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28) 황허(黃河, Yellow River) 문명(2/6)
인류(28) 황허(黃河, Yellow River) 문명(2/6)
  • 임성빈 교수
  • 승인 2017.09.27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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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빈 교수의 ‘빛의 환타지아’]

하(夏, Hsia/Xia)왕조

한편 그전에도 중국에는 예락(醴酪)이라고 하는 약한 발효주가 있었으나 우임금 때 의적(儀狄)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본격적인 술을 만들었는데 우임금이 이를 마셔보고 “후세에 반드시 술로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으리라”고 걱정하였다고 한다. 하 왕조의 17대이자 마지막인 걸(桀, Chieh)은 매우 포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기를 산같이 쌓아놓고 육포(肉脯, jerked beef)를 수풀같이 널어놓은 후 술 연못을 만들어 3,000명의 사람들이 소가 물을 마시듯 술을 마시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이를 육산포림(肉山脯林)이라고 한다.

걸은 정복한 종족으로부터 받은 말희(末喜)라고 하는 여인에게 빠져 그가 하자는 대로 갖은 못된 짓을 다하며 이 같은 주연(酒宴, banquet)을 즐기다가 기원전 1600년 우임금이 걱정한대로 은나라를 세운 탕(湯, T'ang)왕에게 멸망당했다.

▲ 탕왕 ⓒ뉴스타운

하 왕조에 대해서는 얼마 전까지도 역사적 기록만 남아있을 뿐 고고학적 증거가 없었으나 하 왕조 시절인 기원전 2000년경에 황하유역에는 성벽이나 해자(垓字, moat: 방위를 목적으로 성 둘레에 파놓은 못)로 둘러싸인 궁전을 가진 도시국가들이 여럿 있었고 최근에는 황하 중류에 있는 허난성(河南省) 얼리터우(二里頭, Er li tou)가 발굴됨으로서 이 지역이 하 왕조의 수도로 가장 유력시되는 동시에 하 왕조도 실제로 존재했음이 인정되고 있다.

얼리터우에는 중앙에 2개의 궁전이 있었는데 회랑에 둘러싸여 있는 궁전은 가운데 넓은 정원이 있었으며 주변에는 청동기와 골기, 토기 등의 제작소가 있었다.

▲ 얼리터우의 청동용기 ⓒ뉴스타운
▲ 얼리터우의 토기 ⓒ뉴스타운

은(殷, Yin 또는 상/商, Shang)왕조(1/2)

하의 뒤를 이은 은 왕조는 처음에 얼리터우에서 6km 정도 떨어진 얀저우(偃州)의 시향구(尸鄕溝)에 도읍을 정했고 그 후 한때 정저우(鄭州)의 얼리강(二里崗)도 수도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들은 거대한 식량창고와 커다란 제단을 만들었으며 정사를 다루기 위한 왕궁도 건설했는데 그것은 동서가 108m, 남북이 100m 정도의 규모였다.

그들은 그 후 기원전 1300년경에는 은허(殷墟, Yin Ruins,지금의 안양/安陽, Anyang)에 정착하여 지배력을 강화했으나 직접적인 지배가 가능했던 지역은 반경 20km 정도에 불과했고 지방의 권력자들과는 영지나 재산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군사적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점술(占術, prognostication)이나 의식(儀式, ceremony)을 이용하여 왕의 신비적 권위를 높임으로서 세력을 유지했다. 당시 왕을 장례지낼 때에는 엄청난 양의 부장품과 함께 1만 수천 명의 순사자(殉死者)들을 같이 매장했는데 이들은 아마 전쟁포로인 이민족이었을 것이다.

▲ 은허박물관 ⓒ뉴스타운
▲ 은허의 왕궁터 ⓒcescass_cn

중국에 청동기가 들어온 것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그것이 발명된 지 약 1,000년이 지난 기원전 2000년경이었는데 처음에는 모양도 단순하고 무늬도 없었으나 은 왕조에 들어와 형태가 다양하고 문양이 복잡한 제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청동은 대단히 귀중해서 청동으로 만든 술잔이나 술병, 식기, 악기, 무기 등은 주로 권력자들의 의례도구나 사치품으로 사용되었고 일반사람들은 이때까지도 아직 석기를 사용하였다. 이들 청동기는 입자가 매우 미세한 황토를 물에 갠 찰흙으로 거푸집을 만들었기 때문에 대단히 섬세하고 정밀한 무늬를 가질 수 있었으며 황토가 없었다면 중국의 청동기문명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절 왕에게는 자연을 지배하고 행복과 재난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으며 이를 위하여 조상이나 자연신에게 제사(祭祀, worship)를 자주 지냈는데 이때에는 신성하다고 인식되고 있던 술을 반드시 바쳤다. 술을 담는 용기는 사용방법에 따라 십여 가지의 이름이 붙어 있었으며 검정수수와 튤립뿌리로 만든 술이 제사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고 제례(祭禮, sacrificial ritual)용 제기(祭器) 중에는 무게가 약 850kg이나 되는 거대한 사모무대방정(司母戊大方鼎, Simuwu square vessel: 제물용 고기를 삶는 네모난 청동 솥임)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동서남북의 모든 곳을 다스리는 불멸의 힘을 가진 왕의 상징이었다.

▲ 은시대의 청동기 ⓒ뉴스타운
▲ 은시대의 청동검 ⓒ뉴스타운
▲ 은시대의 청동화병 ⓒ뉴스타운
▲ 사모무대방정 ⓒskhlkmss_edu_hk

당시 왕들은 거북의 뱃가죽이나 소뼈를 불에 구워 그것이 갈라진 모양에 따라 점을 치고 그 내용을 거북의 등껍질(tortoise carapace)이나 소의 어깨뼈(flat cattle bone)에 글자로 새겨 넣었는데 이를 갑골문자(甲骨文字, ancient scripts on bone and tortoise carapace)라 하며 그 수는 대략 3,000자로서 그 중 약 절반이 해독되었다.

이들로부터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한자(漢字)가 나왔으며 그 내용에는 제사, 군사(軍事, military affair), 천문(天文, astronomy), 사냥, 농사 등에 관한 것이 많아 은대의 정치, 경제, 사회 등이 밝혀졌다. 이런 점은 열흘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실시되었으며 36회를 한 주기(週期, cycle)로 하는 달력도 만들어졌는데 이 주기는 실제 1년에는 며칠이 모자라기 때문에 윤일(閏日, leap day) 또는 윤달(閏-, leap month)을 두어 이를 조절했다.

달력이 만들어지자 왕이 죽은 날은 중요한 날로 정해져 제사를 모시게 되었고 이런 제례는 백성들 사이에도 뿌리를 내려 가정에서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당시 사회는 같은 씨족의 모임인 읍(邑, town)을 기본단위로 하였고 읍민들은 대개 동굴생활을 하면서 공동으로 수수, 밀, 조 등을 재배하였는데 작물의 일부는 지배자에게 바쳐야 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에 참여하거나 사역에 강제 동원되는 등 이들의 생활은 매우 힘겨웠다.

한편 은과 비슷한 시기에 양쯔 강 상류인 사천성(四川省) 삼성퇴(三星堆, Sanxingdui) 부근에 은에 못지않은 독자적인 청동기문화가 있었는데 폭이 1.4m가 넘는 가면이나 기괴한 모습의 인두상(人頭像)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 갑골문 ⓒ뉴스타운
▲ 은시대의 수레 ⓒ뉴스타운
▲ 삼성퇴의 청동인두상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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