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속에 유교가 편안하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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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속에 유교가 편안하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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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세계문화엑스포기념 문화유산답사>'양동민속마을'

 
   
  ^^^▲ 양동민속마을
ⓒ 경주시^^^
 
 

모처럼 파아란 하늘 속에 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다. 따가운 초가을 햇살 아래 벌써 벼가 하나둘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어김없는 계절의 변화. 하지만 태풍 '매미'가 할퀴고 간 상처가 들판 여기저기 시퍼런 멍처럼 남아 있다. 우울하다.

하지만 양동민속마을을 휘어감는 바람은 시원하면서도 달콤하기만 하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곳곳에서 피어나는 노오란 달맞이꽃과 우리나라꽃 무궁화꽃, 연분홍 입술을 뾰쫌히 내미는 갯메꽃, 파아란 하늘을 마신 청색 도라지꽃, 서둘러 꽃망울을 터뜨리는 코스모스, 마악 이마를 훤칠하게 드러내는 해바라기 등 모두 해맑기만 하다.

 

 
   
  ^^^▲ 무첨당
ⓒ 경주시^^^
 
 

무겁다. 양동민속마을로 들어설수록 갑자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불교국에서 유교국으로 들어섰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래등 같은 기왓집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노오란 초갓집을 보는 순간 양반과 상놈의 신분 차이를 피부 깊숙히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불국토 경주의 한쪽 귀퉁이, 강동면 양동리에 오목한 둥지를 틀고 있는 양동민속마을은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 189호이다. 마치 이 곳에 안동하회마을을 통째로 그대로 빼다박은 듯한 느낌이다.

양동민속마을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살아온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양대 문벌을 이루며 살아온, 두 집안이 서로 도토리 키재기를 하면서 살아온 동족마을이자 일종의 씨족마을이다.

이 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16KM쯤 떨어져 있는데, 넓은 평야를 안고 있는 산의 계곡이, 산과 계곡에서 보았을 때 거꾸로 물(勿)자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을 서남방 역수로 안은 지형으로, 이 역수지형이 이 마을의 끊임없는 부의 원천이라 믿고 있다.

즉, 다시 말하자면 흘러들어온 재물이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도 형산강물(재물)이 이 마을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고 있지만 빠져나가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을 사람들은 이곳이 나날이 재물이 불어나는 마을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 여강이씨 종가
ⓒ 경주시^^^
 
 

즉, 다시 말하자면 흘러들어온 재물이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도 형산강물(재물)이 이 마을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고 있지만 빠져나가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을 사람들은 이곳이 나날이 재물이 불어나는 마을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또 이 마을 서편에는 실제로 부의 상징인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이 평야 대부분이 손씨와 이씨의 소유였으므로 '역수의 부'는 생각이 아니라 실제 생활 현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마악 벼가 익어가고 있는 이 평야도 세월에 따라 지주가 많이 바뀌었다.

마을 앞에는 오늘도 강이 흐른다. 유유히 흐르는 저 강은 바로 형산강이다. 이 강 또한 예전에는 수량도 많고 바닥 또한 깊어서 포항쪽의 고깃배들까지 들락거렸다고 전해진다. 당시 포항쪽의 고깃배가 들락거렸다는 것은 해산물의 공급이 원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금은 수량도 줄고 바닥도 높아져 고깃배의 내왕은 불가능하다.

입에서 입으로, 글에서 글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양동은 역대로 '외손이 마을'이라 불렸다고 한다. 즉, 고려시대에는 오태사(吳太師)에서 장태사(蔣太師)로, 조선시대에는 유부하(柳復河)에서 손소(孫昭)로, 다시 이번(李蕃)으로 계속해서 외손쪽으로만 계승되어 왔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말에 의하면 양동민속마을은 신라시대에 아산 장씨(牙山蔣氏)가 처음으로 이 마을에 들어와 5-6호의 작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또 마을 이름도 그때부터 양좌촌(良佐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 물봉동산 초가
ⓒ 경주시^^^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1467년 함경도 길주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손소가 이곳에 들어와 지금의 두 성씨의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손소는 안동부사와 진주목사를 지냈으며, 지금으로부터 520여년 전에 장인인 유복하의 상속자로 이 마을에 들어와 지금의 월성손씨 종가를 지었다고 한다.

또 손소의 딸은 여강 이씨(驪江李氏) 번(蕃)에게 출가하여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맏이가 동국 18현(東國 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지금도 문묘에서 배향되고 있는 이언적(李彦迪)이다.

이언적은 외가인 손씨 대종가에서 출생하였다고 전해지며, 10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이언적은 양산, 김해, 상주 등 손중돈의 임지를 따라다니면서 수학을 했으며 24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러한 이언적의 수학 과정을 두고 "학문연원수수설"(學門淵源授受說)이라 하여 '우재의 학문이 회재에게 전수되었다'고 하는 손씨측의 주장과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씨측의 상반된 주장이 일어나 한동안 두 가문간의 갈등이 몹시 심했다고 한다.

이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ㅁ자형이 기본이며 물(勿)자 형태로 뻗은 구릉의 능선이산의 중허리에 배열되어 있다. 하지만 그 배치가 듬성하고 능선마다 우거진 숲이 있어서 가까이 가야만 마을의 전체 윤곽이 드러난다.

이 마을의 또 한 가지 특징은 마치 피라밋처럼 대종가일수록 높은 곳에 위치하고, 그 아래로는 직계 또는 방계손들의 집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또 마을 곳곳에 200여년 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들도 15채 가량이나 있다. 이 집들 역시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자는 ㄱ자형, 서당은 일(一)자형을 보이고 있다.

원래 이 마을 곳곳에는 한 집안에 데리고 있었던 노비들의 주거처인 '행랑채'와 밖에서 거주하는 노비들이 살았던 초가인 '가랍집'이 40여호 정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텃밭으로 변하였고, 간혹 보이는 초가도 이미 그 주인이 모두 바뀌었다.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 아무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이처럼 그토록 엄격했던 유교의 전통도, 양반과 상놈의 신분차이도, 흐르는 물과 같은 세월에 의해 자연스럽게 흘러가버리고 만 것이다.

어디선가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분다, 노오란 초가 사이로 마치 소꿉친구 같은 잠자리 서너 마리 날아오른다. 아카시아 숲속에서 매미 소리도 들린다. 그때 떼떼떼, 소리를 내며 여치 한 마리 여름과 가을 사이로, 불교 속의 유교로 전설처럼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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