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문제 덩어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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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문제 덩어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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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영의 '박현채와 나'

 
   
  ^^^▲ 박현채 조선대 교수^^^  
 

3. 임헌영의 '박현채와 나'

소년 빨치산 박현채는 1995년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조선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61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마르크스의 경제론에 남북한 민족론을 접목한 사회주의 경제론이다. 박현채는 이 책에서 민족의 자급자족을 경제 원리로 제시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책은 시대에 뒤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실용도와 효율성, 경제성도 전혀 없는 이상론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박현채의 일대기와 함께 전집으로 출간되었다. 문헌으로 참고할 만한 가치도 없는 책에 불과한 책이다. 예컨대, 박현채는 이 책에서 남한이 이루어 놓은 경제체계를 북한과 나누어 사용함으로 우리민족끼리의 자급자족의 경제를 이뤄야 한다고 말한다. 남한은 북한의 김일성 체제를 인정해 주고 지원을 통해 점진적으로 통일에 도달해야 하고 미군은 즉각 철수함과 동시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썼다. 참으로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이론이다.

모름지기 경제란 배분이 아니라 창출에 그 원리가 있는 것이며, 경제논리란 경제창출의 방법론을 제시함이 기본이다. 겨우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나누자고 하는 논리는 도적의 논리이며 빼앗아서라도 나누자고 하는 논리는 강도의 논리에 불과하다. 어찌 이런 논리가 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출판될 수 있단 말인가. 사무엘슨의 “이코노믹스”와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비교해 보라. 박현채의 경제논리는 도적의 논리이며 강도의 논리에 불과할 뿐이다.

도대체 대한민국의 논리가 얼마나 열악하고 형편이 없으면 “민족경제론”과 같이 무가치한 책이 가치 있는 책으로 둔갑을 하고, “태백산맥”과 같이 대한민국 국민의 영혼을 좀 먹는 따위의 문학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김일성 찬양가에 불과한 책, 살인귀 김일성에 대한 변호논리로 가득 차 있는 불온한 서적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에 대해 전혀 납득을 할 수 없다. 이런 류의 서적들은 친북자의 입맛대로 친북논리를 전개한 일고의 가치도 없는 논리로 가득 차 있다. 겨우 이 정도 따위에 휘둘릴 만큼 대한민국의 논리는 형편없는 것인가?

현재 대한민국 안에서 친북활동을 하고 있는 김정일 찬양자들은 박현채를 상징적으로 내세워 “박현채 추모 발간사업”을 통해 결집하며 세를 불리고 있다. 이들은 박현채의 경제론과 박현채 추모집을 수단으로 박현채의 친북사상을 파급시키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김정일의 대남공작을 측면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1) 북한주민인권 카페에 올려져 있는 '박현채 백학으로 부활'

다음 카페에는 북한주민인권이라는 카페가 있다. 여기에 올려진 글에서 박현채를 추모하는 세력들이 모였다는 소식을 볼 수 있었다. 여기에서 이들은 박현채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지병으로 숨진 소년 빨치산 출신 박현채를 영웅으로 묘사했다. 백낙청과 송기숙이 박현채 강의를 맡아 민족경제론을 강의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 눈에 뜨인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백낙청, 송기숙을 일컬어 양심적 지식인과 권위자라고 썼다. 가장 주목할 내용은 김중배 MBC사장이 "죽음도 제 멋대로 앞서가는 사람"이라며 타박하고, "역사의 전사들은 흰 학으로 되살아 난다"며 그의 타계 7주기를 맞아 '그대 흰 학이 되어'라는 추모의 글을 띄웠다는 점이다. “역사의 전사”라는 말은 박현채가 소년 빨치산으로서 김일성을 위해 국군을 향해 총질을 해댔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소년 빨치산에서 진보적인 경제학자로, 한평생 우리나라 현대사를 짊어졌던 故 박현채교수(조선대)가 '백학(白鶴)'으로 부활하고 있다. 16일 오후 광주시내 한 음식점에는 그를 추모하는 조촐한 모임이 이뤄졌다. 강신석 목사, 이방기 교수(전남대), 김하림, 이종범 교수(조선대), 조담 교수(전남대) 등 생전에 그와 교류했던 벗들이 오랜만에 자리를 함께했다. 지난 1995년 8월 18일 61세의 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 지 실로 7년만이다.

