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9일 아프가니스탄 무장 단체 탈레반에게 납치돼 9월 2일 새벽에 한국에 돌아온 피랍자 19명 등 총 21명의 피랍자들에게 우선 무사귀환을 축하한다. 동시에 두 명의 피살된 분들의 삼가 명복을 빈다.
한국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선교활동에 대해 많은 단어들이 생각난다.
“무모하다. 넋 나갔다. 맹목적이다. 저돌적이다. 공격적이다. 정복적이다. 오만하다. 마구잡이다. 참으로 얼굴 두껍다.”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것은 괜한 것일까?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에 의하면 지난해 말 기준 한국 교회가 해외에 파견한 선교사는 228개국에 1만6천616명이다.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막강한 힘을 한국 개신교가 즐기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한국 개신교계에서는 위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위험 지역에 선교사를 얼마나 더 많이 파송하는지를 두고 ‘교회의 힘’을 겨루는 듯한 행태가 아프간 피랍사태를 낳고 말았다.
한국 개신교의 이 같은 정복적, 공격적, 힘 겨루기식 선교에 대해 미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신문은 “한국교회, 19세기 모델 추구”라는 글을 실었다. 신문은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아프가니스탄 내에서의 한국 교회 선교는 100여 년 전 19세기에 미국에서 했던 그러한 모델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며 한국교회의 무모하고도 넋 나간 선교를 꼬집었다.
신문은 “미국 교회들이 개별적으로 해외에 나가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방식에 대해 한 세기동안 비판받았다. 한국 교회들이 이제 미국 주류 교회들이 쓰지 않는 그런 낡은 방식으로 선교 활동을 하는 것 같다”는 시카고에서 발행되는 잡지 〈크리스천 센트리〉편집자 데이비드 헤임(David Heim)의 말을 인용 비판했다.
데이비드 헤임은 “과거 비판으로부터 교훈을 얻은 미국에서는 이제 그런 방식의 선교는 찾기 어렵고, 대부분 소규모 팀을 보내 현지 교회나 현지 기독교 신자와 협력 한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는 인질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국민들의 따가운 비판적 여론에 숨을 죽이며 “국외선교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자성론이 고개를 드는가 하더니, 막상 인질사태가 해결되자 일부 단체에서는 “인도주의적 선교활동을 간섭하지 말라”며 언제 인질사태가 있었느냐는 듯한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이들이 정신이 있는 집단인지 아니면 좀 과격한 말이지만 광신적이며 맹목적인 이른바 “예수쟁이”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온 국민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으고 엄청난 국가에너지를 소비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한 것 같다.
순수하고도 종교적인 열정에 의한 이타적 박애주의적인 실천이라는 선교활동의 긍정적 측면과 한국 개신교들의 제 3세계 등 저개발 국가 등에서 봉사 등 좋은 일을 통해 한국을 알리기도 하는 민간 외교관의 역할 등을 무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선교는 당연히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꼭 위험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해야 종교인으로서 심신이 깊어지는 것인가? 종교인도 인간이다. 위험지역에서의 인간의 목숨이 종교적 신념과 선교라는 활동으로 사라져가도 좋은 것인가? 한국 개신교는 이타적, 박애주의 대신 이기주의 배타주의 독단주의 등이 선교 활동에서 누드처럼 드러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민의 정서와 여론, 국가의 대외 신인도 등은 개신교에 안중에도 없는가?
성서에서 말하는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원래의 뜻은 “이교도를 개종하라”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 그저 순수하고 대가 없는 사랑이요 인류 공영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아프간 피랍사건은 당초의 성서의 뜻에도 맞지 않는 한국 개신교의 독특한 종교문화가 낳은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순수한 뜻을 저버린 선교는 백전백패이다. 선교는 ‘전투(battle)'가 아니라는 사실을 한국 개신교는 인식했으면 한다.
뉴스타운
뉴스타운TV 구독 및 시청료 후원하기
뉴스타운TV







우리나라 예수는 웃기는 예수다.
돈만 좋아하고 목사만이 양산하고 속지말자 예수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