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분 되어 흔적 없이 뿌려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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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 장군의 사후 조치가 뭇 국민들의 가슴을 울렸다

▲ ⓒ뉴스타운
여기 저기 다니다 보면 많은 산소들을 본다. 삐까번쩍, 분묘도 거창하고 나무도 있고 돌상들도 다양하다. 한 마디로 화려한 묘들이다. 반면 음달에 돌보는 후손 없이 묵묘로 주저앉기 직전인 묘들이 있다. 잘난 묘도, 못난 묘도 모두 다 강산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빈손으로 태어났다가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고 가면 그 뿐이지 뭣 하러 아름다운 강산에 울퉁불퉁, 흉한 봉분들을 만들어 놓고 비싼 땅 차지하고 그 잘난 뼈를 크게 묻는가. 살아 생전 주변사람들의 가슴에 남긴 것도 없으면서, 지구상에 불쌍하게 살고 있는 인생들에 별로 베풀지도 못하고 자기와 자기 식솔들 위주로 살고 가는 사람이 뭐 그리 떳떳하다고 뼈 한줌 묻는데 그 요란한 모습을 크게 남겨 놓고 가는 것인가.

인생 살면서 죽을 때까지 주위와 후손들에 이렇다 할 그림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절대자 앞에 서서 "절대자여, 나는 당신이 부여해준 건강과 탤런트를 갈고 닦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당당히 결산할 배짱을 길러본 적이 없으면서 뭐 그리 잘났다고 후손의 돈으로 한 뼘 뼛조각을 그리도 부풀려 묻고 가는가. 살았을 때 부풀려 과장하고 난체한 것 가지고도 모자라 그렇게 하는 것인가. 생전에 잘 먹었으면 됐지, 죽어서 까지 해마다 여러 차례씩 후손들에 음식해서 찾아오라 강요하는 것은 도 무엇인가.

나보다 연세 드신 어른들께는 결례되는 이야기 이지만 나는 내가 죽어서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 가끔씩 생각했다. 채명신 장군의 사후 조치가 뭇 국민들의 가슴을 울렸다. "자신이 올라가려 하면 내려갈 것이고, 자신이 내려가려 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올릴 것이다" 채명신 장군은 이런 계산으로 선택하신 게 아니라 그가 생사고락을 가장 많이 함께 한 월남참전 용사들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

김관진이 국방장관을 할 때, 그는 채 사령관의 유언을 수용하지 않았다. 관계 장군들과 회의를 했고, 회의 결과 장군이 사병 묘지로 가는 것을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예산군수를 하시던 육사 21기 최승우 장군이 김관진 장관을 만나 최종 결심을 전달받았다. 그는 장관실을 나오시면서 내게 전화를 걸었다. "지박사, 안 된데" 타이밍이 참으로 중요했다. 시각을 타투는 문제였다.

나는 화가 났다. 국방장관의 생각이 유연하지도 못하고 채 령관의 의사가 향후 대한민국 사회에 미칠 온갖 긍정적인 효과를 모르는 속 좁은 의사결정이었다. 나는 사모님인 문 여사 옆에 있는 정재성(stallon) 동지에 이 사실을 알렸다. "장관이 안 된대" 그는 낭패감을 표현하면서 자기 체면이 어찌 되느냐 하소연을 했다. 화가 난 나는 "그러면 나더러 더 어떻게 하라고~" 화를 내고 전화를 끊었다.

순간 착상이 떠올랐다. 정재성 동지에 전화를 걸었다. "사모님께 여쭤봐, 내가 청와대 비서실장 앞으로 문여사님이 쓰시는 편지를 기안해 보낼 테니 허락을 득하고 서명을 부탁해 볼래?" "빨리 보내 주세요" 정재성 동지는 내가 기안한 문 여사의 편지를 문 여사에 제시했다. 문 여사님은 "이렇게 까지 할 마음 없습니다" 사양을 했다.

그래도 나와 정동지는 채 사령관님의 위대한 뜻을 반드시 관철시키고 싶었다. 현장에 있는 정 동지가 사모님께 졸랐다. "서명만 해주십시오" 그리고 서명된 편지가 초고속 우편으로 우송됐다. 청와대 프로세스는 너무나 느렸다. 육군장으로 치러지는 장례식, 4일 장이었다, 청와대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는 최근글에 청와대 비서실장이 감히 미망인인 문정인 여사의 편지를 씹을 수 있느냐며 분노의 글을 썼다.

