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탈레반과 제국의 악령(惡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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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탈레반과 제국의 악령(惡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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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서양은 자유를 사랑하는 만큼 괴물도 사랑한다. 테러와의 전쟁은 종종 동화처럼 전해지는데, 무슬림 여성들을 곤경에 처한 소녀로 묘사하고, 백인 기사들은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용감하게 잔인한 싸움을 벌인다. 서양은 매혹적으로 괴물을 격퇴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들이 만든 폭력을 숨긴다. (사진 : 유튜브)
결론적으로 서양은 자유를 사랑하는 만큼 괴물도 사랑한다. 테러와의 전쟁은 종종 동화처럼 전해지는데, 무슬림 여성들을 곤경에 처한 소녀로 묘사하고, 백인 기사들은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용감하게 잔인한 싸움을 벌인다. 서양은 매혹적으로 괴물을 격퇴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들이 만든 폭력을 숨긴다. (사진 : 유튜브)

2021815. 20년 동안 최장기 전쟁을 치른 세계 최강의 나라 미국이 처참하게 패퇴하고 아프가니스탄을 빠져 나오기 시작한 날이다. 미국의 아프간 전쟁 참패의 날로 기록될 것이다.

당초 미국 정보기관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아프간 탈레반(Talban)은 거의 전국토를 장악하고, 수도 카불의 대통령궁을 점령, 아프간 정권을 장악했다.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아무런 말도 전한 것 없이 현금 약 2000억 원(19천 만 달러 이상)을 챙겨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으로 탈출했다.

UAE는 가니 아프간 대통령을 인도주의 차원에서 입국을 허용했다며 가니 대통령의 자국 체류를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강제로 도망친 것이 아니며, 수도 카불 상황이 급박해 돈도 챙기기 못하고 몸만 빠져 나왔다고 주장하며, 아프간으로 다시 되돌아 갈 것이라고 적기는 했다. 누가 봐도 무능하고 부패한 지도자, 겁 많은 인간의 변명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것에 대한 지배적인 이야기는 아프간인들이 겪은 수십 년 간의 '제국주의적 폭력(imperial violence)'을 지워준다는 것이다. 서방 세계의 눈으로 본 아프간은 아니다. 그러나 이중성을 보여 온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세력 탈레반은 이슬람율법에 따라 특히 여성을 대우하겠다는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인권침해는 물론 여성의 생명까지 경시하고 있다. 제국주의적 폭력을 지우고 그 자리에 '이슬람적 폭력(Islamic violence)'을 가져다 놓는 셈이다.

제국주의적 폭력과 이슬람적 폭력의 차이는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남녀 구분 없는 천부인권,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 속에서의 폭력과 태생적으로 여성의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 짐승과 같이 취급하는 성향의 탈레반의 종교 속의 폭력은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정치적 폭력, 정신분석, 법과 다른 정치에 초점을 둔 호주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학자 사하르 굼호르(Sahar Ghumkhor)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전쟁, 군사화, 인종화를 중점적으로 공부를 하는 사회문화인류학자이자 미국 UC버클리의 인류학부 펠로우인 아닐라 다울라짜이(Anila Daulatzai)18일 알자지라에 기고한 글에서 아프간 탈레반은 괴물회사, 제국의 악령 탈레반이라는 글을 썼다.

2001911일 미국의 심장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공격으로 2977명의 사망자와 25천 여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킨 미증유의 이른바 9.11테러를 겪은 미국이 그해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시작된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 20주년은 미군 철수와 탈레반의 카불 복귀로 기록된다. 어떤 면에서는 2001년으로 돌아가고 어떤 면에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8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3700만 명 이상이 추방됐다.

미국이 예상하지 못한 재빠른 속도로 아프간을 장악한 탈레반의 등장과 어느 면에서는 허무할 정도로 참패를 당한 미국 사이에 수많은 일들이 며칠 사이에 벌어졌다. 이번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일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탈레반의 승리 ? 미국의 완전한 패배 ? 그렇다고 해도 아프간의 미래는 ? 많은 질문이 쏟아진다.

