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옥 그가 언론보도에 나타나면 어느 새 버릇처럼 명가(名家)라는 춘추전국 시대에 논리학에 밝았다던 공손 룡(孔孫 龍)을 생각하게 되는 버릇이 생겼다.
명가란 지나간 중국 제자백가의 학파로 요즘으로 말하자면 중국의 궤변학파였다.
그들의 논리는 일러야 하는 개념(名)과 실체(實)가 항상 일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좀 더 수사한 말의 기교가 숨쉬는 그런 개념을 불어넣어 다소 논리학을 발전시켰다고들 전한다.
그의 발언을 살피게 되면 곧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던 적 사고에서 모든 것을 찾아내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것은 기존 인식에서 시작하지 않고 인식은 길 들여진 주관에 의해, 소위 그들의 매도(賣倒)된 청중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고, 또 그가 이해 하는 명가의 논리인라는 것은 사실은 말(馬) 전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말(馬)을 한정한다는 논법으로 보면 맞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이며 변설로써 평등을 주장한 그들 학설이 새대를 살 수 없었던 근본이유였다.
그의 연설을 듣는 현명한 청중이라면 그의 말을 꺼꾸로 들어보면 가장 이치에 적합한 지를 곧 알게 된다.
한 예를 들자.
어제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너무 많이 알아서 도덕적 결론에 변함이 없다는 말을 했다.
역으로 해석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논리가 없어서 결론에 주저한다는 것으로 연역적으로 답을 안겨주는 말이였다.
왕조시대였으면 사약(死藥)을 받을 말에나 해당한다.
그의 말을 한 번 더 빌려 보자.
"노무현이 보기 싫어서, 노무현에 대한 증오 때문에 국가를 증오하는 짓을 하는 미친 사람들이 어디 있나?"라고 했다.
이런 표현은 그가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다.
월드컵 축구가 한창이던 1998년 그는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한 적이 있다.
" 정치를 잘하고 할 짓을 제대로 해야지, 우리나라가 축구만 잘해서 뭐하냐?. 우리나라가 브라질 같은 나라가 되어야 되겠느냐?"
그의 말은 현란해서 곧잘 청충이 그의 표현에 계속적인 충격을 받으면서 인식이라는 출구를 그의 결론에 내맡기게 되는 궤변에 문제가 있다.
세상 어디에도 한사람으로 인해 나라를 증오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그런 가설을 세우는 데 특별한 재능을 보인다.
그것을 그는 현재 가장 보편적 거명의 대상에서 선택해서 가장 쉽게 인식될 수 있는 사물과 그 선택된 개념을 전이(轉移)시켜서 자기의 논거를 확대 해석토록하는 말의 기교를 보이고 있다.
축구에서 바로 상상이 되는 브라질과 한국이라는 선택된 단어에 정치라는 것을 개입함으로 국민이 우매하다는 뜻으로 월드컵은 실제 그가 사용하는 시각적 언어로 존재한 것이다.
또 다른 특유한 점을 보면 그가 주장하는 것에 대한 기정사실화하는 데 빠른 판단력을 보이는 데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주장에 대한 근거가 희박하면서도 상대방의 결론을 꺼꾸로 추출하여 반대쪽 결론에 대해 휘초리를 드는 것은 그가 연설을 할 때 이용하는 토피카(Topica)의 전형적인 예라고 보여 진다.
사실 그의 철학적 근거는 처음부터 노자(老子)사상을 따라왔었고 그의 행동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고 봐아야 한다.
그는 개신교를 전공했지만 머물지 못했던 근본 이유가 바로 그의 철학이 주는 자유에 기초한 것이였다.
그의 배움에서 나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매력에 그는 상위학문이라고 말하는 신학을 포기하고 대신 도교(道敎)이론을 따라나선 것이다.
노자의 근본이론은 그가 알고 있듯이 무위자연(無爲子然)이며 그의 말의 전부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자연주의(自然主義)라고 부르는 거기에서 그의 처신은 현재 유위(有爲)하고 있는 편이라 보아야 한다.
