 해안가 집단촌으로 옮겨 게릴라들과 멀리 떼어놓았다. 빨갱이로부터 전향한 사람들을 교육시켜 산으로 보내, 하산하기를 거부하는 수많은 주민들을 설득하게 했다. 주민들에게 군이 무장한 새로운 병기의 우수성을 보여주면서 게릴라에게는 희망이 없으니 토벌군 편이 되라고 설득했다.

2년동안의 게릴라 토벌작전과 대-주민 선무활동의 결과 제주도 주민의 대부분이 전향했다. 그래서 제주도 주민들은 한라산에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공덕비까지 세워주었다. 초기에는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죽였고, 피해를 본 마을을 공격하였지만, 나중에는 주민과 게릴라를 공간적으로, 사상적으로 분리하는 작전에 치중했다. 그 결과 9년에 걸친 충돌 과정에서 불과 1만 여명만이 죽은 것이다.

주민 희생자들 가운데 가장 억울한 사람들은 빨갱이들에 의해 참혹하게 죽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금 제주도에서 4.3을 추모해달라고 앞장 선 사람들은 대부분 한마디로 빨갱이었거나 그 동조자들이다.

추모사업에 앞장선 사람들은 '빨갱이들에 의해 죽은 사람'들을 반동분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충돌 9년 동안 '반역을 하다가 토벌당한 사람들', '수상한 거동을 하다가 토벌대에 의해 죽은 사람들'을 모두 '의로운 민중항쟁을 하다가 이승만 역도와 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 정부는 이러한 빨갱이 및 그 동조자들이 하자는 그대로 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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