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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들의 판결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다큐멘터리 판결사’로 남길 것

▲ 시스템클럽 대표 지만원 박사
1998초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17년 동안 재판 생활을 해오고 있다. 재판장 앞에서 선고를 기다리던 초조한 시간을 무려 300번 정도는 가졌을 것이다. 이 많은 재판을 한 것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내가 받은 판결은 대부분 정의의 잣대에 의해 받은 것이 아니라 판사들의 이념 잣대에 의해 받은 정치 판결이었다.

내가 받고 있는 재판들은 내년이면 모두 종결될 것으로 본다. 내가 건 재판도 많았고, 내가 걸린 재판도 많았다. 나는 내가 겪은 이 모든 경험을 정리하여 후세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어제는 판사들이 나를 함부로 재판 했지만 내일은 내가 그들을 준업하게 재판할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이익부터 챙긴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어찌 된 일인지 개인의 이익을 따라 살아오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내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면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며 사기나 칠 사람이라고 치부하며 징그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탕발림의 말을 내 스스로가 하고자 한다. 나는 강원도 산골 화전 밭을 가꾸는 부모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지극한 사랑은 받았지만 13세에 홀로 서울에 올라와 신문도 돌리고, 목재도 나르고, 서비스 공장에서 막일도 하고, 가정교사도 하면서 좋은 사람도 만나고, 나쁜 사람도 만나면서 부초처럼 떠돌아 다니다 나이 19세가 되었다. 중학교 졸업장은 없고, 고등학교 졸업장은 한영고등학교 야간반을 다니면서 땄다.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이것이 19세까지에 축적한 내 이력의 전부였다.

내 인생의 어엿한 프로필은 육사로부터 시작됐다. 육사를 들어갈 때 나는 키가 모자랐고, 이어서 몸무게가 모자랐다. 그럴 때마다 생면부지의 소령과 대령이 나타나 나를 구해주었다. 육사에 간 것은 순전히 운명이었다. 어찌 소령이 나타나고 대령이 나타나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를 구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육사에 입교한 것도 기적이었고, 이렇듯 턱없이 부족한 체력으로 그 고된 훈련에서 낙오하지 않고 졸업을 하게 된 것도 기적이었다.

이렇게 아무런 기반도 없는 한 소년이, 당시에는 사회가 알아주는 육사출신 소위가 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요 축복이요 기적 그 자체였다. 이렇게 귀하게 얻은 것이 었기에 육사출신 소위라는 레이블은, 행여 금이라도 갈까, 깨지기라도 할까 고이 다루고 보존해야 할 지극한 자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신이 주신 그 유일한 자산을 초개와 같이 버린 적이 많았다. 포병대대의 제2인자라는 작전장교(고참대위)가 술을 마시고, 툭하면 겨울에 강가에 나가 포대훈련에 열중하는 하사관들에 가서 자기에게 선물을 사오지 않는다며 마구 구타를 한다는 불만들이 대대 내에 팽배했다. 하루는 7-8명의 하사관들이 나를 PX에 초대하여 막걸리를 권했다. 그리고 각기 상처난 부위, 멍이 든 부위를 보여주었다.

나는 공분을 이기지 못해 그만 그 대위의 숙소로 찾아가 서울에서 온 애인과 희희낙락 애정을 나누고 있던 그 고참 대위를 끌어내 몸싸움을 벌여 그에게 많은 상처를 냈다. 그가 사단 헌병대에 고소를 했지만 나를 사랑하는 대대장님이 나를 보호해준 반면 그 대위는 멀리 전근을 갔다. 사단 헌병참모는 나에게 다시는 이런 위험한 일 저지르지 말고 자중자애 하라 타일렀다. 자기를 만난 것이 천운인줄 알아라 했다.

곧바로 명령이 나 월남전에 갔다. 미군 소령에게도 하극상을 저질렀다. 미군 소령이 자존심에 거스르는 요구를 했다. 그의 요구를 거부하는 내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 처벌받고 싶으냐, 너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나는 한국에서 고문관을 했다. 한국 장군들이 내 말에 절절 맸다. 너 감히 내게 항명하는 것이냐.”

