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장갑'에 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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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장갑'에 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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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은 자녀를 고통과 슬픔의 강에 빠뜨리는 일입니다

제가 태어나서 첫돌을 지날 즈음에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별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일상의 신산함과 고독감을 늘상 그렇게 술에 의지하시어 잊고자 하셨지요.

그러나 '과부는 은이 서 말이요, 홀아비는 이가 서 말'이라는 말처럼 우리집의 생활은 항상 가난이 강력한 접착제처럼 그렇게 찰싹 붙어서는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생활이 늘 그처럼 빈한하다보니 추운 겨울이 도래해도 늘상 먹고살기도 바쁜 우리집 형편에 손장갑 하나를 산다는 것은 어쩌면 사치였기에 엄동설한에도 뜨거운 입김을 손에 후후~ 불어가며 추위를 애써 녹이며 학교에 등교하곤 했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약 십리 거리였는데 그처럼 손으로 후후 불어가며 학교에 등교를 했어도 워낙 날씨가 추웠던 탓에 겨우 내내 가여운 제 손은 동상의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제 나이 열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는 주위 분들의 소개로 참하다는 규수와 재혼을 하셨는데 그분이 바로 제게는 새엄마가 되신 분입니다. 새엄마로 인해 아버지께서는 그간의 오랜 방황을 접으시고 술도 끊으시고 생업에 더욱 열정적으로 매진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집의 형편은 나날이 좋아졌지요.

제게도 참으로 살갑게 잘 해주셨던 새엄마는 추운 겨울이 도래하자 어느 날이던가 하루는 시장에 나가시어 제게 벙어리 손장갑을 사다 주셨습니다. 새엄마가 사다주신 그 벙어리 장갑은 추운 날씨에서 제 손을 보호해 줬음은 물론이요, 그동안 제가 경험하지 못했던 엄마의 정까지도 듬뿍 담겨 있었기에 참으로 따스했습니다.

'오복(五福)중의 가장 으뜸은 처복(妻福)' 이랬는데 하지만 아버지는 본디가 처복이 없으셨던가 봅니다. 새엄마는 불과 3년만에 이런저런 사유로 해서 집을 나가셨고 그로 인해 그동안 욱일승천의 기세로까지 정(情)과 재산이 불던 우리집의 가세는 다시금 급전직하 몰락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아버지는 다시금 생업을 내팽개친 채 술에 의존하시는 빈도가 잦아지셨고 우리집의 생활은 궁핍하기가 그지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저를 떠난 새엄마가 너무도 미워서 어느 날 저는 새엄마가 사주신 그 벙어리 장갑을 눈물을 훔치며 아궁이에 집어넣어 불질러 없애 버렸습니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저는 지금 추운 겨울이 와도 장갑을 잘 끼지 않습니다. 스팀이 훈훈한 차를 운행하고 역시도 난방이 잘 된 사무실 환경 탓도 있겠지만 왠지 장갑, 특히나 벙어리장갑에는 그렇게 제 슬픈 과거의 잔영이 아직도 남아있어서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족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작금 우리 사회의 이혼율이 OECD국가중 2위라고 합니다. 이런 가파른 추세로 나가다가는 아마도 이혼율 1위인 미국을 추월할 날도 머지 않은 듯 싶습니다. 부부의 이혼은 자녀를 고통과 슬픔의 강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이혼 없는 사회의 정립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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