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秦始皇, The First Exalted Emperor/Qin Shihuangdi)(1/2)
영정은 천하를 통일한 후에 최고통치자를 '황제(皇帝)'라 규정하고 진왕조의 통치가 만대에 걸쳐 지속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스스로를 첫 번째 황제라 하여 '시황제(始皇帝, The First Exalted Emperor/Shihuangdi)'라 일컬었는데 나중에는 그를 일반적으로‘진시황’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국가의 모든 정무를 직접 결재하였으며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추진하여 전국을 36개의 군(郡)으로 나누고 군 아래에는 현(縣)을 설치하는 한편 군현의 장은 황제가 직접 임면하였다. 또한 군현의 장은 본인의 출신고장에는 부임치 못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정기적인 인사이동으로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없도록 함으로서 관료가 특정지역과 밀착하여 자기세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제도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시행되었다.
또 도량형과 화폐뿐만 아니라 앞서간 수레를 따라가기 편하도록 수레바퀴의 폭까지도 통일시켰고 문자도 지역마다 다르게 사용하던 한자를 소전(小篆, small seal script)이라는 서체로 통일시켰다. 진은 관청의 수속절차나 형벌도 통일시켰으며 이런 모든 내용을 법률로 정리하여 지방 관료에게까지도 문서로 전달하는 등 이사는 비록 한비자를 죽였으나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법치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였다.
다음으로 시황제는 수도 셴양을 대대적으로 개조하여 새로운 도시로 만들고 전국의 부호 12만 호를 강제 이주시키는 한편 함양궁, 아방궁(阿房宮, Efanggong) 등 호화로운 궁전을 지었으며 함양궁에서 전국 각지로 연결되는 도로망을 확충했는데 이들 도로는 수레 여러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그는 대외정책에도 적극성을 보여 기원전 214년에 남쪽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백월(百越)을 평정한 후 4개의 군을 증설하였으며 같은 해에 다시 대장군 몽염(蒙恬)을 북으로 파견하여 흉노를 정벌하고 지금의 내몽고 하투(河套) 일대를 수복, 내륙의 백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다. 이로서 진나라는 어느 때보다 가장 넓은 국토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된 다민족 봉건국가를 건설한 영정은 유능한 정치가로 중국역사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시황의 통치시기에는 각종 부역이 많고 형벌이 혹독하였다. 백성들은 수확의 3분의 2를 세금으로 내야 했으며 이 외에도 각종 무거운 부역과 병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는 위수(渭水) 남쪽에 아방궁을 짓고 여산(驪山)기슭에 자신의 능인 수릉(壽陵: 오늘날의 진시황릉(秦始皇陵)임)을 건설하는데 거액을 쏟아 부었으며 70여만 명의 죄수들이 동원되었다.
이 능은 두 겹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능원의 남쪽에 있는데 그 크기가 동서로 485m, 남북으로 515m, 높이는 76m이다. 내부에는 황제가 잠드는 궁전 외에도 정원이나 상하수도도 갖추어져 있었으며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고 누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으로 발사되는 장치까지 갖추었다고 한다. 능의 동문 밖 1.5km 지점에는 거대한 병마용갱(兵馬俑坑)이 3개 있는데 첫 번째 갱은 동서로 230m, 남북으로 92m이다.
그 안에는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8,000여개의 실물크기 병사토용(兵士土俑, terra-cotta soldier)이 진짜 무기를 손에 들고 실제 군대와 똑같이 정렬해 있는데 병사토용의 얼굴모습은 실제 병사 한 사람 한사람을 모델로 만들었기 때문에 모두 다르다. 그 외에도 그 안에는 500여개의 병마토용(兵馬土俑)과 130여대의 진짜 전차(戰車, chariot)도 있으며 토용에는 정성껏 색도 칠해져있다.
원래 중국에는 먼 옛날부터 왕이 죽으면 신하들을 죽여 같이 매장하는 순장(殉葬)이라는 제도가 있었으나 기원전 4세기부터 진은 순장을 금지시키고 그 대신 인형(용/俑)을 묻도록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토용은 역사상 전무후무하며 최근에는 이것을 인류의 여덟 번째 불가사의로 꼽기도 한다.
한편 그는 또 농민을 징발하여 진(秦), 조(趙), 연(燕)나라의 북방에 있던 장성을 연결하고 동서로 더욱 확장하여 서쪽의 임도(臨洮: 지금의 감숙성 민현(岷縣)임)에서 동으로는 요동(遼東: 지금의 요녕성 요양시(遼陽市) 서북임)에 이르는 장성을 건설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 Great Wall of China: 진의 멸망 이후에도 장성의 개보수와 증축은 계속되었으며 명(明)나라 때 대대적인 공사를 하여 현재의 모습과 규모를 갖추게 되었음)이다.
당시에 축조된 장성의 높이는 평균 약 2.5m였고 평균 폭은 밑이 약 3.5m, 위가 약 2.5m로서 동쪽 산악지대에서는 돌을 쌓아올렸으나 서쪽 황토지대에서는 나무판자로 만든 거푸집 안에 물로 반죽한 황토와 지푸라기 등을 섞어 집어넣고 단단하게 다지는 판축(版築)이라는 방법으로 축조하였는데 그것은 고대 중국의 거대한 토목공사의 하나이며 고대 중국백성들의 피와 땀이 얽힌 것이다.
당시 전국에서 병역과 부역으로 징집된 인원이 무려 150여만 명에 달했고 남자가 부족하면 여자들도 보급물자 수송에 잡혀가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어갔으며 농사를 지을 사람이 부족한 농촌은 생산력이 크게 떨어져 백성들의 생활은 매우 궁핍해졌다.
진시황의 통치시기에는 법률도 대단히 엄격하고 가혹하였다. 백성들의 반항을 막기 위해 그는 민간의 무기를 수거하여 없앴으며 이 외에도 한 사람이 죽을죄를 지으면 '족주(族誅)'라 하여 그 친족들도 함께 사형에 처하고 한 집이 법을 어기면 '연좌(連坐)'라 하여 그 마을도 모두 같은 죄로 다스렸다.
백성들은 아무 때나 법률 위반으로 고발당하여 그 벌로 힘든 부역을 하거나 다리를 잘리거나 코가 베이거나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으며 관청으로 압송되는 죄인이 항상 길에 가득하였다.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나라의 역사, 의약, 점술, 식수(植樹) 이외의 책은 모두 불사르게 했다.
그 이듬해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공부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임)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은 진시황의 독재 전횡과 강압 정치에 대해 모의하였는데 뒤에 진시황이 그 사실을 알고 그들을 잡아들이려 하자 노생과 후생은 도주하였다. 이에 크게 진노한 진시황은 그에 연루된 유생 460여명을 잡아다 전부 생매장하였으며 이 두 사건을 역사에서는 '분서갱유(焚書坑儒)'라 하는데 이를 통하여 진시황이 사상과 문화를 얼마나 혹독하게 탄압하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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