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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측은 페닌술라 전투를 지휘한 북군의 조지 매클랜란 장군, 우측은 남군의 조셉 존스턴 장군 ^^^ | ||
남북전쟁을 생각하면, 도대체 이런 전쟁을 일으킨 남부와 북부의 정치인들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게 된다. 그들은 전쟁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시작했고, 일단 시작했으니 사생결단을 하고 이겨야만 했고, 그래서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버지니아는 바로 그 한복판에 있었다. 남북전쟁이 참가한 북군 병력은 약 200만 명이고 남부 병력은 100만 명으로 숫자로 보더라고 도저히 남부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전쟁 동안 남부에서 26만 명, 북부에서 36만 명이 죽어서 미국이 참가했던 모든 다른 전쟁에서 전사한 미국인의 숫자와 비슷하다.
남부가 연방탈퇴를 선언하자 워싱턴, 뉴욕, 시카고에선 남부를 '반란군'(Rebels)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남부에선 “그렇다, 우리는 반란군이다. 조지 워싱턴도 반란군 사령관이었단 말이야”고 응수했다. 남군의 주력인 북부 버지니아 군(Army of Northern Virginia)을 지휘했던 로버트 리의 부인은 조지 워싱턴의 부인 마샤 워싱턴의 후손이었고, 남부연합의 대통령 제퍼스 데이비스의 각료 중에는 토머스 제퍼슨의 외손자 조지 랜돌프도 있었다. 토머스 제퍼슨의 또 다른 손자는 버지니아 군사학교의 생도로 뉴마켓 전투에 참가해서 전사했다. 반면 링컨은 켄터키 시골에서 태어난 시골뜨기였고, 링컨을 에워싸고 있던 정치인들은 상공업과 철도사업자들의 지원을 받는 파워브로커들이었다.
남북 전쟁 동안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버지니아와 테네시다. 버지니아와 테네스가 남부 중 가장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버지니아와 테네시는 노예제도 찬성론자인 존 브레킨리지 보다 중도적 통합론자인 존 벨을 많이 지지했지만 일단 연방에서 탈퇴하자 지리적 위치 때문에 주된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과 경계를 마주 하고 있는 버지니아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남부 연합의 수도였기에 버지니아는 숙명적으로 전쟁의 한 복판에 설 수 밖에 없었다.
버지니아에서 벌어진 전투를 흔히 남북 전쟁 중 '동부 전선'(Eastern Theater)라고 하고 테네시에서 벌어진 전투를 ‘서부 전선’(Western Theater)라고 부르는데, 서부 전선의 치가몬드 전투와 사일로 전투에서 남군이 먼저 무너져서 북군은 애틀란타를 점령하고 미시시피까지 밀고 내려갈 수 있었다. 서부 전선에서 남군이 무너지자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이 지휘하는 북군이 동부 전선에 가담하게 됐고, 결국 리치먼드가 함락되며 로버트 리는 그랜트에게 항복하게 된다.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 등 미국 독립을 이끈 아버지들의 고향 버지니아는 이런 슬픈 역사를 안고 있다.
1차 매나사 전투 (1861년 7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미군 주둔지 포트 섬터에 대해 남군이 공격을 함으로써 전쟁은 시작됐다. 워싱턴의 정치인들은 남부의 수도인 리치먼드를 점령하면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고 낭만적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포토맥 군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 북부의 북동 버지니아 군의 지휘를 맡은 어빈 맥도웰 장군은 7월 16일 워싱턴을 떠나서 포토맥 강을 건너 버지니아로 진입했다. 북군은 포토맥 강의 지류인 불 런(Bull Run) 건너편 매나사를 향했다.
당시 남군의 지휘관은 뷰레가드 장군이었고, 세난도 계곡을 출발한 존스턴 장군의 부대가 합류해서 총병력은 약 3만 명에 달했다. 북군은 맥도웰 장군과 패터슨 장군이 지휘하는 약 5만 명 병력이었다. 당시 워싱턴의 정부 고관 가족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언덕에 올라가서 한가하게 구경을 했다.
