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정부종합청사 내 문화재청(청장 盧太燮)은 사적 제 207호 홍·유릉(경기도 남양주시 소재)내 홍릉 침전 보수공사중 상량문을 발견하고 이를 수습하였다
홍릉은 조선조 제26대 고종황제와 고종 32년(1895년) 을미사변때 일본 낭인에 의해 살해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합장한 동원이실합봉릉(同原異室合封陵)으로 철종(哲宗)이전의 능제(陵制)와는 달리 광무 원년 대한제국의 선포로 황제로 호칭하게 됨에 따라 명나라 태조 능의 제도를 본따 능을 조성하였다.
홍릉 침전은 황제능의 품격에 맞춰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일자형 맞배 목조 건물이다. 문화재청은 2002년 6월 침전 툇간부분 대량의 손상·변형을 확인 조사하고 구조안전 검토를 하였으며, 2002년 11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2003년 8월경 완료할 예정이다.
상량문은 침전 해체과정에서 종도리 장여부분에서 붉은 비단 1필이 950mm×12,900mm 크기로 한지에 싸인채 수습되었으며, 재해방지를 기원하는 수(水)자를 새긴 육각형 은판(지름 45mm, 두께 0.8mm) 3점도 함께 발견되었다.
상량문에는 명성황후의 국모로써의 덕망과 애국심에 대한 칭찬을 하였다. 또한 선조의 종묘사직에 충실하였으며 고독한 백성 즉 아비를 잃은 자식들과 자식없는 노인들에게 쌀과 돈을 나누어 주는 선정을 베풀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 상량문에는 당시 국가의 위기와 백성 고초에 대한 명성황후의 고뇌와 고통 그리고 당시 국난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홍릉 침전은 1901년(광무 5년)으로 고종의 승하 18년전에 건립하였으며 이 때문에 상량문에는 명성황후에 대한 기록만이 봉안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1895년)으로 낭인에 의해 시해당하고 당시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루려 하였으나 고종의 지시로 5차례에 걸친 장례수습회의를 통해 2년만인 1897년에 청량리 홍릉으로 안치하게 되었다. 그후 여러사람들의 주청으로 청량리 홍릉의 풍수적인 불길함을 들어 금곡 홍릉으로 이장을 결정하게 되었고 고종의 지시로 1901년 금곡 홍릉 침전이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이런 전후사정으로 명성황후는 고종이 1919년 승하한 후 청량리 홍릉에서 금곡릉으로 합장되었으며 이로서 능 침전으로서 기능도 건물이 완성된지 18년만에야 비로소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금번 상량문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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