박교수는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백아산 빨치산 소년병'으로 유명하다. 화순에서 난 그는 10대 후반에 입산해 화순 백아산을 주무대로 '산생활'을 했다. 어린 나이지만 당시 문화부 중대장까지 지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나오는 소년전사 '조원제'가 그의 분신이다. 이 소설에서도 그려졌듯이 그는 실제 18살의 나이에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생사를 넘나들었다. 옆구리에 총탄을 맞고도 멀쩡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총알이 반으로 접어 옷속에 갈무리한 100원짜리 지폐 30장에 맞았던 것. 이 지폐는 입산할 때 그의 어머니가 꼬깃꼬깃 접어 넣어준 돈이었다.

1952년에 하산한 그는 전주고와 서울대 경제학과와 동대학원을 거치며 경제학자가 됐다. 1978년에는 그 유명한 '민족 경제론'을 출간, 국내 경제사연구에 한 획을 그었다. 이후 국내 학계의 진보적인 흐름을 주도하던 그는 1985년 '창작과 비평'지에 '현대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를 기고함으로써 80년대 후반을 들썩이게 한 이른바 '사구체(한국사회구성체)논쟁'을 촉발시키는 불쏘시개 구실을 했다. 그러나 평소 "열여덟에 죽을 고비를 넘겨 여든까지는 살 것이다"며 벗들과 농을 즐기던 그는 예순을 갓 넘기자 세상을 떴다.

그의 친구인 김중배 MBC사장은 그런 그를 가리켜 "죽음도 제 멋대로 앞서가는 사람"이라며 타박(?)하고, "역사의 전사들은 흰 학으로 되살아 난다"며 그의 타계 7주기를 맞아 '그대 흰 학이 되어'라는 추모의 글을 띄웠다. 김하림 조선대교수도 '소년전사에서 경제학자까지'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며 역사의 길에서 떠나지 않은 그의 삶을 기렸다.

추모모임은 10월부터 '박현채 강좌'를 만들어 그의 철학과 경제관이 집대성된 '민족 경제론'을 널리 알리고, 현재적 적용을 모색할 방침이다. 이 강좌에는 백낙청 서울대교수, 소설가 송기숙 등 각계 양심적 지식인과 권위자들을 강사로 초청된다.

2) 임헌영의 '박현채와 나'

제삼노총에 기재되어 있는 임헌영의 “박현채와 나”라는 글을 보면 임헌영이 주관하고 있는 ‘박현채 띄우기’가 상당히 진행되어졌음이 드러난다. 임헌영은 남민전 사건을 마치 영웅적인 사건으로 포장하는 한편 반공법을 정죄하면서 자신이 마치 민주화 운동의 투사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남민전 사건의 전모를 모르는 세대에서는 임헌영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것으로 오인할 수 있을 정도로 치밀하게 조작해 놓은 임헌영의 “박현채와 나”는 제삼노총의 홈페이지에 수록되어 있다. 전문을 그대로 인용하도록 한다.

▶ 박현채, 권오헌, 임헌영이 만났다

1960년대 후반기는 5.16쿠데타 세력이 위기를 맞아 그 탈출구로 갖은 인권탄압을 잔인한 방법으로 감행할 때였다. 어설프게 글줄이나 쓰고 평론가 행세나 하면서 잘난 척 하며 지낼 무렵, 야무진 한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불도저 운전 일로 살아가는 노동자라고 소개한 뒤 그는 떳떳하고 또렷하게 학력은 초등학교, 통일사회당 간부라고 자신을 아예 송두리째 드러냈다. 험악한 세월에 드문 일이었는데도 첫 인상과 말투에서 신뢰감이 갔고, 둘은 이내 막역한 친구에다 동지가 되었다. 지금 통일운동에 앞장 서 활동하고 있는 권오헌 형이었다.

김철 선생(김한길 의원의 선친)의 통일사회당은 5.16 이후 군부세력에 의하여 혁신계 전체가 짓밟혀버린 뒤인 1965년에 창당했으나, 역시 2년 만에 해체 운명을 겪어야만 했던 처지였다. 그러나 몇몇 동지들이 굽히지 않고 결속, 당명을 그대로 유지하며 소집회와 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보다 연장자인 권형은 나와 양심과 언론의 자유를 누리며 관계가 점점 깊어져 나중에는 1976년 남민전까지에 이르렀다.

권형은 통일사회당 모임에 새파란 나를 연사로 수시 동원하는 바람에, 김철 선생을 비롯한 여러 선배님들을 알게 되었는데, 박현채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도 바로 통사당 강연회장이었다.