나는 이 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목소리를 내려 깔고 트럭 위에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야 이 자가 우리를 벌레처럼 보고 무리한 요구를 한다. 이 자가 한국에서는 장군들을 호령했다며 내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너희들더러 트럭에서 내려와 자기 검열을 받으래, 오늘 이 인간 혼 좀 내주자. 이 인간 발밑 1m에 조준사격하여 각자 10발씩 쏜다. 준비되는 대로 발사.”

배가 물주머니처럼 출렁이던 그 소령, 참으로 뻘랐다. 신참 중위 때 벌인 일이었다. 한국에서 경험이 많은 고참 소령이 내게 큰일 났다며 야단도 치고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오히려 미국 중령이 선물을 사들고 내게 찾아와 사과를 했다.

중위를 달고 육군 본부에서 갓 장군으로 진급한 준장의 전속부관을 했다. 내 밑에서 함께 장군을 모시던 상병이 최고위직 가문의 자손이라는 소문이 파다 했다. 어느 날 그가 말썽을 부리면서 중령 보좌관의 말에도 대들고 내 말에도 픽 픽 웃으면서 조롱을 했다. 여러 차례 그를 훈계 했지만 그럴수록 더 가관이었다. 그래서 나는 옷 벗을 각오를 하고 그를 팼다. 월남에서 22개월 동안 정글을 기어다닌 데다 음식이 맞지 않아 나는 겨우 47kg의 약체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을 검고 입술은 푸르고, 눈만 반들반들한 중위였다.

드디어 정일권 총리실에서 김계원 참모총장실로 전통(전언통신문)이 날아왔다. 병사를 무지하게 구타하는 장교가 있는바 엄중 문책하고 결과를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퇴근 후 그 병사의 집을 찾아갔다. 오후 6시부터 정인숙을 만나 밤 11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한동안은 무언의 기싸움이 지속됐다. 마지막 순간, 나는 정 상병을 앞에 불러 놓고, 그가 듣는 가운데 정인숙에게 정정당당하게 말했다.

그의 남동생이 취했던 행동을 조목 조목 이야기 한 후 “누님 같으면 이럴 경우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녀는 “나 같으면 다리를 분질러 버렸을 것입니다” 하면서 동생을 나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기 이어졌다. “솔직히 나는 내 막내 동생을 엄청 사랑했습니다. 동생의 팔꿈치가 많이 부어오르도록 때린 장교는 경우도 없고, 몰상식하고, 힘이 아주 세고 몸집도 거대한 거친 장교인줄로만 알았습니다. 오늘 여러 시간 중위님을 대하고 보니 내 동생이 한 없이 초라하고 나쁜 놈으로 보입니다. 이 자식 내일 사무실로 보내겠습니다. 장군님께 많이 혼내주라 부탁한다 전해 주십시오.”

그녀는 큰길까지 나와서 택시까지 잡아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총리실에 연락하여 전통을 취소시키겠다 약속했다. 하지만 모레가 내 결혼식인데도 그 다음 날 그런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전통문을 가지고 국무총리실로 갔다. “이 전통문 육군 총장실로 보낸 비서관 계신가요?” 목소리를 깔았다. 아무도 답이 없었다. 참모총장이 눈 아래 보이는 그들의 눈에 내 초라한 얼굴과 초라한 중위 계급장이 눈에나 찼겠는가? 하지만 나는 일부러 모션을 느리게 잡으면서 그 전통문을 한 비서 앞에 내놓았다.

“내일 당장 이 전통문을 언론에 공개합니다. 국무총리가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이 겨우 한 병사의 일에 개입하여 이런 전통을 참모총장에 내릴 수 있느냐, 언론에 호소합니다. 당신들 눈에는 내가 하찮은 육군 중위로 보이지만 내 뒤에는 국민 여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아무도 이 전통을 육본으로 내려 보내지 않았다면 언론에 부탁해서 당사자를 찾을 수 밖에요.”

사무실을 나왔다, 그러자 한 비서관이 황급하게 나를 잡았다. “그 문서를 기안한 비서가 밖에 나갔는데 제가 책임지고 그 전통을 취소 시키겠습니다. 걱정말고 가십시오.”

내가 생각해도 28세에 불과했던 중위의 행동치고는 어무나 당돌했다. 목숨 내놓고 전쟁을 치르다 보니 간이 많이 부었던 것 같다. 이런 유사한 사건은 1987년 2월 스스로 대령 계급을 떼 낼 때가지 여러 차례 있었다. 나로 인해 국방장관, 공군총장 등이 청와대에 불려가 전두환으로부터 혼지검이 났다. 그들은 나더러 연구소를 떠나라 했고, 나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버렸다.

