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멘토인 좌파 대부 백낙청이 가문 배신자가 된 이유
문재인의 멘토인 좌파 대부 백낙청이 가문 배신자가 된 이유
  • 조우석 평론가
  • 승인 2019.07.0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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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석 칼럼 제105회

좌파 원로 두 사람이 문재인 귀를 붙잡고 있고, 그게 이 나라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얘길 전해드리면서 그 둘은 사회학자 한완상과 문학평론가 백낙청이라는 걸 말씀드렸다.

둘 중에 더 비중있는 건 백낙청이다. 아시죠? 좌파의 사령탑인 원탁회의의 좌장이고 좌파세계의 대부이자 명실상부한 우두머리 말이다. 그런데 백낙청은 정말 미스터리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백낙청만은 그러면 도저히 안 되는 사람인 게 그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고 대한민국의 혜택이란 혜택을 다 받았다. 그가 좌익 편에 선다는 것 자체가 미스테리인데, 그는 17세 때 미국에 조기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명문 브라운대와 하버드대에서 학위를 받은 뒤 나이 25세에 서울대 교수로 임용됐다. 무엇보다 집안이 일제시대 이래로 명문가였다.

그래서 오늘은 예고해드린 대로 그의 집안 얘기를 해야 하는데, 우선 지난 번 방송에서 했던 말을 바로 잡겠다. 그 자가 서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좌빨로 빠졌다는 말을 했는데, 서자란 말은 실수였다. 정확하게는 그의 큰형 백낙환과 동생 백낙청은 이복형제, 즉 배다른 형제라는 말을 하려던 게 실수했다. 이점은 좀 뒤에 자세히 전하겠고, 다시 백낙청 얘기로 돌아간다. 백낙청이 젊었을 적엔 큰 문제가 없었다. 아까 말한대로 젊은 나이에 서울대 교수가 됐으니 순탄한 인생 출발이었다. 그 전에 수재 소리를 들어가며 경기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브라운대 영문과도 수석으로 졸업했고, 졸업 당시 졸업생을 대표하여 연설을 했을 정도다. 군 입대도 기피한 바 없는데, 이게 흥미롭다. 하버드 석사과정을 마친 후 일시 귀국하여 군 복무를 마쳤는데,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당시엔 입대를 피하려고 현지에 눌러 앉는 경우도 흔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자체로 화제라서 신문에 ‘자진 입대를 위해 귀국한 하버드대 석사’로 보도되기도 했지만, 군 복무도 호화로울 지경이다.

그 기사를 본 군 장성들이 감격해 훈련병 백낙청을 훈련소를 거친 뒤 국방부 차관실에서 일하도록 배려했다. 그 백낙청을 5.16 직후 박정희가 의장으로 있던 최고회의 사무실에 근무를 시킨 일도 있다. 그런 백낙청이 왜 훗날 서울대 교수가 된 뒤 재직 2년 차에 나중에 좌빨의 구심점이 되는 계간지 <창작과비평>을 창간했고, 당시까지 순수문학으로 불리던 보수 문단에 포문을 연 것부터 극히 이례적이고 미스터리다.

백씨 집안은 일제시대 이래 명문가였고, 정치 이념적으론 명백한 보수였다. 그런 백씨 집안에 등장한 돌연변이가 백낙청이란 건 당혹스럽까지 한 노릇이다. 우선 백낙청 부친 백붕제는 일제시대 고시 양과(사법·행정)에 합격한 수재로 해방 전에는 총독부 관리로 경북도 군위 군수를 역임했다. 명성은 그의 큰형 백인제가 더 높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종합병원인 백병원의 설립자다. 경성의전(서울의대의 전신) 모교 교수 생활을 거쳐 일제시대 개업했던 백인제외과의원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돈을 엄청 벌었다. 그리고 그게 해방 직후 한국 최초의 민립 공익법인 백병원의 모태다.