어쩐지 셋은 첫 눈에 너무나 궁합이 맞아떨어져 자주 만났다. 그러던 중 내 주변의 문인들까지 겹쳐서 점점 일행의 숫자가 늘어났으나 언제나 최후까지 남는 건 박현채, 권오헌, 나 셋으로 가히 형제라 해도 이렇게 푸근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후 나는 어떤 자리에 있든 박 선생을 형님처럼 대했고, 내가 있는 주변 어딘가에는 꼭 박 선생의 영향력이 미치게 했다. 1970년 나는 주간 <경향>에서 월간 <다리>지로 직장을 바꿨는데, 내가 착수한 첫 작업이 편집위원을 개편한 일이었다.

경제분야는 당연히 박 선생을 모셔서 이 계통의 필진을 강화했다. 그는 필진 동원에서 무한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천거해서 편집 실무진을 놀라게 했다. 서울 소재는 물론이고 지방대학과 각 언론기관, 심지어는 경제관련 기관의 인사까지 총망라하여 해당 주제에 걸맞는 필자를 거명했는데, 내용이나 주제의 취급 방향에서 전혀 실패가 없었다.

박 선생님은 중부경찰서 맞은편의 골목길을 움푹 들어간 곳의 작은 사무실에다 ‘국민경제연구소’란 간판을 달아놓은 비좁은 사무실에서 언제나 글을 썼다. 졸필인 내 글씨보다야 낫지만 도대체 읽기가 어려울 정도의 굴곡체인데다 내용 또한 난삽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왜 민족경제 하시면서 모든 민족이 쉽게 알 수 있도록 경제이론을 펼치지 못하시느냐고 공격하면, 글이란 쉽게 쓸 수 없는 영역이 반드시 있다면서 도리어 쉬운 글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이 무렵 우리가 가장 자주 술집엘 들락거렸는데(아마 1주일에 2~3차 이상), 단골은 무교동 심원집이었다. 아예 우리들이 가면 방을 하나 내어줄 정도로 단골이었던 그 집은 술값도 쌌고 인심이 후한데다, 룸살롱이 아닌데도 방으로 되어 있어 언론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한 이틀만 못 뵈어도 허전할 정도였으니 술값과 시간이 얼마나 동이 났던가를 가히 짐작할만한데, 얼마 전 권형에게 들으니 한참 우리들이 각자 고생을 하고나서야 언젠가 외상을 갚으러 갔더니 심원집이 사라져 버렸다고 해서 무척 서운했다.

1974년, 나는 문학인 시국사건으로 구속되면서 대학 강단에서 추방당한 신세가 되었다. 출옥 후 밥벌이로 자리한 곳은 퇴계로 수도경비사령부 입구 옆 골목에 있었던 태극출판사였다. 그러니 바로 퇴계로만 건너면 박 선생 사무실이니 얼마나 자주 만났던가. 권형은 더욱 자주 이곳으로 왔다.

이때 박 선생과 나는 그 부근에 사무실을 가졌던 최근덕(현 성균관장)선생의 소개로 알게 된 선병한 선생에게 ‘맹자’를 함께 공부하기로 합의, 일주일에 2회 점심시간에 한두 시간씩 배우기로 해서 얼마 동안인지는 모르나 ‘맹자’를 다 뗐다.

임창순 선생이 단단히 신세졌던 보은 선 부잣집 도령이었던 선 선생은 근대 식민지 교육을 거절한 가풍에서 한학을 익히신 분이셨다. ‘맹자’를 기독교 신자가 ‘성경’을 읽듯이 매일 읽어서 암송하실 정도라 아예 교재도 없이 응접용 탁자를 가운데 두고 우리와 마주 앉아 몸을 좌우로 흔들며 운치 있게 읊었다. 굳이 옛날 서당에서 배우던 교재여야 된다기에 인사동 고서점을 뒤져서 산 책인데도 가끔씩 오자가 있었는데, 마주앉은 선 선생은 거꾸로 힐끗 건너다 보면서도 “이상하다, 책이 틀린 것 같은데...” 하시며 그제서야 자신의 원본을 펼쳐 대조해 보면 영락없이 오자여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몇 번을 읽어야 하느냐, ‘맹자’ 다음에는 뭘 할 것인가고 묻자 백 번 정도를 읽고 그 뒤에도 매일 10분씩이라도 보라는 엄명이었다. 선생의 한문 교수법은 여러 종류를 섭렵할 것 없이 ‘논어’든 ‘맹자’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걸 1백 번, 2백 번 읽으면 문리가 터진다는 거였다. 특히 선생은 ‘맹자’주창자였다. ‘맹자’에는 혁명의식과 경제의식이 강하다는 게 선 선생의 주장으로, 그런 연유로 광복 후 유학자들 중 ‘맹자’파는 월북자가 많았다는 풀이였다.

▶ 감옥에서 '임헌영 나와라!'

