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서울에 직장을 얻어서 올라가면 이런 것들과 자주 접하지 못하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요 몇 년 동안 직장을 구한답시고 도서관에 박혀 있느라고 늘 함께하며 자라왔던 그러한 그리움과 소원했었던 터였다. 그래서 떠날 때까지 몇일 남지 않은 기간동안 그동안 소원했었던, 그러나 귀중했었던 것들을 만끽해 보려고 작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하나 잊어버린 것이 생각났다. 그랬다. 떠나기 전 그곳엘 찾아가 보아야 했다. 나는 황급히 마루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운동복을 챙겨 입었다. 어머님은 갑자기 평소에 잘 입지 않던 운동복을 갈아입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엄마. 요 뒤에 산에 금방 갔다 오께!” 나는 서울에 취직을 한다고 한동안 연습하던 서울말 다 잊어버리고 급하게 한마디 뱉어 버리고는 집을 나섰다.
금정산. 결코 큰 산은 아니지만 그렇게 만만한 산도 아니다. 길을 잃어서 집엘 못 돌아갈 정도는 아니지만 때로는 한참 고생을 하기에는 충분하게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산. 그래서 내가 가끔 가슴이 답답할 때 훌쩍 산으로 떠나버리면 나를 그 품에 앉아주기에는 충분한 그저 고만한 산이었다.
그랬다. 나의 젊은 날들에 나름대로 힘들 때마다 그 산을 찾곤 하였다. 마침 학교의 도서관 뒤에로 그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 있었다. 때로 집중이 되지 않으면 책을 들고 걸어 다니며 공부를 하곤 하는 내 특이한 공부방법 때문에 가끔 산기슭 만만한 나무덩걸에 주저앉아 한나절 책을 보다 돌아오기도 했다. 때로는 친구들과 어울려 산꼭대기에 있는 유명한 산성막걸리 집을 찾아 파전에 막걸리 한잔을 마시곤 허물어져가는 성곽위에서 산 아래를 내려보곤 하기도 했다.
산에서 내려다보면 올라올 땐 그리도 가파르게 보이던 길이 완만하게 굽이치며 아래로 흘러내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무가 없는 빈자리마다 억새가 가득 차 있었다. 맑은 날. 태양이 따뜻이 내리쬘 때면 가득할 때면 억새들은 햇빛을 머금고, 눈부시게 빛나게 있었다. 바람이 불면 우거진 억새 숲이 바람에 흔들리며 은빛, 금빛으로 빛나는 모습을 보는게 나는 그렇게 좋았었다.
그래. 바로 그 산을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서울로 떠나기 전에 그동안 정들고 그리웠던 것을 다시 한번 찾아보는 이 시간에 그 정들었던 산에 다시 한번 들러보아야 하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산으로 가는 길은 금새 찾을 수 있었다. 금정산은 학교 뒷자락에서부터 시작해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던 우리 집까지도 그 자락을 드리우고 있었다. 집에서 산을 올라간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내발이 저절로 길을 찾아 나를 산으로 인도했다. 그래 자주 찾아간다고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것을 절실히 원할 때 그것은 내 앞에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가 보다.
학교 뒤에서 올라가는 길과는 달리, 집에서 올라가는 길은 평탄하지가 않았다. 좁은 길은 곧잘 끊어졌고, 덤불을 헤치고 바위를 올라서야 다시 조그만 길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면 어떤가. 어쩌면 마지막 산행이 될지 모를 길이 아니었던가. 이별 인사에 그 정도의 땀은 흘려야 아쉬움이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주말이나 휴가 때 부모님을 찾으러 들러도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에 산행을 하는 것은 쉬울 것 같지가 않았다.
길이 험해선지, 마지막으로 찾는 산을 너무 쉽게 떠나기가 쉽지 않아선지 몇 번째 바위위에선가 길게 드러누웠다. 하늘은 잎이 다 떨어진 가지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가지들이 잔가지를 뻗고, 다시 그곳에서 갈라져 나온 잘디잔 가지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나는 산에 오를 때마다 나무에서 가지들이 뻗어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북이 쌓인 잎의 감촉이 발밑에서 느껴지는 것이 좋았고, 내가 지나갈 때 화들짝 놀란 까치가 날개질치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좋았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다시 한번 느끼며 산의 정상에 다다랐다.
정상의 돌로 된 성곽위에 올라서자 시원한 바람이 가슴과, 이마, 머리카락을 휘감아왔다. 겨울이 끝나가는 무렵의 쌀쌀한 그 바람이 그날은 얼마나 시원하게 느껴졌는지! 아직도 내 몸을 감싸던 그 바람의 감촉을 잊을 수 없다. 그랬다. 그날은 내가 그 산과 이별하는 날이었다. 산은 그렇게 시원한 손길을 베풀어 나를 위로하여 주었는지 모른다.
산의 정상에 않아서, 내 몸에 배인 땀이 다 마를 때가지 아래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억새들이 하얗게 지쳐가는 것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너머로 내가 정들어 살아오던 부모님이 계시는 자그만 빨긴 기와를 두른 예쁜 집을 보았고, 내가 젊음을 기꺼이 바쳐 책을 보았던 그 학교가 내려다보이는 것을 보았다. 그 모든 장면을 눈에, 그리고 머리와 가슴에 꼭꼭 담아두었다.
그래서 나이가 든 오늘 같은 날. 삶의 길목에서 한번씩 예전의 그 풋풋함이 그리워질 때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의 모든 것을 하나도 잊지 않도록. 그리움에 휩싸일 때 지그시 감은 눈앞에 그 모든 것을 차례로 하나하나 떠올려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오래오래 앉아 있었다. 억새와 함께, 그리고 바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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