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반성과 사과 없는 한일관계 개선은 사상누각(沙上樓閣)
-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정신 계승은 일본의 사과가 우선돼야
‘외교’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실리외교, 균형외교, 중국이 말하는 전랑외교 등 사정에 따른 다양한 형태가 외교이다.
높은 수준의 대화와 솔직하고도 정교한 대화라면, 갈등과 충돌의 현안 문제도 풀어낼 수 있는 게 외교이다. 한국과 일본사이는 ‘가깝고도 먼’ 사이이다. 한일 두 정부는 당연히 그동안의 긴장 속에서, 대결적 자세에서 벗어나 관계복원 혹은 관계개선을 해야 한다.
취임 100일을 맞이한 윤석열 대통령이 17일 첫 기자회견을 가졌다. 윤 대통령은 (일본에 의한 강제) 징용공 문제에 대해 ‘한일 양측이 수용 가능한 방안’을 마련하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원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사법부에서 피고인 일본기업에 대해 배상하라는 판결이 난지 꽤 시간이 흘렀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법적으로 이미 해결됐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일본 정부는 만일 일본기업의 자산을 한국 사법부 판결대로 현금화시킬 경우에는 엄정 대응을 하겠다며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그러한 ‘일본의 입장을 폭넓게 배려한 듯’ 일본의 주장을 해결해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일본과 충돌하지 않고, 채권자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묘수찾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기업에 손해를 끼치지 않고 피해자 구제에 임하겠다는 뜻이다. 기존의 피해자 중심의 문제해결 방식을 뒤로하고, 일본 배려 문제 해결방식을 취한다면, 일본의 입장을 충분히 수용하려는 한국정부, 한국인, 피해자의 정체성을 망각하려는 움직임이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강제징용공과 유족들은 여전히 일본기업의 진정한 사과 등을 요구하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윤석역 정부에게 이 문제는 난제임이 틀림없는 동시에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최대한 성실하게 부응해애 할 의무도 함께 있다. 일본 정부와 일본 언론 대부분은 마치 과거부터 지금까지 모든 면에서 한국이 잘못을 저질러 왔기 때문에 한국 스스로 (일본의 피해 없는) 방안을 만들어 내라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적반하장도 없다. 일본의 한반도 강점기 동안의 천인공노할 비인간적 행동을 수없이 한 일본이 아닌가.
윤석열 대통령은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을 힘을 합쳐 함께 나가야 할 이웃”이라고 강조했다. 친구다운 친구, 이웃다운 이웃이어야 함께 힘을 합쳐 나갈 수 있는 법이다. 역사왜곡, 독도에 대한 일본 영토 주장 등 수많은 잘못에 대한 반성은커녕 진정한 사과도 없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이 일본이다. 정서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감정 및 감성적으로나 거리가 먼 이웃 역시 일본이다.
잘잘못에 관계없이 자기와 같은 무리끼리는 한데 뭉쳐 서로 돕고 반대자를 공격한다는 뜻의 ‘당동벌이(黨同伐異)’라는 말이 떠오른다. 윤석열 정부의 대일(對日)자세가 그렇게 보인다는 뜻이다. 입으로는 보편적 가치와 자유, 자유민주주의 개념 운운하며 실질적으로는 피해자 징용공 및 그 유족들에 대해서는 특수한 가치를 들이대며 부자유스러운 대응책을 내놓을 듯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일본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많이 남아 있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지도자는 곤란한 처지가 아닐 수 없다. 할 말은 하고, 수용할 것은 수용하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지도자도 필요하다. 강력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포용적인 외교실력이 요청되는 시기이다. ‘요구와 양보’는 어느 일방의 것이 아니다. 일본의 악의적인 요구에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명제를 내세우고는 자국 국민들을 향해서는 상대를 배려하고, 양보하자는 대승적 차원이라고 되지 못한 변명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역사를 책임지는 모습을 한 번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있는 일본과 관계개선만이 최선의 길인가도 깊이 있게 따져보아야 한다. 함께 하되 진실을 나눌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우선이다.
일본의 역대 정권 거의 모두가 한국에 대해서는 고(高)자세이다. 1998년 10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 요즘 회자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정신’을 계승해 한일관계 개선을 하겠다고 했다.
이 공동선언은 “오부치 정권의 통렬한 반성과 사죄’ 표명과 ‘기대중 당시 대통령의 미래 지향적으로 나가기 위해서 서로 노력하자’는 말을 병렬적으로 나열한 공동선언이다. 전제조건이 반성과 사죄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윤 정부는 과연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받아낼 수 있을 것인가? 징용공 피해자만 참고 견디며 일본에 대한 배려만을 강조하며 관계 개선을 해 나가려 한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3년 전 엉뚱한 핑계거리를 내세우며 시행했던 대한(對韓)수출 규제 역시 풀지 않고 있는 일본이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일본이 수출규제를 시행하면 한국 반도체는 큰일 나고, 한국 경제는 치명타를 입을 것이라는 겁먹는 뉴스가 상당했다. 그러나 결과는 한국의 멋진 승리로 귀결됐다.
일본의 독단적이고 일방적인 주장을 흔쾌히 수용하는 윤석열 정부가 돼서는 안 된다.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는 한국 대법원의 일본기업에 대한 자산의 현금화 판결에 대한 보복조치였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단 한마디 없이 아직도 수출규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세계의 기존 질서가 급하게 변해가고 있다. 아시아태평양의 정세도 역시 복잡하게 얽히고 있는 가운데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많은 공통의 과제가 있다. 경제와 안보 문제에서 특히 한일 양국 간의 긴밀한 협조는 필요하다. 북한, 중국, 러시아 문제와 미국, 일본,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세력 간의 기존 질서의 변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이 한국 국익에 맞는 것인지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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