그의 생각은 소위 무정부주의적 니힐리즘이라고 평해야 하기 때문에 정부이건 정치건 기업주의나 심지어 스포츠까지도 무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어쩜 자명한 일이다.
그가 선택한 소피스트(Sophist)의 길이 우리에게 준 것은 삶의 질보다는 정신적 판단의 자유로 인해 편안함을 준 것에는 인정을 한다.
그러나 그의 철학 자체가 현실성 있는 것인지는 그도 마찬가지로 결론에 주저하지 않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우리가 인식한 것보다는 더 많은 개념이 존재하며 실체는 나중에야 발견된다는 것에서 중세 로마 기독교가 신성(神性)에 위반하는 철학을 용인해준 그는 알아야 된다.
엔터테이너로서의 김용옥 ....
어떤 사람도 장단점이 있다. 그나마 김용옥이 이 정도로 큰 바람을 일으키는 것도 다 그에게 엄청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이 아무리 지랄해도 누구 하나 관심을 기울이겠는가.
김용옥이 벌써 20년 가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다 그가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따라서 나는 그저 그를 애정스런 시선으로 지켜볼 뿐이다. 물론 그가 죽는 그 날까지 정신차리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도 언젠가는 철이 들 것이라 믿는다.
나는 이 나라 그 어느 영혼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내가 똥 오줌 가리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크게 된 것 처럼, 김용옥도 언젠가는 잘 할 것이라 믿는다.
근데 김용옥이 정말 역겨운 짓을 많이 했다. 위의 어느 분이 말한 것처럼 고려대 출신들이 별로 기분 좋을 것 같지는 않다. 하하하.
시대의 조류를 타고...
도올 김용옥이 자칭 사상가로 말하고 있지만 시대의 조류를 타고 넘실대는 권력에의 아부를 감추기는 힘들다. 우리시대 사상가라 할라치면 고함석헌옹이 유일한 사상가가 아닌가 한다. 민중과 호흡하고 시대의 고민에 생을 불사르며 시대의 정신을 밝혀준 양반이 바로 고함석헌옹이었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을 앞세운 독재와 그 경제개발마저 지역적 계층적 차별로 말미암아 한국의 고질적 구조적 문제를 잉태시킨 정권의 부당함에 선생님은 항상 민중의 편에 서 계시었다. 시대의 부름에 응당 응하시어 픽박받는 민중을 어루만져 주시어 재민주세대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매김 하신 고함석헌옹이야 말로 진정한 사상가이자 민중의 정신적 지주였던 분이셨다. 선생님은 민중의 아픔을 달래고 어루만지려다 권력의 눈밖에 나서 감옥살이도 오랫동안 하신 진정한 민중의 길잡이 역을 하시었던 분이다.
김용옥은 자칭 사상가라 칭하고 맹자니 노자니 떠들지만 이는 한같 지식인에 불과하며, 시대의 소리는 외면하면서 언제나 권력의 언저리에서 춤을 추던 광대에 불과하지 않을까 한다. 김용욱이 떠드는 맹자니 노자니 하지만 그 내용 어디에도 부당한 권력에 등을 기대고 아부하라는 소리는 없다.
김용옥이 민중의 아픔을 위해 노력하였다는 소리를 들어 본적도 없거니와 시대의 부름에 응하다가 옥고를 치루었단 소리는 더더욱 듣지도 못했다. 민중을 압박하는 세력에게 따금한 말을 하였단 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김용옥의 기인적 행태만 신문지상의 가십란으로 매운 것을 본 것 외에 그가 사상가로서 시대의 요구에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보인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김용옥은 노자니 맹자사상에는 도통한지 몰라도, 이는 자신만의 만족을 채우기 위한 개인적 욕구를 채우는 저차원적 행태이지, 소위 사상가라 칭할 정도로 시대를 이끌었던 것은 아니다. 부당한 권력을 칭송하여 그 부당성을 희석시키는 주구의 역활을 하였고, 자신의 지식을 언론매체를 통해 인기를 끌었으며, 자신의 기인적 행태로 세인의 눈길을 끈 것 외에 그가 사상가로서 민중에게 다가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김용옥이 아니더라도 부당한 권력에 기생하여, 그 권력을 칭송(?)함으로써 국민을 현혹시키고 궤변으로 부당한 권력을 옹호함으로써 그 반대급부로 개인적 부를 축척한 어용 지식인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김용옥은 단지 그들 중의 한 명일 뿐이다.
