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3세, 아프리카 제국에 어떤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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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3세, 아프리카 제국에 어떤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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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왕에 즉위 한 찰스 3세는 과연 아프리카에서 영국의 과거 범죄에 대해 사과를 할 것인가?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뒤를 이어 국왕에 즉위한 찰스 3세(King Charles III) / 사진 : 뉴스사이트 비디오 캡처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뒤를 이어 국왕에 즉위한 찰스 3세(King Charles III) / 사진 : 뉴스사이트 비디오 캡처

70년 동안 영국의 군주제를 통한 우아하고 온화하며 다정하게 보이는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로 그 후임으로 영국 국왕에 즉위한 찰스 3(King Charles III)는 개인적인 견해를 표출하는데 거침이 없다.

국왕에 즉위한 찰스 3세는 과연 아프리카에서 영국의 과거 범죄에 대해 사과를 할 것인가?

찰스 3세는 지난 10(현지시간) 옛 영국 식민지들과 다른 곳들에서 고인(故人)이 된 엘리자베스 2세 여왕(Queen Elizabeth II)이 대영제국 아래에서 자행된 범죄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면서, 고대의 화려함으로 가득 찬 국왕 즉위 의식에서 영국의 새로운 군주로 공식 선포됐다.

엘리자베스와는 달리 찰스 3세는 영국 정치에서 항상 중립을 지키지는 않았다. 지난 2004년부터 정부 장관들에게 손으로 쓴 그의 검은 거미(black spider)’라는 메모는 그가 참견하는 군주(meddling monarch)’가 될 것이라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찰스는 영어와 역사 과목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확장하고, 이라크에 있는 군대에 더 많은 장비를 공급하며, 파타고니아 메로(Patagonian toothfish)의 어려움을 포함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로비를 벌였다.

어머니(엘리자베스 2세 여왕)와 달리 찰스는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을 드러내는 발언을 참기에는 어려움을 겪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지난 6월 찰스는 아프리카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Kigali)에서 열린 영연방 정상회의(Commonwealth summit)’에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대신해 참석했다.

그가 키갈리 방문 2주 전 타임스 오브 런던(Times of London)은 그가 르완다 망명 신청자들을 보내려는 영국 정부의 계획에 대해 끔찍하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보도대로 라면, 찰스의 발언은영국의 현대 헌법 하에서 군주는 국가원수로서 의례적이고 왕실은 국가 문제에 대해 공정해야 하기 때문에, 영국 정치인들의 분노를 샀다.

찰스의 그 같은 발언 개입은 영연방이 노예제도의 유산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게 된 첫 번째였다. 영연방 56개 회원국은 이전 영국 식민지로 구성됐었지만, 르완다와 같은 다른 나라들은 그 이후 가입했다. 찰스는 나는 노예제의 오래 지속되는 영향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면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한 데 대해 개인적인 슬픔의 깊이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찰스는 영연방 기구의 뿌리(roots of our contemporary association)”도 역사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있다고 시인했다.

15~19세기 동안 영국을 비롯해 유럽의 국가들은 아프리카 사람들 1000만 명 이상을 노예로 만들어, 대서양을 건너 카리브해 지역과 아메리카 대규모 상업농장(plantation)으로 짐짝 다루듯이 수송, 노역을 시켰다. 그러한 과정에서 다수의 아프리카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영연방정상회의에서 카리브해 지역 일부 국가들은 보상 문제를 포함해 노예제도의 유산을 논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러나 당시 찰스 왕세자는 보상에 관해서는 일절 말을 꺼내지 않았다.

찰스는 당시 만일 우리가 모든 시민들에게 이익이 되는 공동의 미래를 만들어내려면, 우리도 우리의 과거를 인정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 때가 온 것이라고 말했었다. 찰스가 영국 제국주의 과거에 대해 언급을 한 것은 르완다 키갈리 발언이 처음이 아니다. 2018년 아프리카 가나를 방문했을 때,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trans-Atlantic slave trade)잔혹행위(atrocity)’였다고 찰스는 말했다.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최초의 아프리카 국가(북아프리카 제외)인 가나에서 그 성명을 발표한 것은 대단한 상징성을 가진 것이었다.

1945년 영국에서 열린 제 5차 범아프리카회의(the Fifth Pan-African Congress)에서 케냐의 초대 대통령이 될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와 후에 가나의 초대 대통령인 콰메 은크루마(Kwame Nkrumah)와 같은 대표단이 탈식민지 시대를 열면서 서양 세계가 여전히 무력으로 인류를 지배하기로 결정한다면, 아프리카는 최후의 수단으로, 자유를 얻기 위해 무력에 호소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유로워지기로 결심했다.”며 군주제 영연방에서 공화제의 자유를 갈망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물론 영국 정치인들 사이에서 가나 역사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점은 1961년 독립 후 여왕이 국빈 방문 때 흑인도, 개도, 아일랜드인도 없다(No blacks, no dogs, no Irish)”고 하는 포스터가 여전히 문에 붙어 있는 가운데, 은크루마와 함께 한 상징적인 춤이다.