7월 21일 북군이 공격을 시작했고, 전투 경험이 없는 양측 군대는 우왕좌왕하면서 전투를 했다. 처음에는 남군이 고전을 했는데, 정오 경 토머스 잭슨 대령이 이끄는 여단과 제브 스튜어트 대령의 기병대가 도착하자 전세가 바뀌었다. 잭슨은 북군의 포격으로부터 안전한 언덕 아래로 부대를 배치하고, 대포 13문도 적의 포격으로 안전한 곳에 이끌고 가서 북군 포병대를 향해 포격을 했다. 전술 개념이 없는 북군은 11문을 포를 이동시켜 공격했는데 오후 3시경 잭슨의 보병과 스튜어트의 기병은 북군의 포대를 포위공격해서 획득한 후 그렇게 포획한 대포를 북군을 향해 사격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해서 전세를 반전시켰다. 잭슨은 북군을 향해 총공격 명령을 내렸고 놀란 북군은 무기를 버리고 무질서하게 워싱턴 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워싱턴의 정치인들은 북군이 쉽게 승리할 것으로 보고 멀리서 전투를 보기 위해 피크닉을 나갔다가 무질서하게 패퇴하는 자기 군대를 보고 경악해서 경쟁적으로 워싱턴으로 도망을 가서 혼란를 가중시켰다. 링컨은 패배해서 돌아 온 군대를 보고 경악했다. 당시에 워싱턴을 방어할 수 있는 병력이 없어서 위기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남군도 북군을 추격할 만한 충분한 병력이 없었다.
1차 매나사 전투는 양측에게 전쟁이 얼마나 처참할 것인가를 절실하게 느끼게 했다. 매나사 전투에서 남군의 바나드 비 장군이 전사했고, 이 전투에서 ‘스톤월’이란 명칭을 얻은 토머스 잭슨은 남군의 유능한 지휘관으로 이름을 떨치게 됐다. 링컨은 맥도웰 장군을 해임하고 후임으로 매클래란 장군을 임명했다.
페닌술라 전투 (1862년 3월 - 6월)
링컨과 그의 각료들은 매나사 전투의 결과에 경악했다. 남군을 쉽게 진압하기는커녕 워싱턴이 점령당할 수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링컨에 의해 맥도넬 장군의 후임으로 임명된 조지 매클랜란은 포토막 군(The Army of Potomac)을 창설했고, 자신이 사령관을 맡았다. 매클랜란은 워싱턴을 방어하기 위한 버지니아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길을 요새와 포대로 철통같이 둘러싸놓았다. 1861년 11월, 북군 총사령관을 겸하게 된 매클랜란은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를 함락하기 위한 야심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1862년 3월 17일, 매클랜란은 버지니아 영토이지만 남북전쟁 후 북군의 통치하에 있던 알렉산드리아 부두에서 12만 대군으로 구성된 포토맥 군을 태운 함대를 이끌고 제임스 강과 요크 강 사이에 있는 반도 남단 포트 몬로에 상륙했다. 당시 남군의 존스턴 장군은 휘하부대를 컬피퍼에서 프레데릭스버그에 이르는 곳에 두고 북군의 재침공에 대비하고 있었고, 스톤월 잭슨은 세난도 밸리에서 북군 5만 명 병력과 전투 중이었다.
존스턴 장군은 페닌술라에서 북군의 대규모 공세를 방어할 수 없다고 보고 리치먼드 외곽에 방어선을 치기 위해 조용히 병력을 철수했다. 이런 사정을 모른 매클랜란은 상륙 후 한 달 이상 시간을 보냈고, 5월 5일에 윌리엄스버그에서 북군과 남군의 후미 부대가 충돌해서 남군 은 1,682명, 북군은 2,283명의 전사상자를 냈다. 그러는 동안 존스턴 장군은 6만 병력을 리치먼드 외곽에 포진할 수 있었다. 5월 10일, 북군 해군은 노퍼크 해군 기지를 장악했고, 기항지를 잃어버린 남군의 철함 버지니아 호는 북군에 의한 나포를 피하기 위해 자폭했다. 5월 15일, 북군 해군 선단은 제임스 강을 따라서 리치먼드에서 불과 10마일 떨어진 드루리 고지에 도달했는데, 그곳에 구축한 남군 요새로부터 포격을 받고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지척에서 포성을 들은 리치먼드의 시민들은 도시가 함락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공포에 떨었다.