미국은 아프간 탈레반을 인정하고 과거와 다른 연대 가능한 탈레반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니면 조 바이든 대통령이 오바마 전 대통령 시절 부통령의 자격으로 아프간을 방문, 현지 고위관료와 식사 과정에서 냅킨을 내던지며 불쾌해 했고, 아프간 지도부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으로, 지금도 아프간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어, 아프간은 아예 포기를 해야 하는 것인지... 질문이 꼬리를 문다.

교육을 받을 수도 없는 처지, 얼굴을 드러내지도 못하는 상황, 어찌 보면 남성들의 부속물 여성들로 취급받아온 탈레반 통치에서 2001년 이후 미국의 아프간 침공으로. 폭력은 인식하지 못한 채, 인권을 말하고, 자유를 표방하며,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미 백인 페미니스트를 추앙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탈레반이 20년 만에 복귀하자 아프간은 아예 아비규환이 되고 있다. 탈레반의 폭력과 살인에 비해 제국주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또 다른 질문이 생겨난다.

#파키스탄 제재(#SanctionPakistan)을 향한 아프간 소셜 미디어 캠페인은 미 제국의 역할을 모호하게 하고 의도치 않게 백인의 결백을 조장하는 것일까?

사하르 굼호르와 아닐라 다울라짜이는 “#파키스탄 제재 캠페인은 탈레반에 물질적인 지원을 제공하고, 악랄하게 (아프간) 난민에 대한 인종 차별을 하고, 파키스탄의 파슈툰(Pashtun : 아프간족)과 발로흐(Baloch)족들에게 국가가 지원하는 탈레반 폭력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히도록 방치한 수십 년간의 파키스탄 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미국 제국의 결백을 입증하는 것일까?”라고 묻는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보도는 장치가 잘 된 서방 세계의 언론 환경이 그곳을 서방의 잣대로 비추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후에 스크린에 제멋대로 재단이 된 아프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거리가 뒤죽박죽 뒤섞여 나올 것이다. 탈레반이 유화적이고 자유와 민주, 인권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미국을 대하지 않는 한 이들은 더 악랄한 테러리스트 집단에 불과할 것이다. 탈레반은 지금까지 테러리스트라는 딱지를 받아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두 명의 기고자는 이번 아프간 사건을 두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대중의 혼란은 단순히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분석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어려운 질문을 하고 전제들을 탐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 독재국가, 공산국가, 민주적(?) 독재국가든 국민과 엘리트 지도층과 괴리가 크면 클수록 국민들은 도외시 당한다.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는 마치 직접민주주의인 것처럼 지도층과 국민들 사이가 가깝고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 시대는 소셜미디어(SNS)라는 잘 만들어진 소통 창구들이 많다. 제대로 활용하면 엘리트 지배층과 국민 사이의 가교가 된다.

아프가니스탄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문제는 아프간의 엘리트 계층들은 자신들의 투자와 전쟁이익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국민은 물론 정적이라 할 반()탈레반 활동에도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의 전쟁 이익 챙기기(war-profiteering)’가 두드러진 본보기이다. 전쟁까지도 투자의 호재(favorable factors of Investment)로 이용하는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 아프간 엘리트 지배 계층으로 보인다.

반제국주의적(anti-imperial) 분석과 테러와의 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말해왔듯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비판적 이론화를 제시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는 아프간 국민에 대한 배신감을 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연구에서 백인성(whiteness)과 국정운영기술에 관한 지정학적 접근방식은 오랫동안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지식 생산에 있어 수많은 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두 기고자는 말했다.

