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유럽여행을 가려고 준비해 왔는데 일을 마무리하는 시점이 11월말이고 보니 망설여졌다. 거기다가 처음 떠나는 배낭여행이라 겨우내 혼자 돌아다닐 자신이 점점 없어졌다. 아무리 그곳이 지중해성 기후라 따뜻하다지만 너무 추워서 겨울잠바 사 입었다는 소리를 자주들은 터였다. 사실은 그 만큼 간절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또 다른 내가 감지하지 못한 이유가 내 안에 있을 수도 있었다.
결국 나는 호주를 선택했다. 어렸을 때부터 가고 싶었던 인도도 아니고 생전 관심조차 없던 호주를 단지 아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선택했다. 나의 호주 배낭여행은 이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되었다.
호주 행, 항공권을 잡아라
겨울에 호주를 가려면 미리미리 서둘러야한다. 방학을 맞아 어학연수를 가려는 학생들, 추운 곳을 벗어나고 싶은 직장인들 그리고 골프 치시는 어른들이 대거 이동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방콕 싱가포르 등 동남아 쪽을 경유해서 가는 항공편을 많이 이용하게되는데 이쪽 역시 겨울에 따뜻해서 골프 치시는 분들이 많아 좌석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여기저기 여행사에 항공권을 의뢰하고 투어 익스프레스(Tour Express)에서 직접예약하고 표를 잡는데 처음 보는 항공사인데 표가 있었다. '가루다 인도네시아(Garuda Indonesia) 항공' 데판샤 발리(Denpasar Bali)를 경유해서 퍼스(Perth)로 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우선 잡아놓았다.
서울에서 시드니로 들어가건 퍼스로 들어가건 얼른 들어가고 싶었다. 아무래도 시드니로 들어가는 것은 무리라는 연락이 왔다. 2003년 1월 5일 이후에나 가능할 것 같다고. 그래서 퍼스로 들어가기로 했다. 방콕에서 퍼스로 들어가는 좌석은 있는데 서울에서 방콕까지가 문제였다. 결국 타이항공을 포기하고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으로 가기로 했다.
오늘은 대통령 선거일이라 그런지 한가하면서도 분주함이 느껴지는 그런 날 이었다. 투표를 하고 이것저것 살 것이 있어 나간 길에 직접 항공권을 받아 가지고 들어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이 처음으로 호주와 교류를 하게 되어 일부사람들은 60만원도 정도로 항공권을 예약했다고 한다. 나는 100만원 돈 다 줬는데..... 억울해도 어쩔 수 없는 일, 미리미리 준비하지 못한 탓이었다.
호주는 현재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멜버른을 가게되면 하루 날씨에 사계절이 다 들어 있다고 추위를 대비해서 긴 바지와 잠바를 비롯하여 얇은 여름옷과 수영복, 선글라스, 선크림, 샌들, 운동화 등등을 챙겼다. 그리고 여행 중 읽을 책들을 골랐다.
호주가이드북과 뇌졸중을 앓고 계신 선생님을 생각하며 다자이오사무의 <사양>, 마루야마겐지의 <물의 가족> 그리고 빌헬름 뮐러와 기형도의<잎 속의 검은 잎>과 이태준의 <무서록>,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여러 시인들의 시를 모아놓은 시집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삼중당판으로 하나사서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사진과 더불어 소리로 이 여행을 기록하려면 보이스레코더를 사야했다. 배낭이 제법 땅땅해졌다.
TV에서는 개표방송을 하고 있었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기자회견을 하는 그의 모습이 기존의 대통령들과 다르게 겸손하면서도 순박해 보였다. '고생한 당원들의 손을 잡아보고 싶다'는 그의 말이 더 따뜻하게 들려왔다. 멍하니TV를 보다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하나씩하나씩 챙겼다.
내일이면 떠난다고 메일을 보내고 누웠는데 엄마가 갑자기 '아무래도 김치를 가져가야 하지 않겠느냐' 고하신다. 나는 세관신고를 하기 싫어서 라면도 뺐는데... 어차피 신고를 할 바에야 라면, 김치, 김 등의 밑반찬을 챙겨서 다시 짐을 쌌다. 눈 떠 보니 아침이었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노무현 후보의 환희 웃는 얼굴 위로 '바보 노무현, 대통령 되다'라고 인쇄된 신문이 문간에 있었다. 이렇게 안과 밖의 경계(境界), 문(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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