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32) 황허(黃河, Yellow River) 문명(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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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32) 황허(黃河, Yellow River) 문명(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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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빈 교수의 ‘빛의 환타지아’]

진시황(秦始皇, The First Exalted Emperor/Qin Shihuangdi)(2/2)

진시황은 또 공명심이 강하고 낭비가 극심하였다. 그는 중국을 통일한 후 10년 동안에 다섯 차례나 천하순행(天下巡行: 시황제가 국내사정을 살피기 위해 시찰하는 것을 말함)에 올라 많은 관리와 군대를 거느리고 다녔으며 길가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서 자신의 공적을 천하에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규모 토목공사에 국력을 낭비하였고 특히 만년에는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는 등 어리석음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가혹한 법치를 수단으로 지나치게 급격히 추진된 통일정책은 인민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진시황이 황제에 오른 지 11년만인 기원전 210년 마지막 순행 도중 사망하자 그를 수행하던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趙高)는 장남 부소(扶蘇)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라는 유언을 위조하여 부소를 자살시키고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다음해인 기원전 209년 동부지역에서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라는 두 농민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진나라는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이었던 이들의 반란은 6개월 만에 평정되었으나 이를 계기로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 중국은 통일된 지 12년 만에 전국이 또다시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이들 반란군 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대했던 사람이 둘 다 초나라 출신인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였다.

한편 진에서는 기원전 208년에 조고가 이사를 죽이고 권력을 독점하여 갖은 횡포를 다 부리다가 그 다음해인 기원전 207년 2세 황제가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것을 추궁하자 황제마저 죽여 버렸다. 그리고 황제의 형의 아들인 자영(子嬰)을 내세워 황제가 아닌 진왕(秦王)이라 칭하게 했으나 자영은 조고를 죽여 버리고 진왕이 되었다가 기원전 206년 유방이 쳐들어오자 항복함으로서 진나라는 중국을 통일한지 15년 만에 망해버리고 말았다. 진의 항복을 받은 유방은 셴양에서 철수하였고 뒤이어 들어온 항우는 이미 항복한 진왕을 처형하였을 뿐만 아니라 궁전까지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 후 한왕(漢王)을 표방한 유방과 초패왕(楚覇王) 항우의 다툼에서 초기에는 항우가 월등 강대하였으나 나중에는 유방이 차차 우세해져 결국 기원전 202년 항우가 해하(垓下)의 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하자 중국은 다시 한 번 통일되었으니 유방이 바로 한나라의 시조인 고조(高祖)이다.

▲ 한고조 ⓒ뉴스타운
▲ 초패왕 항우 ⓒ뉴스타운

한(漢,Han)왕조

다시 통일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초기에는 여기저기 반란이 그치지 않아 온 나라가 뒤숭숭하였다. 그런 속에서도 한은 나라의 기틀을 차근차근 다져나가 약 60년이 지난 기원전 141년에 즉위한 무제(武帝)때에는 전성기를 맞이하여 수도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임)을 중심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무제는 만리장성을 이용하여 북방의 유목민인 흉노를 무찌르고 진시황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진시황으로 비롯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시켰는데 이러한 체제는 왕조가 계속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한 왕조 초기에는 진시황의 강권통치의 영향으로 통치층 사이에 도가사상이 지배적이었는데 무위자연의 사상은 자칫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 우려가 있어 무제는 군주와 신하 등 윗사람과 아랫사람과의 지배와 복종이라는 관계를 명확히 한 통치철학으로서의 유교를 널리 보급하여 국교(國敎, state religion)로 자리 잡도록 하였다. 또 무제는 당시 중앙아시아를 주름잡던 대월씨국(大月氏國)과 협력하여 흉노를 토벌하고자 가신(家臣, retainer)인 장건(張騫)을 대월씨국에 파견했다.

장건은 흉노를 토벌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서역(西域: 중국에서 중국의 서쪽국경과 인접한 나라들을 통칭하는 말임)에 관한 많은 정보를 무제에게 전했으며 무제는 이로서 서역에 관심을 가지고 톈산산맥(천산산맥/天山山脈, Tian Mts.) 남쪽에 있는 나라들을 정복하여 길을 개척한 것이 비단길(실크로드, silk road)이다. 이 길을 통하여 중국 특산인 비단이 서역에 전해지면서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는데 이 길을 통하여 인도로부터 불교가 들어오고 메소포타미아의 유리그릇이 사막과 초원을 거쳐 중국에 들어왔다가 한국과 일본에까지 전해지기도 하였다.

▲ 한무제 ⓒ뉴스타운
▲ 비단길 ⓒ뉴스타운
▲ 실크로드의 오아시스길 ⓒ뉴스타운
▲ 천험의요지 교하고성-신강투루판 ⓒ뉴스타운
▲ 고창고성과 화염산-신강투루판 ⓒ뉴스타운
▲ 서왕모의 전설이 깃든 천지-신강우루무치 ⓒ뉴스타운
▲ 돈황의 명사산 ⓒOliver Wild (Centre for Atmospheric Science, Univ_ of Cambridge, UK)

한나라는 서기 8년 왕망(王莽, Wang Mang)에게 망하고 왕망은 신(新, Hsin)이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이때까지를 전한(前漢, Former Han)이라고 하며 유수(劉秀, 광무제/光武帝)가 신을 멸하고 한을 다시 세웠다가 서기 220년 위(魏)에게 망할 때까지를 후한(後漢, Later Han)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400여 년간의 한나라 시대동안 중국문화의 기초가 다져졌다. 기원전 약 91년경 사마천(司馬遷: 젊은 시절 중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옛날 왕조의 기록을 수집하였고 부친의 대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이 되면서 역사서 집필을 시작했으나 기원전 99년 흉노의 포로가 되었던 친구 이능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 투옥되었음.

그는 사형 대신 궁형(宮刑: 남성을 거세시키는 형별)을 당하고 출옥한 후 집필을 계속하여 130권에 달하는 방대한 역사서 ‘사기’를 완성시켰음)이 한무제까지의 중국 2천여 년 역사를 130권에 달하는 방대한‘사기(史記, History)’라는 책으로 엮었고 서기 100년 무렵에는 채륜(菜倫)이 인류 최초로 종이를 발명했으며 현재 사용되고 있는 해서체(楷書體, regular script)도 한나라 때 완성됨으로서 한자(漢字)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채륜이 싸고 질 좋은 종이 만드는 법을 발명하자 중국의 서예와 회화는 엄청나게 발전하였으며 이 종이제조법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거쳐 유럽에까지 전해졌다. 이렇게 융성하던 한나라도 세월이 지나면서 정치가 부패하고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며 전염병까지 유행하게 되자 여기저기서 농민과 호족들의 반란이 일어나 결국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한나라의 문화는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 왕망 ⓒ뉴스타운
▲ 광무제 ⓒ뉴스타운
▲ 사마천과 사기 ⓒ뉴스타운
▲ 채륜 ⓒ뉴스타운
▲ 중국종이 만들기 ⓒ뉴스타운
▲ 해서체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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