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 편집증인가 공포증인가
스크롤 이동 상태바
'4대강', 편집증인가 공포증인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슨 일을 꾸미더라도 'MB 2기'는 존재하지 않을 것

 
   
     
 

국토부 당국자들이 '4대강'에 대한 충청남북도의 공문과 도지사들의 발언을 일방적으로 자기 입맛에 맞게 변형(마사지)했다고 해서 민주당과 해당 지사 측에서 해명을 하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정부 당국자들이 초조한 상황에 몰리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모든 현상은 집권세력의 '4대강 강박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4대강'은 물을 확보하고 홍수를 막는다는 집권세력이 내세우는 ‘사업목적’과 무관하게, 집권세력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가 되고 말았다. '4대강'이 무너지면 자신들도 무너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작년 여름 만 해도 여권에서도 4대강 사업에 대한 회의적인 발언이 이따금 나오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말을 듣기 어렵다. 4대강 사업이 원래의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냐 하는 것은 집권세력에 있어 큰 관심사라고 할 수 없다. 현재의 정치적 역학관계로 볼 때 '4대강'이 무너지면 자신들도 무너진다는 ‘공동 운명’ 의식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을 뿐이다.

이런 현상은 물론 집권세력이 ‘4대강’에 ‘올인’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4대강 독선과 아집'은 '4대강 강박증'과 '4대강 편집증(偏執症)'으로 발전하더니, 이제는 더 이상의 논리가 필요 없는 '죽느냐 사느냐'의 '생존 문제'가 되어 버린 형상이다. 한 개의 모자이크 석재가 삐끗하고 빠져 나오기만 하면 통째로 무너지고 마는 가우디의 건축물을 연상시킨다. '4대강 붕괴'는 이제 공포의 대상이 되고 말았으니, '4대강 공포증'이란 말이 나옴직도 하다.

충남북도의 견해를 일방적으로 편리하게 해석해서 발표한 국토부도 그렇지만 그것을 크게 보도한 이른바 보수신문과 국영방송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4대강'에 대한 이들의 보도성향은 저널리즘의 기본에도 어긋나는 것임은 대학 1학년생도 알 것이다. 4대강 사업의 심각한 문제 등 중요한 쟁점은 아예 보도하지 않고, 반대하는 측의 사소한 '실수'는 크게 키워서 보도하는 언론을 어떻게 언론이라고 하겠는가. 4대강에 반대하면서 소신공양을 한 문수 스님에 대해선 보도하지 않으면서 수경 스님의 잠적을 두고 환경운동이 어떻다고 힐난하는 언론을 어떻게 언론이라고 하겠는가. 1990년대 초에 천년된 북한산 은행나무를 살리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가 단식농성을 단행한 끝에 나무를 지켜낸 환경운동가에 대해서 찬사를 퍼부었던 신문과 방송이 '4대강'에 반대하면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환경단체 대해 그토록 험담을 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참으로 씁쓸할 따름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을 할 때에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아무리 난리굿을 해도 이 정권은 임기가 얼마 안 남았으며, 무슨 일을 꾸미더라도 'MB 2기'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4대강 사업'에 몸을 담구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국민 2010-08-06 22:28:09
최근 천안함 사태와 관련하여 석연치 않은 해명과 이에 대한 의심,
그리고 의심에 대한 비난이라는 일련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는 주장과
이해할 수 없는데 어떻게 믿느냐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과연 어떤 주장이 옳을까?
의심은 건전한 인관관계를 해치고 불신으로 가득 찬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악덕인가?
아니면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게 해서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미덕인가?
믿음과 의심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에 있는가?
아니면 상호보완적이고 건설적인 작용을 하는가?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루터파 신학자인 피터 버거와 네덜란드의 사회학자·철학자인 안톤 지더벨트의 책,
제목(함규진 옮김, 산책자 펴냄)은
종교 철학에서 출발해 윤리학을 거쳐 사회·정치 철학으로 이어지는 다채로운 지적 여행을 하면서도
의심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 독자들의 일상적 경험과 문제들의 끈을 놓지 않는 길잡이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오랫동안 현대 사회의 특징들을 종교학·철학·사회학의 입장에서 연구해온 저자들은 의심과 믿음,
상대주의와 근본주의라는 얼핏 보거나 논리적으로 따져도 반대되는 두 개념들이 실제로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하면서
이들은 서로가 대립되어있으면서도 서로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총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며
단계적으로 전개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각 장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중략

[결론에 도달키위한 긴해설이라 중략하였음]

저자들의 결론은 의심과 확신 사이의 중용이지만,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의심에 더 강조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들이 강조하는 건전한 의심의 힘은 비판적 사고 능력과 성향으로 통하는 것이다. 강요된 믿음이나 무의식적으로 세뇌된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가는 아주 가까이 우리의 현대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충분한 토론과 협상의 과정 없이 무조건적인 다수결만을 외치는 의회는 비판적 사고와 의심의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권력의 거수기로 전락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 부각되고 있는 심의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게 된다.

저자들은 결론에서 맹목적 상대주의와 극단적 근본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중용을 취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그 중용의 길을 찾고 유지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사실상 침묵한다. 중용이라는 말을 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 책에서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지침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그나마 저자들이 제 5장에서 제시한 중도적 입장의 일곱 가지 선결 조건들이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추상적 수준의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번역은 깔끔하고 읽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다만 용어 표현에 있어 "오염" 대신 "전염", "허무화" 대신 "무력화", "변증" 대신 "변증론"이 더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광신도들은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신은 완전하니까 신을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완전한 신을 믿을지라도 우리의 믿음 자체는 결코 완벽할 수 없다. 완전한 신에 대한 불완전하거나 잘못된 믿음이 존재하고 바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맹목적인 믿음이 우리의 불완전함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우리의 결함에 대해 스스로 눈멀게 할 뿐이다. 우리는 언제든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물론 동시에 그 오류를 수정하고 진리로 조금씩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건전한 "의심"을 통해서.

/이진남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기획특집
가장많이본 기사
칼럼/수첩/발언대/인터뷰
방송뉴스 포토뉴스
오피니언  
연재코너  
지역뉴스
공지사항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뉴스타운TV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