백인성은 유색인종을 억압을 함으로써 발생하는 강제 집단 구성원들을 뜻하며, 백인 죄책감과 수치심은 때로는 비난, 책임의 전가, 공격성 및 기타 형태의 적대감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백인성의 개념은 노예시대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노예와 다른 자신의 정체성을 대조하는 방법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는 누가 특권을 가지고, 누가 재산의 가치가 많은지 또는 2, 3등 시민이지 등을 정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층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고안된 백인성(whiteness)이 고안됐다고 한다. 물론 이 백인성은 인종의 개념 측면에서는 사회적으로 더 이상 법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의식 속에 면면히 흐르면서 사회적으로 작용하는 개념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20218월 현재의 비상상황의 순간, 아프간의 탈레반이나, 이른바 제국주의의 맛을 본 아프간 국민, 그리고 백인의 서방세계의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탈레반의 주권, 아프간 일반 국민들의 주권, 점령자의 주권, 지난 20년간의 미국의 점령, 그 이전 10년 간의 옛 소련의 점령, 그 이전 19세기에 영국과의 전쟁 등은 아프간인과 아프간 탈레반에게 어떤 주권이 있었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 두 기고자의 주장이다. 피점령지의 주민들의 주권은 송두리째 무시돼도 되는 것인가. 그래서 그들의 주권은 사라져 버린 것일까?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인기를 과시하기 위해 지난 며칠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던 여유를 과시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은 아프간 사람들이 자신들의 무기와 차량을 탈레반에 너무 흔쾌히 내맡긴 채, 충성심은 부족하고 항복한 나쁜 전사들이기 때문에제국주의적 전략을 쓰고 있다는 주장이다. 누가 아프간 사람들이 단순히 전쟁 때문에 죽는 것에 지쳤다고 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프간 전쟁은 아프간 사람들의 전쟁은 결코 아니다.

피점령지 사람들의 눈에는 제국주의, 혹은 백인성이 강조되는 가운데, 사회의 겉모습은 낭만적인 외국 직업군의 제공으로 학교에서 여학생, 일하는 여성, 또는 음악, 패션 또는 스케이트보드를 듣는 즐거움을 나타내는 표피적이고 기만적인 지표들이 제공된다. 파리나 런던, 뉴욕에서 즐기는 것들을 똑 같이 아프간에서도 즐기며 대등한 삶을 사는 것처럼 포장되기 일쑤다.

그러한 감상적인 사회상 속에서 아프간 사람들은 인도주의(humanitarianism)’의 형태로 인지할 수 있는, 인지할 수 없는 층층 쌓인 폭력에 시달려왔다는 점이다. 200110월 침략이라는 미국 주도의 첫 번째 폭력(전쟁) 행위는 치유의 행위(Act of Care)로 묘사되어 왔다.

전쟁에 대한 이러한 부차적인 주장이 아프간 논평가들과 개발을 지지자들에게 다시 나타나, 미국의 철수를 배신과 실망이라고 비판하고 나선다.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는 원주민을 통치하는 것이라는 포장이다.

인도주의와 진보, 폭력의 뒤엉킨 교차점을 연구하고 설명하기 위해 기고자들은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전쟁미망인들과 함께 아프간 수도 카불 전역의 월별 배급 현장으로 갔다고 한다. 식량 배급에 의존하는 여성들은 부족한 인도주의적 돌봄을 위해 서로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지원하는 미망인의 수는 줄고 있었고, 직업에 첨부된 신자유주의적인 지원(원조)라는 명분으로 점차 폐지되었고, 결국 미망인들은 기초식품을 위한 하찮은 일만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카프카에스크 연습(Kafkaesque exercise)에서 미망인들은 매달 그들에게 주어진 똑같은 질문에 답함으로써 그들의 도움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 프라하 태생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작품에서 나온 말로 카프가에스크는 관료주의와 관련하여 불필요하게 복잡하고 실망스러운 경험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이다. 노회화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혼을 짓밟는 관료적 기계를 끌어들여 못된 관료주의를 꼬집었다.

몇 번이고 그들은 전쟁미망인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치열하게 그들의 삶을 표현하도록 요구받았고, 그것은 그들의 미망인들의 매월 해야 하는 스테레오 타입(stereotype)이다.

한 미망인은 탈레반이 남편을 죽였다고 말하면,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소련군이 우리 남편을 죽였다고 해도, 1990년대 카불전쟁에서 남편이 죽었다고 해도, 우리 남편이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젊어서 죽었든 스트레스나 헤로인 복용으로 죽었든 상관하지 않는다. “무조건 탈레반이 우리를 미망인으로 만들 경우에만 신경 쓴다고 여성들은 말했다. 철저하게 탈레반은 서방세계의 주적(主敵)이어야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상황이다.

탈레반이 어떻게 그들의 남편을 살해했는지에 대한 허구적인 이야기일지라도 두 여성은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남편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세월과 자녀들의 나이 등이 일치하도록 모든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고, 따라서 탈레반에 의한 남편의 죽음은 믿을 만한 것이었다.