그런 김용옥이 자신이 갖고 있는 노자 맹자의 글귀를 갖고 헌재를 폄하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담고있는 헌법을 부정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쿠테타를 꿈꾸는 것이 정당한 짓이란 말인가? 놈현과 그 일당들의 헌재폄하 및 헌재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에 부화뇌동하여 또 다시 권력의 언저리에서 뇌까리고 있는 것이 옳다는 것인가? 노태우를 칭송한 그가 자신의 과거 전력에 대해 반성하였단 소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이는 그가 얼마나 권력에 추종적인 작태를 연출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가지 예에 불과하다.
요즘 씨알사상을 설파하신 고함석헌옹이 더욱 생각나는 계절이다. 갯벌에 묻혀 있다고 다 같은 진주가 아니다. 보석처럼 빛나던 고함석헌옹의 소리가 다시 한 번 우리의 가슴에 울려퍼지길 간절히 바래본다.....
김용옥 그놈은 이회충이 권력을 잡았더라면 지금 노구리를 빠는 정도를 훨씬 넘어
이회충을 빨다가 빨다가 빨다가 혓바닥이 다 닳아서 없어져 버렸을 것이다.
김우중을 빨아대고 핥아댄 글을 볼작시면 보는 사람이 낯이 간지러울 정도임.
그 녀석은 과대망상증에 열등감이 뒤섞인 거의 사이코 수준 인간임.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고등사기꾼에 소인배에 극저질인 놈임.
("노자철학 이것이다"를 보면 자기 제자가 자기를 안따른다고 온갖 음해 모욕 모략질을 한 그런 정도의 인간임.그놈 책을 보면 이런 예가 무수히 많다.)
김사이코 그 놈은 노무현이 되기 전에 요리 조리 눈치만 보던 놈이다.
물론 이회창한테 더 알랑알랑거렸으나.
(단일화 되기 전인 2002년 11월 25일 전까지는 회충이 당선 가능성이 더 높았으니까)
또 김용옥 그놈은 매스컴에 나오고 싶어서 매스컴을 타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고.
그놈 형 김용준도 김용옥은 매스컴에 나오지 않으면 불안한 강박증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지.
한마디로 전형적인 간신밑xx같은 놈이며 사기꾼 위선자라고 할 수있지.
잔노빠 쓰레기 놈은 그 사기꾼 위선자 놈이 아무리 노빠 니놈들 교주 노사기꾼을 찬양했더라도 옹호할 걸 옹호해라.
김용옥 그가 언론보도에 나타나면 어느 새 버릇처럼 명가(名家)라는 춘추전국 시대에 논리학에 밝았다던 공손 룡(孔孫 龍)을 생각하게 되는 버릇이 생겼다.
명가란 지나간 중국 제자백가의 학파로 요즘으로 말하자면 중국의 궤변학파였다.
그들의 논리는 일러야 하는 개념(名)과 실체(實)가 항상 일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좀 더 수사한 말의 기교가 숨쉬는 그런 개념을 불어넣어 다소 논리학을 발전시켰다고들 전한다.
그의 발언을 살피게 되면 곧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던 적 사고에서 모든 것을 찾아내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것은 기존 인식에서 시작하지 않고 인식은 길 들여진 주관에 의해, 소위 그들의 매도(賣倒)된 청중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고, 또 그가 이해 하는 명가의 논리인라는 것은 사실은 말(馬) 전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말(馬)을 한정한다는 논법으로 보면 맞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이며 변설로써 평등을 주장한 그들 학설이 새대를 살 수 없었던 근본이유였다.