백인제-백붕제 형제는 7남매의 셋째와 넷째인데, 집안 전체가 개화기와 일제시대 잘 성장했지만, 그 중에서도 돋보였던 게 그 둘이다. 둘은 11살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정치적 동지였다. 결정적으로 “정치사상적으로 투철한 반공주의자”였다. 그건 창비에서 펴낸 단행본 <선각자 백인제>에 등장하는 표현 그대로다. 인촌 김성수 등과도 친분이 있었고, 당초엔 중도 성향이 없지 않았으나 정판사 위폐사건을 겪으며 바뀌었다고 한다. 이게 흥미로운데, 당시 남로당 연루자들이 재판 불복의 차원에서 수사하던 경찰의 고문을 받았다고 거짓 주장할 때 백인제가 “고문은 없었다”고 의사로서의 소견을 밝힌 것이다.

아마도 좌익들이 테러 위협도 하고 그랬을텐데, 그걸 이겨냈고, 어쨌거나 좌익들의 행태를 지켜보며 반공주의자로 거듭난 것이다. 제헌의원을 뽑는 5.10총선 때 서울 중구에서 출마를 단행했던 것도 그 맥락인데 소신도 뚜렷했다. 그는 동아일보에 쓴 기고문에서 “총선거는 남조선 단독선거가 아니고 그야말로 전민족의 총의를 표시한 선거다.…국가의 영구분열이니 (좌익세력이 주장)하는 건 통분을 금치 못한다”고 선언했다.

단독 선거는 민족 영구분단으로 이어진다는 좌익 논리에 대한 정면 부정이다. 그런 백인제는 꿈에도 몰랐으리라. 총선거 당시 10세이던 조카 백낙청이 성인이 되어 대한민국 건국 정통성을 부인하는 분단체제론 어쩌구를 펼칠 줄은 전혀 예측 못했다.

어쨌거나 백인제는 그때 낙선을 하고 말았지만, 당시 선거캠프의 사무장이 동생 백붕제였고, 조카 백낙환(백낙청의 큰형)을 선거운동원으로 쓰면서 백씨 집안은 반공의 구호 아래 뭉쳤다는 게 중요하다. 두 형제가 6.25 당시 함께 납북이 된 것도 둘의 활동이 북한에 눈엣가시였다는 증거다.

그런데 백인제-백붕제 형제는 의사-변호사 이전에 해방정국의 유명 출판인이기도 했다. 이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일인데, 형제는 의기투합해 출판사-서점을 함께 운영했는데, 특히 우량도서만을 펴낸 건 문화사업에 대한 의지를 반영한다. 그건 훗날 조카 백낙청이 했던 창비 식의 좌파상업주의와 너무 달랐다. 그리고 이걸 주도한 건 백인제-백붕제 형제의 의지였다.

구체적으로 둘은 1947년에 출판사 수선사(首善社)를 명동 한 복판에 떡하니 차렸다. 으뜸 수, 착할 선에서 작명한 수선사란 출판사 이름에서 가장 뛰어난 양질의 도서만을 다루겠다는 의지가 읽혀지지만, 내용상으로도 우익 도서만을 골라서 펴냈다.

여러분 아시죠? 해방 직후 좌익서적이 대세인양 80% 이상을 점유했던 시절에 그건 흔치 않은 용기였다. 백인제는 자신이 그곳의 대표로 있으면서 소설가 계용묵에게 편집 책임을 맡겼다. 계용묵은 <백치아다다> 등을 썼던 유명한 사람이다. 물론 서점 운영은 친동생 백붕제에게 전담시켰다. 그들이 얼마나 출판보국에 심혈을 기울였느냐는 6.25전까지 3년 동안 펴냈던 20권 가까운 문학-교양서 목록이다. 그중 단 한 권도 좌익서적이 없다.