10만 병력을 이끈 매클랜란은 리치먼드를 지키는 남군이 자기가 지휘하는 북군 병력보다 두 배는 많은 줄 알고 공격에 주저했다. 링컨은 매클랜란에게 추후로 보내주기로 한 군단 병력을 세난도 밸리에서 스톤월 잭슨과 맞서 고전하고 있는 북군에 투입해서 매클랜란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5월 27일에는 북쪽의 하노버 코트 하우스에서 양측이 조우해서 각각 수백 명 씩 전사상자를 냈다. 리치먼드가 포위되면 견디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한 존스턴 장군은 5월 31일 일제 공격을 가했으나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결정적인 승패가 없이 그 다음 날 정오 경에 남군은 진지로 후퇴했고 북군도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았다. 하루 반 동안 남군은 약 6,000명, 북군은 약 5,000명의 전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에서 존스턴 장군이 부상을 입고 리치먼드로 후송됐고,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은 로버트 리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세난도 밸리 전투 (1862년 3-6월)
1861년 11월, 매나사 전투에서 이름을 날린 스톤월 잭슨은 세난도 밸리 지역의 지휘를 맡고 밸리 북부의 윈체스터에 사령부를 차렸다. 세난도 밸리는 알레게이 산맥과 블루리지 산맥 사이의 비옥한 지역으로 버지니아의 식량창고와 같았다. 처음에 잭슨의 병력은 5,000명에 불과했으나 나중에 병력이 증강되어 11,000 병력을 이끌게 되었다. 1862년 2월, 북군 사령관 매클랜란은 내서니엘 뱅크스 장군으로 하여금 포토막 강을 건너서 운하와 철도를 장악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밸리 서쪽 컬피퍼에 주둔하고 있던 조셉 존스턴 장군은 리치먼드를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돌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잭슨은 부대를 윈체스터에서 남서쪽 고지 마운트 잭슨으로 이동시켰다. 뱅크스 장군의 북군은 밸리를 떠나서 리치먼드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뱅크스의 북군 병력이 밸리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은 잭슨은 3월 22일과 23일 아침에 40마일을 행군해서 3,000명 병력으로 북군 9,000명 병력을 공격했다. 잭슨은 북군의 병력을 과소평가하고 공격했는데, 오후 늦게야 남군 지원병력을 투입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북군 540명이, 남군은 718명의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는 잭슨이 패배한 유일한 전투인데, 전략적으로 남군이 승리한 것으로 평가된다. 잭슨의 과감한 공격에 놀란 링컨이 리치먼드로 향하던 북군 병력을 세난도 밸리로 돌렸기 때문이다.
북군이 추격을 해 오자 잭슨은 다시 마운트 잭슨으로 후퇴했다. 리치먼드로 병력을 이동시킨 존스턴 장군은 리차드 이웰 장군이 지휘하는 사단 병력을 잭슨에게 보내서 남부 밸리를 북군으로부터 방어하라고 지시했다. 이 때 북군 12만 대군은 버지니아 페닌술라에 상륙해서 리치먼드를 향하고 있었다. 4월 초, 테네시 사일로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남군은 그랜트가 지휘하는 북군에게 패배했다. 남군은 2월에 테네시의 포트 도넬슨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후 또 다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지휘관인 앨버트 존스턴 장군이 전사해서 서부 전선이 붕괴하고 말았다. 4월 21일, 당시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의 군사보좌관으로 리치먼드에 있던 로버트 리는 스톤월 잭슨에게 뱅크스의 북군을 공격해서 프레데릭스버그에 와있는 북군 맥도넬 장군의 부대가 리치먼드에 야기하는 위협을 덜어 달라고 요청했다.
잭슨은 이웰의 사단으로로 하여금 뱅크스의 북군을 경계하도록 하고 자신의 부대는 소규모 병력으로 밸리 남부의 스탄턴을 경비하고 있던 에드워드 존슨 장군의 부대와 합류했다. 5월 8일에 맥도웰에서 잭슨은 공격해온 북군을 막아냈다. 5월21-22일간 잭슨은 병력을 신속하게 이동시켜서 23일에 포트 로얄에 있는 북군 진지를 공격했다. 잭슨은 이 전투에서 북군을 패퇴시키고 북군의 막대한 군수물자를 획득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링컨은 리치먼드를 향하던 어빈 맥도웰 장군이 이끄는 병력 20,000 명을 밸리로 향하도록 명령했다. 이 후 잭슨의 부대와 북군은 쫓고 쫓기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여러 곳에서 전투를 했다. 6월 8일과 9일에 크로스 키스와 포트 리퍼블릭에서 북군과 남군은 조우해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북군은 결국 포토막 강을 넘어서 메릴랜드로 후퇴하고 말았다.