그의 연설을 듣는 현명한 청중이라면 그의 말을 꺼꾸로 들어보면 가장 이치에 적합한 지를 곧 알게 된다.
한 예를 들자.
어제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너무 많이 알아서 도덕적 결론에 변함이 없다는 말을 했다.
역으로 해석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논리가 없어서 결론에 주저한다는 것으로 연역적으로 답을 안겨주는 말이였다.
왕조시대였으면 사약(死藥)을 받을 말에나 해당한다.
그의 말을 한 번 더 빌려 보자.
"노무현이 보기 싫어서, 노무현에 대한 증오 때문에 국가를 증오하는 짓을 하는 미친 사람들이 어디 있나?"라고 했다.
이런 표현은 그가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다.
월드컵 축구가 한창이던 1998년 그는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한 적이 있다.
" 정치를 잘하고 할 짓을 제대로 해야지, 우리나라가 축구만 잘해서 뭐하냐?. 우리나라가 브라질 같은 나라가 되어야 되겠느냐?"
그의 말은 현란해서 곧잘 청충이 그의 표현에 계속적인 충격을 받으면서 인식이라는 출구를 그의 결론에 내맡기게 되는 궤변에 문제가 있다.
세상 어디에도 한사람으로 인해 나라를 증오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그런 가설을 세우는 데 특별한 재능을 보인다.
그것을 그는 현재 가장 보편적 거명의 대상에서 선택해서 가장 쉽게 인식될 수 있는 사물과 그 선택된 개념을 전이(轉移)시켜서 자기의 논거를 확대 해석토록하는 말의 기교를 보이고 있다.
축구에서 바로 상상이 되는 브라질과 한국이라는 선택된 단어에 정치라는 것을 개입함으로 국민이 우매하다는 뜻으로 월드컵은 실제 그가 사용하는 시각적 언어로 존재한 것이다.
또 다른 특유한 점을 보면 그가 주장하는 것에 대한 기정사실화하는 데 빠른 판단력을 보이는 데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주장에 대한 근거가 희박하면서도 상대방의 결론을 꺼꾸로 추출하여 반대쪽 결론에 대해 휘초리를 드는 것은 그가 연설을 할 때 이용하는 토피카(Topica)의 전형적인 예라고 보여 진다.
사실 그의 철학적 근거는 처음부터 노자(老子)사상을 따라왔었고 그의 행동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고 봐아야 한다.
그는 개신교를 전공했지만 머물지 못했던 근본 이유가 바로 그의 철학이 주는 자유에 기초한 것이였다.
그의 배움에서 나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매력에 그는 상위학문이라고 말하는 신학을 포기하고 대신 도교(道敎)이론을 따라나선 것이다.
노자의 근본이론은 그가 알고 있듯이 무위자연(無爲子然)이며 그의 말의 전부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자연주의(自然主義)라고 부르는 거기에서 그의 처신은 현재 유위(有爲)하고 있는 편이라 보아야 한다.
그의 생각은 소위 무정부주의적 니힐리즘이라고 평해야 하기 때문에 정부이건 정치건 기업주의나 심지어 스포츠까지도 무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어쩜 자명한 일이다.
그가 선택한 소피스트(Sophist)의 길이 우리에게 준 것은 삶의 질보다는 정신적 판단의 자유로 인해 편안함을 준 것에는 인정을 한다.
그러나 그의 철학 자체가 현실성 있는 것인지는 그도 마찬가지로 결론에 주저하지 않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우리가 인식한 것보다는 더 많은 개념이 존재하며 실체는 나중에야 발견된다는 것에서 중세 로마 기독교가 신성(神性)에 위반하는 철학을 용인해준 그는 알아야 된다.
"법 위에 사람없고 사람 위에 법 없다"라는 헌재의 판결에 대한 그의 촌평은 보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