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계엄군 희생자의 이야기(증언)
스크롤 이동 상태바
광주사태 계엄군 희생자의 이야기(증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병사들이 자국(自國) 시민군의 총탄에 의해 무참히 죽어..."

^^^▲ 광주사태 당시 현장^^^
광주사태의 현장 증인인 이법철 스님은 1980년 5월 22일 스님이 목격한 계엄군 희생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서술한다.

"소준열장군의 사령관실에서 나오니 하늘에서는 헬기가 무수히 오르내리고, 5월의 잔디밭에는 국방의 의무를 하러 간 병사들이 적국(敵國)의 총탄이 아닌 자국(自國) 시민군의 총탄에 의해 무참히 죽어 관속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비 오는 잔디밭에 판초우의 아래 즐비하게 누워 " 있었다.

"독자여 상상해 보시라! 빗속의 잔디밭에 피 흘려 죽어있는 젊은 국군들을……. 그들은 국방의 의무에 채 피워보지 못한 꽃으로 광풍(狂風)에 꽃이 지듯이 죽어 있었다.

그는 북한군과 김대중 세력이 대자보로 폭동을 선동하던 방식을 이렇게 증언한다

"광주거리의 도처에는 벽보의 대자보(大字報)가 시민군을 독려하고 있었다. 대자보는 하얀 대형종이에 검은 매직 글씨로 광주시민에게 결사투쟁을 하자는 선동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대자보에 강조되는 부분에는 붉은 매직 글씨로 “미 7함대의 항공모함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부산항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서울과 부산, 대구, 등의 전국의 도시의 시민이 무장 봉기하여 광주를 지원하고자 곧 도착할 것이니 조금만 참고 결사투쟁하자는 선동이었다. 도대체 누가, 미국의 항공모함의 병력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출동했다고 하며, 전국의 도시에서 무장시민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출동했다는 선동을 시작했을까?

이제 와서 생각하면 허망한 새빨간 거짓말로 시민군의 결사항전을 독려하는 것이었다. 시민군을 주검으로 내모는 세력은 어떤 세력이었을까? 진실한 민주화 세력이었을까? 광주사태에 북한에서 밀파된 북한군의 공작이었을까? 아니면 정권을 잡으려고 환장한 그 지역의 정치인들의 배후 선전선동이었을까? 순진한 민초들의 시민군은 피 흘려 죽어가며 구원의 미군을 기다렸고, 각지의 무장봉기군들이 지원해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의 뜻에따라 전국적 무장봉기가 현실화 되었다면, 대한민국은 내전과 함께 김정일이 무혈입성하는 호기(好機)가 되었을 것이다. 시민군은 무장을 하여 버스와 트럭에 탑승하여 교도소를 해방하고, 전남의 시군읍(市郡邑)으로 진출하여 무장봉기를 시도하려 했다. 바람에 번져가는 들불을 막듯이 국군은 확산되어가려는 무장봉기를 원천봉쇄하고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요원이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착한 간호사로 등장하는 신애의 실제 인물 전옥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광주사태를 목도하면서 여자의 선전선동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절감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데모와 폭동의 발화점으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것이 여자이다. 일제시대의 광주학생 사건도 한국여학생이 못된 일본 학생들에게 당했다는 소식이 한국학생들을 분기(奮起)하게 만들었다. 일본 동경의 데모대가 폭도로 돌변하여 일본국회로 난입한 사건이 있었다.

폭도들은 데모대 속의 여대생을 죽이고서는 책임을 경찰에게 전가했다. 그것을 선전선동으로 데모대는 폭도로 돌변하여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광주사태에도 여자는 시민군의 분기에 이용되었다. 총을 멘 시민군의 호위 속에 지프를 타고 선전선동의 방송을 하던 여자가 광주시내를 돌고 돌면서, “공수부대원이 대검으로 임산부의 배를 난자하고, 유방을 도려내었다”는 선전선동을 했다.

이러한 선전선동은 광주시민을 분개하게 하였다. 화려한 휴가의 영화 속에서는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시민군의 호위 속에 지프에 탑승하여 마이크를 잡고 광주시민의 동참을 호소하며 다닌다. 그것은 허위요, 날조이다. 진짜 선전선동의 방송을 하던 무서운 여자는 간호사가 아니었다.

무장세력이 점령하고 있었던 전남도청을 다시 광주시민에게 되돌려주기 위한 5월 27일의 상무충정작전은 결코 희생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북한군과 김대중 세력은 유언비어를 퍼뜨려 폭동을 선동하였으며, 유언비어를 맹신하는 무장시민군에게 근 열흘간 무기 반납을 호소하였어도 듣는 이가 없었다.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언비어를 맹신하는 자들을 위하여 오십 년 백 년 기다려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침내 5월 27일 새벽 최규하 대통령의 군 자위권 발동 재가가 떨어졌다. 그러나 군인을 향하여 마구 쏘아대는 총탄을 무릎쓰고 돌진하는 작전은 피아간에 20명의 전사자를 내었던 바 그 중에 김응래씨 전우도 있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 싹쓸이 하러 왔다고 김대중 세력이 퍼뜨렸던 유언비어와 달리 김응래씨는 전라도 여수 사람이었다. 그는 시민군과 국군이 대치하고 있던 지점에서 차마 시민군의 총탄에 맞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건만 시민군의 총탄은 비정하게도 그의 옆에 있던 전우의 목숨을 앗아갔다.