가끔 언급되지 않는 것은 영국이 가나 독립 지지 정치 신문을 금지하고, 편집자들을 투옥했다는 것이다. 케이프코스트 데일리 메일(Cape Coast Daily Mail)의 편집장이자 후에 가나의 첫 번째 국방부 장관인 코피 바코(Kofi Baako)는 그의 기사 우리는 자유를 요구한다(We Call for Freedom)”가 출판된 후 선동죄로 투옥됐다. 은크루마 자신은 1950년 아크라에서 영국 통치에 반대하는 비폭력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영국의 노예무역 기지였던 포트 제임스(Fort James)1년 동안 수감됐다. 은크루마의 지도 아래 가나인들은 영국 상품에 대한 일련의 파업, 폭동, 보이콧에 착수,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오늘날, 영국의 군주는 더 이상 14개의 이전의 아프리카 영토에서 국가 원수가 아니다.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몇 달 만에 케냐의 키쿠유 소작농들을 중심으로 한 무장독립운동 단체가 시작한 반()식민지 마우마우 운동(Mau Mau movement)을 분쇄하는 과정에서 1952년부터 1960년 사이에 영국 당국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진 1,000명 이상을 포함해 최소 11,000명의 마우마우(키쿠유족)가 살해됐다.

케냐 인권위원회는 9만 명의 케냐인이 처형, 고문 또는 불구로 사망했으며, 16만 명이 구금된 것으로 추산했다. 2013년 그것은 영국 정부를 고소했던 5,000명의 케냐 고문 피해자들이 나눈 1,990만 파운드(20133,100만 달러-4315,200만 원)의 보상금으로 이어졌다.

비록 아프리카 국가들이 영연방을 떠날 가능성은 낮지만, 우간다 수도 캄팔라(Kampala)에 기반을 둔 정치 분석가 니콜라스 센고바(Nicholas Sengoba)가 우간다의 데일리 모니터(Daily Monitor) 신문에 썼듯이, 이 블록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영국에 계속 의존하도록 고안된 국제 통화 시스템의 지속적인 유산이다.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엘리자베스 여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안, 아프리카 전역의 소셜 미디어(SNS) 작가들은 영국 정부가 평화적인 권력 이양에 대해 홍보한 깨끗한 역사 버전을 채택하는 데 별로 열의가 없고 시큰둥했다. 네스린 말릭(Nesrine Malik)은 가디언에 "태양은 제국에 지지 않았다. 점령은 종종 유혈전쟁에서 쫓겨났다. 여왕은 떠났고, 그녀와 함께 우리의 상상 속의 나라로 가야 한다고 적었다.

어떤 댓글은 신경에 거슬리는 것도 있었다. 트위터는 나이지리아 태생의 카네기 멜론 대학(Carnegie Mellon University)의 우주 아냐(Uju Anya) 교수가 여왕이 도둑질하고 강간하는 집단 학살 제국(thieving raping genocidal empire)’을 총감독한 것에 대해 극심한 고통을 바란다는 게시물을 올렸다가 삭제하기도 했다. 이 트윗은 그녀의 대학, 영국 대중, 그리고 아마존의 억만장자 설립자인 제프 베이조스(Jeff Bezos)의 비판에 직면했다.

영국 군주제(British monarchy)는 여전히 식민지의 부()로부터 이익을 얻고 있다. 동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국가에서 약탈한 여러 보물들은 여왕의 왕실 소장품 중 일부이며, 여왕은 반환을 거부했고, 찰스는 상속을 받았다. 불가피하게 이들의 귀환에 대한 외침은 배가될 것이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여왕의 왕관과 왕좌에 앉았던 컬리넌 다이아몬드(Cullinan diamonds)’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 있다. 남아공 전통지도자대회가 애도를 표하면서도 "복잡한 심정"을 고백했다. 컬리넌 다이아몬드는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로 1905년 남아공 북동부의 트란스발 주(Transvaal)에서 발견되었을 당시의 원석은 3,106캐럿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찰스는 군주제를 현대화할 필요성을 시사했다. 자신의 유산을 조각하면서, 찰스는 영연방을 그의 기후 행동주의, 도시 계획, 그리고 젊은이들의 교육, 주변의 아이디어를 홍보할 수 있는 잠재적인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영국의 100만 명의 취약한 젊은이들을 도왔던 그의 자선단체인 프린스 트러스트(The Prince's Trust)의 프로그램들은 이제 가나, 르완다, 케냐, 그리고 미국으로 확장된다.

국왕으로서의 첫 연설에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지 않고 헌법 원칙을 고수하겠다고 서약하면서, 자신에 대한 비판의 일부를 다루었다. 찰스는 2018BBC 인터뷰에서, (정치적) 문제에 대한 발언 개입을 계속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난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찰스가 그의 어머니가 유지했던 냉정을 유지하는 객관성으로 전환하는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서식스 공작부인(Duchess of Sussex) 메건(Meghan)의 주장 이후, 찰스 왕세자의 낮은 인기와 왕실 내 인종 차별에 대한 비난은 아프리카에서 군주제와 제국에 대한 반대 대화가 증가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찰스는 그 토론을 근본적인 문제로 언급했지만, 영국의 식민지 과거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에는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다.

요하네스버그에 기반을 둔 정치평론가 타피 음하카(Tafi Mhaka)찰스는 불가피하게 케냐인들과 나나 아쿠포아도(Nana Akufo-Addo) 가나 대통령이 요구해온 식민지화의 결과로 인한 왕정의 부()와 배상금에 대한 질문을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찰스는 이제부터 그의 개인적인 견해를 발표하는 것에 대해 확실히 조심할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더욱 더 거침없이 말하는 왕(outspoken king)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군주제의 명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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