잭슨은 두 달 동안 646 마일을 이동하면서 3배나 많은 북군과 전투를 벌렸다. 잭슨이 벌인 세난도 밸리 전투는 기동성을 강조한 전술로서 이후에 군사학에서 모범적인 사례로 뽑힌다. 북군이 포토막 강을 건너 돌아 간 다음에 잭슨의 부대는 또 다시 이동을 해서 페닌술라 전투의 마지막을 장식한 세븐 데이스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세븐 데이스 전투 (1862년 6월)
페닌술라에 상륙한 북군과 리치먼드 방어를 위해 결집한 남군은 1862년 6월 25일에서 7월 1일까지 리치먼드 근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이것을 세븐 데이스 전투, 즉 ‘7일간의 전투’라고 부른다. 로버트 리가 현지 지휘관이 되어 벌인 첫 전투다.
로버트 리는 남군이 북군이 벌이는 소모전이나 포위 공격을 이길 수 없다고 보고 기습 공격을 해서 북군에 타격을 주려고 했다. 리는 포터 장군의 북군의 우익이 취약한 것을 알고 스톤월 잭슨으로 하여금 26일에 그 쪽을 공격하도록 했다. 매클랜란은 세난도에서 출발한 스톤월 잭슨의 부대가 곧 도착할 것으로 생각하고 남군이 공격하기 전에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6월 25일 아침, 남쪽에 포진한 북군이 먼저 공격을 시작해서 양측은 화이트 오크 습지를 가운데 두고 치열한 총격전을 벌렸고 남군은 북군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로버트 리는 6월 26일 아침에 잭슨과 힐의 부대가 동시에 포터 장군의 북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했으나 잭슨의 부대는 오랜 행군 끝에 오후 늦게야 도착해서 휴식을 취하는 수 밖에 없었다. 잭슨을 기다리다 지친 힐 장군은 오후 3시에 불과 15,000명 병력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60,000 명 병력이 집결된 후에 공격하려던 로버트 리의 구상이 실패로 돌아갔고 남군은 북군 보다 네 배나 많은 전사상자를 냈다. 하지만 매클랜란은 잭슨의 부대가 도착한 것으로 알고는 북군으로 하여금 후퇴하도록 명령했는데, 매클랜란은 실제는 85,000 명밖에 안 되는 남군 병력이 20만 명은 되는 줄 알고 있었다.
6월 27일에도 로버트 리는 소규모 북군을 상대로 공격을 계속했다. 남쪽에 포진한 남군의 매그루더 장군은 공격할 것 같은 기세를 보여서 대규모의 북군을 묶어 놓은 사이에 북쪽에서 남군이 공격을 하자 매클랜란은 또 다시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를 명령했다. 6월 29일에도 남군은 북군이 결집해 있는 지점을 공격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6월 30일이 되자 대부분 북군은 화이트 오크 습지를 건너갔다. 로버트 리는 북군을 파괴하기 위해 또다시 공격을 명령했으나 피로가 누적된 잭슨의 군대는 제대로 공격을 하지 못해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7월 1일에도 남군은 북군을 향해 공격했으나 북군의 대규모 포격으로 희생자를 많이 내고 말았다. 북군은 남군의 파상적 공격에 맞서면서 제임스 강변으로 후퇴를 했다. 제임스 강변에 도달한 북군은 강에 대기하고 있던 함대에 승선해서 철수했다.
이렇게 해서 제임스 강을 통해 상륙해서 리치먼드를 점령하려던 북군의 대담한 시도는 실패했다. 그러나 7일간의 전투에서 남군은 9만 명 병력 중 20,000명의 전사상자를 내는 큰 피해를 입었다. 반면 북군은 10만 5천 명 병력 중 16,000명의 전사상자를 냈다. 세븐 데이스 전투에서 스톤월 잭슨의 부대는 세난도 밸리 전투에서의 피로와 긴 행군으로 인해 역할을 하지 못했고, 잭슨의 역할에 기대했던 로버트 리의 작전을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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