육군본부는 대전 현충원에 장군묘 8평을 준비했다. 그런데! 발인식 하루 전인 3일째 되던 날 김기춘 비서실장에서 문 여사님 앞으로 전화가 왔다. "대통령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비서실장도 대통령 만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세상이 암흑에서 광명으로 바뀌는 기분이었다.

결국 채 사령관님은 월남참전 용사들 앞에 묻혔다. 자그마한 사이즈의 묘지석을 만들기로 했다. 그 표지석은 지금도 예술품처럼 자그마한 자태로 묘비를 장식하고 있다. 그 묘지석에는 한굴말과 영어말이 있다. 한글은 내가 썼고 영어는 정재성 동지가 썼다.

"그대들 여기 있기에 조국이 있다" 이 글은 나의 글이다.
"Because you soldiers rest here,our country stands tall with pride" 이 말은 정재성 동지의 번역문이다.

여담으로 이 표지석 글을 자청한 김 모 박사가 있었다. 그는 채 사령관과 가까웠다. 그가 표지석 글을 보내왔다. 내용을 그대로 밝히는 것이 부적절해 요지만 밝힌다. "하나님께서 애국자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그는 국가에 충성했고 월남전에서 훌륭한 명장이 되었다. 그런 그가 여기에 누웠노라. 김 아무개 박사" 이런 것이었다. 틈만 나면 자기 이름을 기록하고 싶어 하는 졸부형의 박사.

이 김 박사님의 글에는 두 가지 욕심이 들어 있었다. 채 사령관님이 생색내면서 내가 너희들과 함께 눕기로 하였노라라는 공치사의 말과, 김 아무게 박사를 표시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평소 채 사령관님의 인격과 어울릴 수 없는 글이었다. 채 사령관님은 공치사 하고 자기를 나태는 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표지석에서 "나"라는 존재를 소멸시키고 오직 병사들을 부각했다. 내가 나를 죽이는데 왜 커다란 장군 봉분이 필요한 것인가. 이것이 채 사령관이 선택하신 무-봉분인 것이다.

그래도 그 묘지에는 비석과 후배들이 바친 표지석이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삽으로 두어 번 파낸 구덩이가 있고, 그 구덩이에는 꿀단지 사이즈의 유골이 봉인돼 있다. 유골이 항아리에 갇혀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내 유골 만큼은 훨훨 넓은 세상에 날아 다니도록 하고 싶었다.

나는 내 기족과 함께 죽음을 토의했다. 그리고 이렇게 합의했다. 두 사람은 유골이 되어 흙과 함께 버무려져 홍천의 산장 같이 이용하던 시골집에서 창문을 통해 늘 바라보던 앞산 소나무 숲에 뿌린다. 죽은 후에는 무서운 삼베천을 거부하고 평소 가장 많이 입고 다니던 옷을 그대로 입는다.

그리고 그 옷을 그대로 입고 화장한다. 그리고 둘이 다 유분되어 그 소나무 밭에서 만나자. 만나면 손잡고 이 세상이든 저 세상이든 훨훨 집시처럼 날아다니자. 이승의 미련 모두 불살라 버리자. 인습과 통념에 구애받지 않고 살았듯이 우리 영혼 꽁꽁 묶지 말고 자유롭게 날아 다니자. 살았던 집에 제사 먹으러 가지도 말고 자식이 내 제사 지내주나 안 주나 실피는 치사한 영혼 되지 말자. 서운하다며 살아가는 자식에 역정 내고 해코지하는 그런 추한 영혼 되지 말자.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내가 국립묘지에 아내와 함께 갈 수 있는 기본 자격이 되지만, 내게 금고 이상의 전과가 두 개 있어 규정상 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김대중이 5.18 때문에 나를 광주구치소에 가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명박이 그에 대한 인터넷 의혹을 정리한 후 이런 의혹 저런 의혹 제기하면 이명박에 고소당한다고 경고한 글이 범죄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명박은 그의 고려대 후배 윤웅걸 검사를 통해 나를 희생양으로 삼아 그의 깨끗함을 증명함으로써 대통령이 되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내 분석이다. 생각하면 기분 자존심 많이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풍운아 그 자체다. 내 자란 환경을 보면 나는 초증학교 정도 나오면 그것이 최고 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상한 팔자가 있다고 한다. 팔자로 보면 나는 학자이고 풍운아라 한다. 한 시대의 학자로서의 꼿꼿한 상징성을 남기며 애국세력을 형성하여 애국 생활 하다가 가는 인생이라면, 명예롭게 살다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저분한 분묘를 남기고 흔적을 남기고 갈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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