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문화원 역사의 산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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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문화원 역사의 산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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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인사 탐방기] 인천 중구 문화원 김봉수 원장

^^^▲ 인천중구 문화원 김봉수원장사무실에서
ⓒ 신중균 기자^^^

인천 문화원 역사의 산 증인인 김봉수 중구문화원장을 만나본다. 그는 예비역 육군 대위였다. 1960년 가을 육군대위로 예편한 김봉수씨가 연고도 없는 인천에 닻을 내린다. 혁명정부시절 잠시 인천시청에 근무를 하다가 뜻한 바 있어 당시 문화원총무로 일하게 된다.

당시 남들이 인정하는 차트솜씨며, 붓글씨, 피아노연주실력은 놀라왔다. 문화원에서 하는 일은 영화상영, 음악감상회, 시국강연회, 자유의 벗, 자유세계, 등 간행물배부, 향토문화교육, 22개의 써클 활동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전후복구사업이 한창이었고 폐허와 빈곤 속에서 허덕이는 국민들에게 정신적인 계몽사업으로 삶의 희망을 주는 강연과 영화상영을 시내와 농촌으로 순회하게된다. 한해의 영화상영횟수가 335회로 관람인원 111.600여명에 이른 것을 보면 문화원의 활동을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웠던 시절

봉사 정신과 계몽사업에 참여하는 보람으로 써늘한 셋방에서 하루의 피곤을 풀던 그였다. 회의를 느꼈다. 고민했다. 문화원이 봉급을 정식으로 주는 곳도 아니었다. 당시시대상황은 어느 곳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시 시작하자 하는 마음으로 직장을 구하고 결혼도 하고 서울의 H 그룹생산공장에 취업을 했을 때는 30중반을 넘긴 나이였다.

서울 변두리희사까지 2시간이상의 출근시간을 견디며 근면 성실로 근무를 하여 결국 공장장에 올라 23회사의 그룹 최고상까지 받았다. 10년 세월에 병마가 찾아온다. 결국 울산공장으로의 발령을 받고 사직서를 냈다. 6개월의 봉급을 입금시켜준 회사의 배려가 지금도 감사한마음이다.

10년의 세월을 접고 당시 김 길 봉 문화원장의 권유로 다시 문화원에 발을 딛고 문화부에서 실태조사차 내려온 직원에게 시범문화원지정을 건의, 수락되어 예산이 책정되고 현 건물로의 문화원 이전이 이루어지게된다.

이후 문화원의 시민학교, 내 고장 탐구사례발표대회. 독후감경진대회, 생활문화 교양강좌 ,향토사 조사연구사업, 음악감상회, 문화재순례교육, 시민의 날, 제물포 축제, 우리문화 한아름교육 등, 20여가지 사업을 실시하여 전국 225개 문화원 중 최우수 문화원으로 인정받게되었다.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관광부 장관상 2회 수상, 인천시문화상을 수상했다. 인천문화원 역사의 산 증인이며 문화원업무에 백과 사전이라 할만큼 전국의 문화원에서 업무에 대한 문의가 줄을 잇는다. 지금 그는 중구 문화원장으로 연륜과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문화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문화원으로 물어오는 내용도 다양했다. 동네이름이며 운명도 물어오는 시민도 있었다. 어찌하오리까? 점술가에게 물어 답변해줄 밖에... 어려웠던 옛 시절을 회고하는 그의 눈자위가 붉어져온다. 일생에서 문화사업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한번도 해 본일 없다는 김봉수 원장이다.

꼼꼼한 그의 성격대로 주택복권을 매주 7장씩 구입하여 스크랩(현재1회부터 보관)하며, 피아노연주도하고 자신과 쏙 빼 닮은 손자 보는 재미에 폭 빠져있다, 광적인 야구팬이며 수필 작가로서 등단 수필집 2집을 준비중이다. 오직 외길 인생을 살아온 김봉수 원장의 앞날에 행운을 기원하며 맥아더 동상을 뒤로 자유공원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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