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18일 오후 1시43분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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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18일 오후 1시43분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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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 85세. 사인, 급성호흡부전증 등

 
   
  ▲ 고(故) 김 대중 전 대통령. 후광(後廣) 김대중) 전 대통령은 “통일운동과 민주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으로 인식돼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3분 사망했다

세브란스병원은 18일 “오후 1시 35분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심장이 정지된 후 40분부터 맥박이 일시적으로 돌아왔지만 43분에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향년 85세.

김 전 대통령은 폐렴 증상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지 39일째로 그동안 인공호흡기를 착용했다 벗었다를 되풀이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 세상을 떴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9시쯤 혈압과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졌으며 혈압상승제 등을 투여 집중 치료했으나 결국 오후 1시43분에 숨을 거뒀다고 병원 측은 밝혔다.

병원측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인은 폐렴악화에 따른 급성호흡부전증과 이로 인한 다발성장기부전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전에도 만성신부전증과 협심증 등을 앓고 있었다.

후광(後廣) 김대중) 전 대통령은 “통일운동과 민주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으로 인식돼왔다.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향한 그의 의지는 투옥, 연금, 망명, 사형, 다시 소생 등 반세기 정치 역정에서 한국 현대사의 질곡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인생은 질곡, 영욕이 점철된 현대 한국정치사의 산 증인이었다.

그는 한국 헌정사에서 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고 45년 해방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큰 열매를 맺었다.

그는 전남 목포 앞바다에 있는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머니가 논과 밭을 팔아 뒷바라지를 해준 덕택으로 목포로 유학, 목포상고(현재의 전남제일고)에 수석합격의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후 그는 강제징집을 피해 일본인이 운영하던 해운회사에 취직했다 해방 이후 그 해운회사의 관리인 자격으로 사업수완을 발휘했으며 목포일보라는 신문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해방공간에서 여운형(몽양)선생이 좌우익을 구분치 않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에 참여했다가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환멸을 느껴 건준위에서 탈퇴를 했으나 그의 당시의 이력은 숨을 거둔 오늘까지도 좌익이라는 이른바 ‘딱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멍에를 어께에 지고 살아왔다.

그의 일생은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한국전쟁 동안에는 우익반동이라는 이유로 공산당에 붙잡혀 투옥되기도 했으며 당시 총살 직전에 탈출에 성공하는 등 생애 5번의 죽을 고비 중 첫 번째 고비를 넘겼다.

그는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 당시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신 다음 56년 장면박사가 이끄는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1959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그리고 60년 5대 민의원 선거에서 잇따라 쓴맛을 봤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61년에 치러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생애 첫 국회의원이 됐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지 3일 만에 5.16군사정변이 발생, 국회의원 선서도 못한 채 의원직을 상실했다.

정계에서 낙선을 여러 번 하면서 재산은 탕진됐다. 1959년 첫 번째 부인 차용애씨와 사별하고 홀어머니와 병든 누이동생과 함께 전세방을 전전하면서 지내다 1962년 와이엠시에이(YMCA)연합회 총무로 일하던 미국 유학파인 이희호여사와 재혼에 성공, 가정적인 안정을 되찾고 63년 6대 총선 당시 목포로 지역구를 옮겨 국회의원이 됐다.

그는 64년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 때 본회의장에서 5시간 19분 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연설을 함으로써 이른바 필리버스터(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를 해 기네스 북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1971년 첫 번째 대통령 선거에 도전 당시 박정희 후보에 패배이후 97년도 대선 4수에 이르러 대통령이 당선되는 역경의 인생을 그려왔다.

1972년 유신이 선포된 이후 그는 8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선언까지 17년간 납치와 망명, 투옥, 연금 등 암울한 시절을 보냈다. 73년 일본 도쿄에서 당시 중앙정보부(KCIA) 요원들에 의해 납치돼 수장을 당할 뻔했으나 미국의 정보기관의 덕분으로 살아났다.

이후 그는 79년 10.26사태 이후 정치일선에 되돌아 왔지만 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아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를 꽃피우려다 전두환 신 군부에 의해 무산됐으며 당시 내란 음모 혐의로 구속돼 있다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사형선고를 받았던 그는 국내의 민주 청년들과 시민들의 항거, 미국을 비롯한 바티칸 교황 등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사형에서 20년 무기징역, 20년 무기지역에서 감형을 받았고, 이후 82년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미국 망명 중 국내에 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한 데 이어 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망명생활을 접고 전격 귀국을 감행했으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또다시 가택연금으로 '영어의 몸'이 됐다.

그는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과 후보단일화에 실패,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했으나 당시 YS로 단일화될 경우 민주진영의 정권교체가 보다 유력시되는 상황이었으나 끝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둘 모두 패퇴했다. 당시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됐었다.

세월은 흘러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 정권의 최대 실세였던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와 손잡았고, 이른바 'DJP 공조'는 외환위기를 맞아 '준비된 대통령' 탄생을 갈망하는 국민 여론을 타고 정권교체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당시 김대중 당선자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취임 이후 단기간에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햇볕정책’을 통해 역사적인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분단의 벽을 허물어 남북화해와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는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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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2009-08-18 15:22:28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대통령은 대통령 다워야 하건만, 그 좋은 날 다 두고 하필...내일 저녁쯤 가시지...그리 급하셨나...

시민 2009-08-18 15:25:27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욕의 한 세상 모든 잊으시고 영면하십시오

목숨바쳐 2009-08-18 15:26:31
목숨바쳐 대통령하시더니만...올해는 국민세금 무지하게 들어가겠네...목숨 아주 놓으셨네!!!~그간 고생많았습니다. 대통령 되기 위해...노벨평화상 타기 위해...울집 장롱에 금 모두 다 갖다주어 지금은 하나도 남은게 없네...

영샘이 2009-08-18 15:30:40
인정머리없는 글은 사절.
아무리그래도 그렇지 고인에게 이게 무신 망말인고.

나도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나도 DJ와 화해 했지.
화해하고 나니 내 생도 얼마 안남은 거 같애....

촌노 2009-08-18 16:26:57
부디 영면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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