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쯤, 노건호의 생각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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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노건호의 생각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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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할 생각없다는 말이 진심이기를

▲ ⓒ뉴스타운

메르스 광풍이 한창 불었던 지난 주말, 충무로 대한극장 인근 모 회사의 연수원에서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에 참석하고 오던 중 골목길 어귀 낮은 돌담에 걸터 앉아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조작하는 낯익은 사람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당사자는 강경노사모로 알려진 배우 명계남이었다.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으로 미루어 트위터를 하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불헌 듯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 노건호가 연상되었다. 이제 제법 시간도 지났으니 노건호가 자신의 발언에 대해 어떤 소회를 느끼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노건호가 부친의 기일에 했던 발언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사실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살아가는 세상이 천편일률적일 수는 없다. 같은 사물을 두고도 보는 눈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이미 이루어졌던 사실은 언제나 사실로 남는다. 세월이 6년이나 지났다고 해서 가족이 연루된 부정한 금전스캔들 수사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야 했던 사실이 갑자기 권력에 의한 타살로 둔갑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2009년 어떤 목사는 평소에 청렴한 도덕성을 주장하던 사람의 위선(僞善)이 드러나자 돌파구로 자살을 택한, 무책임하고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지적하는 평도 있다면서 노무현의 자살동기를 캐나다 맥길 대학의 두뇌 신경외과 교수인 '펜필드'의 이론과 관계분석이론의 각도에서 조명한 글이 있었을 정도로 크나큰 파문을 남긴 장본인이 바로 노건호의 부친이었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전직 대통령 가족이 연루된 금전 스캔들 사건이었으므로 적당하게 수사하고 넘어갔다면 부친이 자살만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했겠지만 범죄가 있는 곳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실정법은 전직 대통령 가족이라고 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노건호는 부친의 죽음이 가족이 얽힌 금전스캔들로 인한 수치심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권력의 강압으로 의해 죽음이라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자의적인 해석으로 자신의 마인드를 자가발전 해 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평소에도 극단적인 분노와 증오, 그리고 적개심을 늘 간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다. 설혹 자신의 생각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부친의 기일(忌日)이었던 그날 당일만큼은 분노와 증오를 속으로 삼켜야 하는 것이 바로 자식이자 상주의 도리였는데도 노건호는 분노와 증오를 감추지 않았다. 이제 갓 불혹을 넘긴 나이라면 해야 될 말과 결코 해서는 안 될 말 정도는 가려낼 줄 아는 나이가 되었을 터인데도 노건호가 읽었던 추도사는 여타 추도식에서 들려주는 그런 추도사와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그날 노건호가 상주의 입장에서 읽어 내려간 추도사는 마치 정치권 진출을 위한 비장한 출사표로 들릴 정도였으니 며칠이 지나도 잡음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정치연설의 성격이 매우 강했던 노건호의 추도사는 그날 그 자리에 참석한 강경 노사모에게는 카타르시스의 침샘을 자극하는 청량제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일반 국민에게는 마치 친노세력에게 진군나팔을 불어대는 선동으로 들렸을 정도였으니 친노세력이 가장 원했던 바가 바로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날 노건호의 추도사에는 다양한 정치적인 용어가 등장했다. 그것이 과연 추도사에 적합한 내용이었는지 노건호 자신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 노건호가 동원했던 정치적 용어는 친노강경파들이 마치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시위를 할 때 들고 나오는 단골메뉴가 총동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어쩌면 친노 핵심의 누군가가 원고 집필 방향을 코치해 준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 들 정도였으니 봉하마을의 그날은 추도식장이 아니고 마치 친노 결속대회를 방불케 했던 것과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날 추도식에는 백만민란의 문성근도 나타났고 노사모 행동대장으로 불리는 명계남 등 골수 노사모가 총출동하여 친노 부활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임에 따라 노건호의 추도사는 골수 노사모를 선동하고 충동하기에 잘 기획된 추도사와 같아 보인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그날 노건호의 발언으로 인해 여러 정치인이 봉변을 당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그렇다고 치자, 노무현 정권시절 한때 끈끈한 동지적 관계에 있었던 야권 인사 몇몇도 예외 없이 봉변을 당했다. 친노패권주의, 배타주의, 특정 이념에 얽매인 그들만의 근본주의가 그대로 드러났다는 소리도 있었다. 과거 열린우리당은 멀쩡한 새천년민주당을 깨부수고 만든 정당이었다. 열린우리당 창당배경에는 노무현을 지지하는 운동권 세력의 등장과 이로 인해 파생된 새천년민주당내 핵심 지도부들 간의 이념적 갈등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그 당시 정치권의 해석이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과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구하고자 했던 개혁정책의 실패, 당내 리더십 부재와 분열양상, 이로 인한 지지층의 급격한 이탈은 열린우리당 소멸의 궁극적인 변수로 작용했고 뒤이은 각종 선거에서는 연전연패를 당했다. 이때 나온 말이 폐족이라는 용어였다. 당시 여의도에서는 "행동대장은 많으나 정책참모가 없기 때문에 실패했다." 라는 말도 이때부터 회자되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 폐족을 자처했던 친노세력은 어느새 새민련의 대주주가 되어 패권은 더욱더 공고해졌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새민련 내의 친노세력과 강경파 노사모는 차기 총선에서 노건호가 앞장서서 노무현 브랜드에 덧칠을 해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노건호의 추도사에서도 드러났듯, 만약 노건호가 증오와 적개심을 버리지 않고 정치에 입문한다면 친노패권주의의 표상이 되어 극단적 이기주의와 배타성만 더욱더 심화시킬 가능성만 높아져 정치권의 대립은 매번 극한으로 치닫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노건호의 추도사가 있는 뒤, 자신의 그날 발언이 정치 입문을 노리는 것이 아니냐는 여러 언론의 지적에 대해 노건호는 정치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더구나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에 대한 반성과 성찰도 없이 정치를 하게 되면 증오와 갈등만 유발할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건호는 정치할 꿈조차 꾸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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