탈레반 이전에는 적어도 17년의 폭력과 전쟁이 있었지만,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경험했던 폭력의 지속 기간은 제국주의적 인도주의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폭력의 개인적, 사회적 이력은 지워지고 탈레반에 의한 폭력만이 인정되었다.

40년 연속된 전쟁에서 미망인이 된 여성들은 점령국가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얻기 위해 전쟁과 폭력으로 그들의 친밀한 역사를 바꿔야 했다.

탈레반은 사람을 살해하고, 과부(미망인)를 만들고, 더 많이 만들 것이다. 그러나 탈레반의 폭력은 병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두 기고자의 주장이다.

폭력은 미국,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이스라엘, 옛 소련, 영국, 유럽, 아프가니스탄 꼭두각시 지도자들과 지휘관 등 모두가 출중한 배우들이었다. 이들 배우들은 비정상적인 기만과 배신을 정상인 것처럼 연기를 해온 것이다. 이들 모두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폭력을 촉발시켰다.

전 세계를 테러의 근원을 흩트려놓음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의 경우처럼 테러에 대한 책임을 개별적인 폭발 가능 장소나 지역으로 국지화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탈레반은 이러한 세계적 책략의 잔재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세계적 책략 속에서 무지하게 살아온 아프간 사람들은 분명히 탈레반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설령 알고 살아왔고 해도, 권력도, 힘도, 돈도 없는 일반인들이 책임질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탈레반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특정한 폭력이 완전히 가려지고 지워지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과부는 생존을 위해 폭력의 역사를 다시 쓰도록 되어 있다. 지역사회는 모든 아프간 남성들을 잠재적인 무장 세력으로 간주되고, 모든 아프간 여성들을 현대국가전쟁이라는 악의 진부함(banality of evil) 속에서 구해져야 한다는 등 집단적 용의자로 간주되어 공포에 질리게 된다.

두 기고가는 또 묻는다. 아프간 탈레반에 의한 죽음이 많은가, 점령군인 미군에 의한 죽음이 더 많은가? 미국의 무인기 공격으로 인한 아프간인들의 죽음, 미 중앙정보국(CIA)이 훈련하고 자금을 지원한 아프간 민병대의 죽음, 대부분의 범죄 지휘관과 그들의 민병대, 그리고 그들을 수용한 아프간 국가에 의한 죽음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탈레반 전사들의 유독성의 남성성은 억제되지 않은 백인 폭력, 백인 점령, 백인 고문, 백인 드론보다 더 독성이 있다. 그들의 폭력은 비현실적으로 일어나는 폭력이며, 서양과 달리 야만적이고, 의도적이고, 후회조차 없는 폭력이다. 그들의 폭력은 야만인과 현대인, ‘우리그들의 경계를 설정하는 폭력이다.

왜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폭력의 논리가 비논리적이 아니라, 불법적이고, 탈레반 폭력처럼 혐오스럽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탈레반에 대한 지배적인 이론들은 탈레반을 폭력적으로 병적인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로 묘사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지방의 반란군에 속한다는 점에서도 인종 차별화를 꾀하고 있으며, 항상 남쪽 지방의 보수파인 파슈툰(Pashtun)에게 되돌아가는 탈레반은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제멋대로 구는 후진적인 존재이다.

테러의 시체 더미와의 세계전쟁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최근 호주와 영국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보고서는 백인 남성들이 원했듯이, 아프가니스탄이 살육의 장(killing field)으로 자리 잡았고, 백인의 무죄, 백인의 구원, 그리고 세계적 영향력을 계속 과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서양 폭력은 문화인류학자 탈랄 아사드(Talal Asad)로부터 차용한 것으로 살인적인 흔적에도 불구하고 의도하지 않고 이성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가장 중요한 의도는 항상 정당하다. 전범은 영웅으로 남는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서양은 자유를 사랑하는 만큼 괴물도 사랑한다. 테러와의 전쟁은 종종 동화처럼 전해지는데, 무슬림 여성들을 곤경에 처한 소녀로 묘사하고, 백인 기사들은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용감하게 잔인한 싸움을 벌인다.

서양은 매혹적으로 괴물을 격퇴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들이 만든 폭력을 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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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hong 2021-08-20 14:36:50
좋은 글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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