수선사 명의의 첫 책이 직접 구술을 받아 쓴 <서재필 박사 자서전>인데, 당시 '자유주의의 교과서'라고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광고 문안은 “자유주의 이상이 무엇인지 알려거든 모름지기 이 구술을 읽으시라”고 되어있는데, 백씨 형제의 의중이 담긴 것은 물론이다. 서재필 박사는 당시 미군정의 초청으로 귀국해 과도 정부 최고정무관으로 있었는데, 그를 새 나라의 지도자로 옹립하려던 게 백인제-백붕제 형제의 구상이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창비에서 1999년 펴낸 단행본 <선각자 백인제>는 수선사 이름으로 펴냈던 책의 목록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일반 교양서로는 <유관순전>(전영택 지음), <조선신문학 사조사>(백철 지음), <현대 영시선>(양주동 옮김), <불란서 시선>(이하윤 옮김), <철학 개론>(에루잘렘 지음), <조선민요 연구>(고정옥 지음)도 눈에 띄이고, 동시에 문학서적과 아동서도 많이 펴냈다.

<만세전>(염상섭), <황토기>(김동리), <발가락이 닮았다>(김동인), <제신제(諸神祭)>(정비석), <사랑방손님과 어머니>(주요섭), <별을 헨다>(계용묵), <천맥>(최정희), <굴렁쇠>(윤석중 동요선집) <안데르센 동화선집- 어머니의 사랑>, <동요의 감상과 지도>(박영종) 등이 그것이다.

6.25가 터지기 전까지 펴낸 문학서적에서 이태준-김기림-임화 등 좌익 계열 작가가 쓴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전체가 이른바 순수문학 문인들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아까 제가 뭐라고 했지요? 백낙청이 훗날 좌빨의 구심점이 되는 계간지 <창작과비평>을 창간하며 보수 문단을 청산하겠다고 했던 건 자기 애비와 큰아버지가 했던 출판행위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뜻이다. 정면에서 깨부수겠다는 선언이었다. 우익의 집안에서 좌파의 대부 백낙청 등장은 정말 돌연변이가 아닐 수 없다. 무엇이 백낙청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백낙청에게 출판업은 어찌됐건 집안의 사업 즉 가업(家業)인데, 그걸 가지고 지난 반세기 엉뚱한 짓을 해온 자체가 의문이다. 지금도 그 의문이 죄다 풀린 건 아닌데, 뭔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요인이 따로 있었던 건 아닐까? 즉 큰형과 백낙청은 어머니가 다른데, 그런 요인이 젊은 백낙청 가슴에 응어리로 작용했을 것이란 추정도 해본다.

사실 백붕제는 나이 15세에 조혼(早婚)을 했다.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백낙환을 낳았으나 그녀는 바로 병사했다. 때문에 백낙청은 새로 얻은 여자 최귀란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다. 백낙환과 백낙청은 배가 다른 것이다. 혹시 그런 요인이 ‘현대판 홍길동’ 백낙청을 만들고 끝내 엇나가게 한 건 아닐까?

실제로 백낙청이 젊은 시절엔 집안 제사에 참석하지도 못했다는 말까지 일부 있지만, 확인된 바 없다.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조선시대 같은 서자(庶子) 콤플렉스 같은 걸 자극해 훗날 좌편향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 못한다. 그러나 이 추정도 설득력이 썩 큰 것만은 아닌 게 최귀란은 일본 나라여자고등사범 출신의 신여성이었으니 엘리트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집안 내 신분은 소실이나 첩과는 달랐다. 집안에서 소외됐다는 증거도 드물다.

실제로 그녀는 백낙청을 포함해 3남3녀 남매를 낳았고, 타계 전인 2000년대 초 사비를 내놓아 백붕제기념출판문화진흥재단을 만들기도 했다. 현재 그 재단 이사장은 백낙청이 앉아있다. 이 모든 걸 종합해보면 젊을 적 백낙청이 집안에서 소외됐다는 추정은 현재로선 다만 가설일 뿐이다.

어쨌거나 백낙청이 선대가 품었던 출판보국, 문화입국의 꿈을 왜곡시킨 당사지인 건 분명한데, 확실히 그는 미스터리가 많다. 애매한 것은 앞으로도 더 파헤치겠다. 분명한 건 그가 백씨 가문을 배신했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좌빨 책을 펴내는 출판을 통해 우리 국민들을 오염시키는 주범이라는 점이다.

※ 이 글은 2일 오전에 방송된 “문재인의 멘토인 좌파 대부 백낙청이 가문 배신자가 된 이유"란 제목의 조우석 칼럼 제105회를 토대로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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