1970년대 중반, 너무나 답답했던 나는 박 선생과 상의 없이 1976년 말 경부터 남민전 활동을 하게 됐는데, 이재문 선생은 나를 통해 박 선생의 근황과 안부를 항상 챙기는 한편 은근히 여러 정황 타진도 의뢰했다.

박현채-이재문 둘 다 인혁당 관련자들이라 나보다 더 잘 아는 처지였다. 나는 고향 의성 출신 이야길 하는 척 하면서 박 선생에게 이재문 선생의 안부를 묻는 척 화두를 잡기도 하는 등 여러 차례 거론했다.

그때 내 탐색전에 의하면, 박 선생은 인혁당의 수난 이후 어떤 작은 탄압의 빌미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철저성이었다. 그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가짐과 동시에 냉철한 한계성도 지적할 만큼 박선생은 현실인식에 투철했다. 지나고 보니 아마 선생은 내가 뒤로 어떤 일을 하는 걸 낌새로 알았던 듯 하다.

1978년, 문단에는 기묘한 사건 하나가 터졌다. 작가 김동리가 9월12일 ‘한국문학의 나아갈 길’이란 강연에서 당시의 세칭 참여문학 비평가들을 ‘빨갱이’로 몰아 부친 것이다. 구체적으로 창비 세력을 지칭한 이 공격 앞에서 내가 흥사단 강좌에서 슬쩍 반론을 폈고, 구중서 형이 정식으로 논리적인 반박을 시도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김동리는 “임씨의 소론에서 내가 의견을 나눠 보고자 하는 것은...”이라고 구체적으로 나를 적시했다. 이 대목을 박 선생이 지적하면서 “너, 절대 논쟁에 끼어들지 마”라고 충고했고, 나는 그걸 지켰다. 설사 그런 충고가 없었대도 나 자신이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던 터였다. 참으로 살벌했다.

이런 와중에서 남민전 문제와 박 선생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까 무척 망설이며 권오헌 형과 논의했으나 좋은 방안이 없어서 그냥저냥 망설이던 중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1979년의 통혁당 재건위 사건은 박 선생에게 분명 본질이 아닌 파편이었다. 본인의 실수나 과오가 전혀 없는 고약한 시대의 불운이었다. 그 재판에 열심히 다니며 잘 되기를 바라던 터였는데, 권오헌 형과 나도 그 해 10월 초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 서대문 구치소에서 먼 발치로 박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운동만 나오면 내 방을 향하여 “임헌영 나와라”고 그 우람찬 목소리로 불러댔는데, 당당한 자신과는 달리 초췌해진 내 몰골이 너무나 안됐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눈길이 지금도 생생하다. 선생은 곧 출옥했으나, 1980년 5월에 다시 구속됐다가 풀려났지만 그때부터 나는 긴 옥중생활이 시작되었다. 1983년 광복절 특사로 출감한 내가 가장 먼저 찾아간 상대는 역시 박 선생이었다. 몇 년 만의 만남이었지만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세상 사람들처럼 그 흔한 “고생했다”는 인사 따위는 하지 않아 내심 좀 서운했지만 그 속내를 모르는 나도 아니었다.

1980년대란 감옥 안이나 밖이나 똑같았고, 산 생활 시절보다는 감방이 더 좋다는 뜻도 작용했을 터이다. 우리는 통상 맛있는 걸 먹을 때나 기분 좋은 일을 당하면 투옥중인 아무개가 생각난다고 하면 선생은 입버릇처럼 “뜨뜻한 물에 목욕할 때면 그들 생각이 난다”고 할 뿐 다른 때는 여기나 거기나 뭐가 다른가 하고 되려 반문하곤 했다.

우리 셋은 다시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86년 나는 박원순 변호사와 원경스님, 이호웅 의원을 비롯한 몇이서 ‘역사문제연구소’를 하자는 권유를 받고 별 일도 없던 터에 늘상 움직여야 살맛이 나는 체질이라 응낙할 각오를 하고 박 선생에게 상의했다. 나는 은근히 격려하며 하라는 응답을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다 만들어 놓고 자네는 빠지소”했다. 하기야 내 전공이 문학이지 역사는 아니다. 그러나 선생의 속뜻은 내 전공 따위가 아니라 끔찍이도 후배를 아끼고자 하는 충정이 서려있음을 왜 모르랴.

▶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문제연구소는 예정대로 창립, 내가 늘상 하는 식으로 저명인사들을 대폭 초치, 자문위원으로 모셨는데 박현채 선생도 물론 포함되었다. 아마 1980년대 후반기의 학술문화운동의 중심지는 한길사였대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역사기행을 시작한 것도 한길사였고, 비판적인 지식인을 한 자리에 모이게 작동해서 심포지움을 개최한 것도 한길사였는데, 그 단골이 리영희, 박현채, 김진균 선생이었다. 그 중 역사기행의 단골이 박 선생과 나였는데, 특히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나온 뒤엔 더욱 빈번한 나들이가 이뤄졌다.