내가 겪는 역경은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한 열정의 반대급부 였다. 나는 선진국의 사례들을 많이 연구했다. 우리나라의 낙후된 국가경영 시스템과 정책에 대해 많은 말을 하였다. 김대중 이전의 10년동안 나는 신선한 충격의 대명사 였다. 김대중이 내게 접근했다. 1등칸을 타고 중국을 갈 때 그는 부인의 자리에 나를 앉히고 갔다. 중국 방분 10일 동안 그는 나를 자기 옆에 앉히고 뭐든지 내게 물었다. “지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요?”

대통령이 되면서 그는 내게 여러 사람들을 보내 자리를 제의했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자유인”으로 살고 싶은 소망 때문에 모두 거절했다. 당시 나는 장관들보다 더 날렸고, 더 많은 벌이를 했고, 더 없이 행복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니 그는 빨갱이었다. 나는 이것을 햇볕정책에서 감지했다. 그리고 저항했다. “김대중과 임동원은 빨갱이다” 1999년부터 당시 국정원장을 했던 임동원이 나를 가장 위험한 인물로 보고 집중 도청을 하였다. 그 때부터 김대중 정부와 김대중의 군대는 나를 공격하는 도구가 되었다. 법원도 김대중의 도구가 되었다. 그런 소송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지난 11월 14일, 대법원이 김대중 사자명예훼손 사건에 대한 나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확정한 것이다. 양심이 있고, 판단력이 있는 대법관들이라면, 100% 무죄를 선고했을 것이다. 며칠 후 판결문을 받아 보았다. 한 마디로 내가 써낸 상고이유서는 2심 판결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선고였다. 그리고 앞으로 누구든 감히 김대중에 대한 비방을 조금이라도 하면 지만원처럼 중형(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이번 대법원 판결은 일반 논리를 거역하는 폭거였다. 나는 상고이유서를 사회에 내 놓았다. 과연 양심적인 판사들이 이 상고이유서를 읽는다면 과연 어느 누가 감히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할 수 있겠는가? 박정희의 명예를 허무는 행위에는 무한한 자비를 베풀고 김대중에 관한 이야기에는 억지로 트집을 잡는 법원이 현 대한민국의 법원이라는 사실을 국민이 기억하기 바란다.

상고이유서에는 쟁점이 조목조목 거시돼 있었지만 이에 대해 대법원은 쟁점을 항목별로 따지지 않고 그냥 담요로 덮어 씌우듯이 “이유 없다”는 요지로 한방에 덮어 버렸다. 이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이기에 반드시 단행본으로 출간할 것이며, 그래서 상고이유서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귀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해 “이유 없다”는 기각 판결을 내린 대법관은 박병대(재판장), 양창수, 고영환, 김창석(주심)이다.

내가 한 재판에는 사적인 것이 없다. 내가 돈을 훔쳤다거니 폭력을 행했다거나 남의 여인을 탐했다거나 그런 파렴치한 송사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나라를 바로 잡고 부정과 거짓말을 경계하자는 뜻으로 쓴 글들이 다른 사람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나는 분석의 달인이라 지칭해도 나무랄 사람 별로 없을 것이다. 판단이란 무엇인가? 분석의 결과가 판단인 것이다. 그 어떤 사물에 대해 판단한다고 하자. 법조문을 외운 애송이 판사들이 판단하는 것에 신뢰가 가는가, 아니면 법조문의 정신을 이해한 나 같은 사람이 판단하는 것에 신뢰가 가는가?

빨갱이 시대에 많은 유죄판결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나이지만 나는 내 판단력이 판사들의 판단력보다 우위라고 생각 하기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나를 악의적으로 판단한 판사들의 이름과 행태를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다큐멘터리 판결사’로 남길 것이다.

세월의 뒤안길, 아무도 보는 이 없다 싶어 함부로 행했던 판검사들의 발자취, 곳곳에 설치된 CCTV가 감시하는 것처럼, 감시되고 평가될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것처럼 많은 국민들이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는 판검사들의 행위를 감시하고 기록하고 남겨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 사회에 귀감이 될 만한 족적을 남긴 판검사들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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