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의 새 물꼬를 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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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의 새 물꼬를 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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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연재 1 (글 이재환)

<여는 말> '웅덩이'가 아닌 '호수' ― 신라사의 새 물꼬를 트면서

"신라는 경주 평야에서 박혁거세에 의해 진한의 한 나라인 사로국을 중심으로 세워졌다."(서기 2001년 한국 교육부가 펴낸 중학교『국사』 교과서 상권)

"신라가 성장한 지역은 북쪽과 서쪽이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어 유이민 집단의 이주가 활발하지 못하였다 … 경주 지방의 사로국으로부터 발전한 신라는 박혁거세에 의해 건국되었다(B.C 57)
[서기전 57년. 서기의 숫자에 서기전의 숫자를 더하면 된다. 따라서 서기전 57년은 57 + 2002 = 2059. 만으로는 2059년 전이고 지금으로부터 2060년 전이다 - 글쓴이].

초기에는 박, 석, 김의 세 부족이 연맹하여 왕에 해당하는 이사금을 선출하였는데, 곧 이어 6부족 연맹체로 발전하였다."(한국의 고등학교『국사』 교과서 상권. 중학교의 국사 교과서와 같은 해에 펴낸 책)

― 서기 2002년 현재 우리가 배우는 '신라'라는 나라의 모습이다. 이 설명에 따르면 신라는 지금의 경상북도인 "진한"지역에 있던 "사로국"이 발전한 나라다. 이 나라는 처음부터 "경주 평야"에 있었으며 밖에서 들어온 사람의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토착민의 나라'였다. 맨 먼저 박, 석, 김씨가 자리잡았고 그 다음 '6촌(村. 마을)'이나 '6부(部)'라고 불리는 "부족"들이 세 씨족과 합류했다. 교과서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한반도 동남부에 치우쳐 있어서 신라 사회는 삼국 중에서 발전이 가장 늦었다."(고등학교 『국사』교과서 상권)

이런 신라 인식은 우리의 마음 속에 그대로 박혀 있다.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발전하지 못하고 뒤떨어진 나라. "부족"의 "연맹체"라고 불러야 할 나라,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나라'. 앞선(?)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큼 '순수한 토착문화'가 잘 살아있는 이상한 나라. 그래서 더더욱 '깔봐야'하는 나라.

우리는 신라를 그런 나라로 여긴다. 부여와 고구려, 백제, 진(:발해)을 지나치게 추켜세우는 오늘날의 역사 인식은 이런 경향을 더욱 부추긴다.(나는 고구려나 백제, 진, 부여, 고조선을 깎아 내리고 싶진 않다. 오히려 나는 이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 어느 정도는 ― 자랑스러워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라의 역사도 부여나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사이므로, 어느 한쪽을 마구 깎아내리거나 추켜세우지 않고 되도록 공평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원칙'일 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옛 역사기록과 ― 몇십년 동안 꾸준히 이루어진 ― 고고학자의 발굴은 이런 신라사 인식을 뿌리채 뒤흔들고 있다. 신라 임금의 무덤에서 스키타이 족이나 흉노(:훈, 후나, 훈누)·선비족의 금제품과 비슷한 금은 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고대국가가 없었다는) 서기 2세기의 경주 지층에서 포항제철처럼 큰 제철 시설이 나왔기 때문이다.『삼국사기』「신라본기」의 초기 기록도 신라인이 '외부인'이며 "경주 평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나라를 세운 뒤 나중에 "경주"로 흘러들어왔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사는 "한반도 동남부에 치우쳐 있"던 고인 물이 아니라 "유이민 집단"이 물줄기처럼 "활발"하게 흘러들어와 만든 '호수'인 셈이다. 아울러 신라는 처음부터 수준 높은 문명의 혜택을 누린 고대국가였으며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부족국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과연 이 설명은 사실일까? 신라가 '토착민의 부족국가'라는 인식은 잘못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왜 우리는 신라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까? 혹시 오늘날의 지역 대립과 지역주의 역사관, '단일 농경민족(또는 '순수[?]한 북방 유목민족')'이라는 선입견이 우리의 발목을 붙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이제 이런 물음에 진지하게 대답해야 할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사는 어떤 역사이며, 누구의 역사인지를 구체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채 그냥 얼버무리고 있다. 그저 '별 볼일없는 깡촌'이나 '허약한 2류 국가', '하지만 우리 역사니까 [무조건] 배워야 한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증거가 없다면 모를까 기록과 고고학 유물이라는 '증거'가 엄연히 있는데도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나는 학자들의 연구와 고고학자의 유물, 옛 기록, '상식'과 '법칙'을 바탕으로 이 글을 쓴다. 고구려와 백제, 진(:발해)의 역사를 복원하는 이는 많아도 신라사를 살피는 사람은 적기 때문이다. 또 (이 사실이 중요한데) 학자들 가운데 대부분이 우리 역사를 '옮김과 뿌리내림, 뒤섞임과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 않으므로" 내가 말하는 것이다.(사실은 오래 전부터 이 분야를 연구한 분들의 도움을 받았음을 털어놔야겠다. 그분들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이 글을 아예 쓸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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