1988년 한길사는 월간 <사회와 사상>을 창간했는데 그 편집위원에는 강만길, 고은, 김진균, 박현채, 이영희(이 때는 이렇게 표기했음), 임헌영이었다. 회의 때마다 박 선생은 나에게 문학예술만이 아닌 사회전반에 걸친 언급과 기획을 강요했는데, 아마 그건 신뢰의 표현이었을 터이나 나는 끝내 선생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도 선생에게 한 가지 공로는 세웠다. 많은 경제평론을 숱하게 문학평론에다 인용하던 중 직접 문학과 경제에 관한 글을 쓰도록 했던 바, 그 인연으로 당시 문학평론 선집에 실리기도 했으니 경제평론가를 문학평론으로 외도시킨 셈이다.

1980년대 중반이 고투 속의 황홀한 역사적인 체험기였다면, 하반기부터 1990년대는 외형적인 민주화 성취라는 변모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적인 급변속에서 각자의 세계관과 철학을 재조절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울한 연대였다.

역사적인 필연성을 위하여 고통을 달게 받았던 대가를 세계사는 너무 배반적으로 보여줬던 이 시기에 선생은 상상할 수 없었던 대학 교수가 되었다. 내색은 않았으나 무척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때까지 대학 강단에 서기는 커녕 복권도 안 됐던 나는 심통이 전혀 없진 않았으나 우린 모두가 축복을 빌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병세로 입원, 긴 고통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경희의료원에서의 만남은 너무나 울분에 찼었다. 언어조차 제대로 안 되는 상태에서 선생은 권형과 내 손을 잡고 울었다. 그 울음의 의미를 우리는 안다. 그는 결단코 그때 가서도 안 되고 우리 역시 그를 보내서도 안 되었다. 우리에게 해줄 말도 덜한 상태였고, 그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있었을 터이다.

일부 학자들은 박현채의 민족경제론과 사회구성체론의 시대는 이제 지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이론 속에 담겨진 역사의 현장성과 열정은 영원히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박현채와 나 ⑦…임헌영)

3) 사상불량자와 불온서적에 대한 판단 기준은 엄정해야

김중배 MBC 전 사장이 박현채를 가리켜 “역사의 전사는 백학으로 되 살아 난다”고 말한 내용은 대단히 위험한 말이다. 박현채는 소년 빨치산으로서 대한민국의 국군과 국민을 향하여 총질을 해댄 자이다. 김중배는 박현채가 대한민국을 향해 총질한 행위를 전사로 표현하며 영웅화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국군을 죽이거나 총질을 해댄 자는 다 영웅이며 역사의 전사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실상 동학군이 그러했고 5.18 시민군이 그러했다. 국군을 향해 총질을 해댔던 5.18 시민군은 김대중과 노무현에 의해 민주화 의사로 추앙을 받고 있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현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김중배의 위험천만한 말이 스스럼 없이 내뱉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김중배의 발언은 위험수위를 한참 넘긴 말이다.

정부와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자가 민주화 인사가 되고 있는 현실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훼파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실상 공산주의의 혁명사상은 현 정부를 전복시키고 괴뢰정부를 세워 공산주의 반대자들을 숙청하고 나서 완벽한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 남한에서 활동 중인 공산주의자들은 친북자들로서 김일성의 하수인들이다. 이들은 남한을 전복시켜 김정일에게 바침으로 혁명영웅이 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이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끌고 갈 수는 없다. 이러한 자들은 모든 공직과 활동 중인 시민 단체 등의 활동에서 축출해내야 한다.

불온서적의 작가는 공식적인 작가활동의 영역에서 축출해야 한다. 이들은 헌법에서 보장된 개인적 사상의 자유를 혼자서 누려야 할 자들이며 자유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이들이 풀어 놓은 사상의 독에 의해 대한민국은 치유할 수 없을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정부는 국가의 보존을 위해 국론을 사분오열시키며 이미 죽은 박현채의 빨치산 사상을 추앙하며 부활시켜 국가의 전복까지 목적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단죄를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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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사람 2009-11-16 19:37:54
안형식 위원의 "대한민국의 논리가 얼마나 열악하고 형편이 없으면"이 현 한국사회를 너무나 잘 표현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한국사회에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친북정권세력은 그럴듯한 논리라도 만들고 놀지만 대한민국의 주류라는 세력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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