시민군의 총탄이 친구의 목숨을 앗아갔을 때 엄청난 충격과 마음의 상처를 그에게 또한 안겨주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한 충격을 받았음에도 치료는커녕 위로조차 해주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그는 정신적으로 병들어갔으며 마침내 열차 사고로 그으 불우한 생을 마감하였다.

이처럼 광주사태 당시 도청을 광주시민에게 되찾아주기 위해 동원되었던 군인들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전혀 다르다. 그들 역시 무장시민군을 무서워하였으며, 시민군의 총탄은 그들을 빗겨가지 않았다. 그 중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들도 있으나, 김응래씨처럼 국립묘지에도 가지 못하고 시민군처럼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가족에게 가난을 물려주어야만 했던 이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광주사태의 진정한 피해자들이요 이제라도 그들의 가족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어야 하건만, 영화 "화려한 휴가"는 상처 치유는커녕 그들에게 "사람 죽이는 기계" 누명을 씌워 두 번 죽이는 죄악을 범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일까?

<글-역사학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79학번 2007-10-15 19:48:39
김동문 님,

전재하신 역사학도 님의 글이기에 실은 역사학도 님과 대화를 하여야 하겠으나, 일단 여기에서 말문을 열어도 공통의 대화는 가능할 것이라 믿고 글을 올립니다.

인용하신 이법철 스님께서 광주에 도착하신 날 5월 22일에는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5월 22일은 맑은 날씨였습니다. 따라서 일단 다음 기사는 엄격히 말씀드린다면 사실 상의 착오가 개입해 있다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법철 스님은 1980년 5월 22일 스님이 목격한 계엄군 희생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서술한다.

"소준열장군의 사령관실에서 나오니 하늘에서는 헬기가 무수히 오르내리고, 5월의 잔디밭에는 국방의 의무를 하러 간 병사들이 적국(敵國)의 총탄이 아닌 자국(自國) 시민군의 총탄에 의해 무참히 죽어 관속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비 오는 잔디밭에 판초우의 아래 즐비하게 누워 " 있었다"

인간의 죽검이 놓여진 극단적 상황이라면 비가 오고 있었는지, 아니면 맑은 날씨였는지 혼란이 있기 어렵다고 볼 때, 법철 스님의 기억에 있어 신뢰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시위학생, 시위시민, 그리고 그냥 방관하던 일반인 가리지 않고 구타와 대검질이 난무하던 5월 18일-20일 간에 발생한 사상자 일부는 군부대에 의하여 상무대 등으로 후송된 바, 법철 스님께서 보신 시신이 반드시 국군 경찰의 시신이라는 보장도 없다 하겠습니다.

역으로 그 시신은 (비가 왔느냐, 아니면 맑았느냐라는 정확한 6하 원칙 상의 착란이 있으나 이를 무시하고 어떤 일자에 판초 우의 아래 즐비하게 놓여진 시신을 보신 것에는 착오가 없다 할 때, 그 시신들의 신원이, 신분이 누구였는지 물어 보셨는지, 그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여 보셨는지 의문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질문일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도 적극적인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시민 학생 청소년 노년 피해 사망자의 시신이 그 중에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철스님께서 비애를 느끼셨던 소위 "호국영령"에 대한 매우 기본적인 정서 체험에 있어 근본적인 왜곡이 개재하여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만약 이 주장의 논법이 정당한 것이라면 전제가 흔들린 법철 스님의 인지와 판단 전체가 흔들려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호국영령의 신분은 광주 시민이었더라..."라는 매우 당황스러운 착각이 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 아차! 하게 되는 상황이 없다고 배제할 확실서이 확보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점들이 역사적 사실확인의 관점에서 광주 사건이 벌어진 지 27년이난 지난 현재에 있어 더욱 객관성을 찾기 힘들게 하며, 법철 스님의 주장에서 그 어떤 적극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이 논리적으로 매우 힘든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김동문 님 2007-10-15 22:12:37
이러한 점들이 역사적 사실확인의 관점에서 광주 사건이 벌어진 지 27년이난 지난 현재에 있어 더욱 객관성을 찾기 힘들게 하며, 법철 스님의 주장에서 그 어떤 적극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이 논리적으로 매우 힘든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법철스님께서 보다 확실한 고증을 하신 연후에 슬퍼하셨다면 다음과 같은 애도의 말씀도 나올 수 있었을 가능성을 지적함으로써 저의 글을 맺겠습니다.
.
.
"소준열장군의 사령관실에서 나오니
하늘에서는 헬기가 무수히 오르내리고,
5월의 잔디밭에는 국방의 의무를 하라고
우리 시민들의 세금으로 키워 낸
국군 장병들이
적국(敵國)의 도발에서 조국을 방어하는 대신
진압봉, 특공무술, 대검, 총탄으로
어미요, 아비요, 형제, 자매, 아들, 딸, 조카인
자국(自國) 시민의 생명을
무참히 짓밟아 관 속에 넣지도 않은 채
비 오듯 슬픈 맑은 하늘 아래
즐비하게 잡아 놓고"있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기획특집
가장많이본 기사
칼럼/수첩/발언대/인터뷰
방송뉴스 포토뉴스
오피니언  
연재코너  
지역뉴스
공지사항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뉴스타운TV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