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의 좌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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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의 좌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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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산업혁명과 엔지니어링 어프로치 - ②

 
   
  ^^^▲ 산업화 현장과 국토개발 현장을 직접 시찰하시는 박정희 대통령해방후 외국인들은 책을 통해「한국의 상업이란 물물교환의 범주에서 거의 진보하지 못한 상태」또는「조선인이 상업을 중요시하게 될 때는 앞으로 100년은 지나야 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조선조시대의 상공업

한 나라에서 생산된 공산품은 상업인을 통해서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그렇다면 상업상태를 살펴보면 그 나라의 공업형태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상업과 공업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의 상공업 상태를 상업을 통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구한말 우리나라를 시찰한 외국인들은 「이 나라의 상계(商界)는 다른 나라에 비해 극도로 부진하고 미개상태에 있다」라는 공통적인 견해를 발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오래 체류하고 있던 H. B. Hulbert는 「The passing of Korea」라는 책에서 「한국의 상업이란 물물교환의 범주에서 거의 진보하지 못한 상태」. 한 일본인은 기행문에서 「조선인이 상업을 중요시하게 될 때는 앞으로 100년은 지나야 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상행위가 노점상 위주였기 때문에 일 것이다.

 

 
   
  ^^^▲ 시장풍경
ⓒ 서양인이 본 꼬레아(박영숙 편저)^^^
 
 

당시의 우리나라 상행위를 중세기적이라던가, 전근대적이라고 했는데 이런 표현 갖고는 그 실상을 표현할 수가 없다. 외국에서는 멀고 먼 옛날부터 상행위는 건물 안에서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만큼은 「장터(鄕市:향시)」라는 공터가 마련되어 있어서, 여기서 일어서거나 쭈그리고 앉아서 하게 된다.

주민들은 농산물을 갖고 나와 물물교환식의 거래로써 필요한 물건을 마련하는 것인데 이때 물건을 파는 쪽은 「장돌림」이라는 행상인이었다. 주로 보부상(褓負商)이었는데 일부는 자유행상인도 끼어있었다.

▲ 보부상(褓負商)

보부상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이다. 보상은 포목(布木), 주단(綢緞), 화장품, 기타 방에서 쓰는 물건을 보에 싸서 짊어지고 행상하는 상인이며, 부상은 도기(陶器), 철물(鐵物), 목기(木器), 건어(乾魚), 기타 일용기구를 지게로 지고 다니면서 판매(장에서)하는 행상인을 말하는 것이다.

보부상들은 「보부상회」라는 조직을 갖고 있는데, 그 우두머리를 「통령(統領)」이라고 했다. 그들은 패랭이라는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을 특색으로 하며 보부상 상호간의 암호와 또 특이한 인사 범절과 언어가 있었다. 횡적연계가 완전하여 서로 두둔, 보호하고 대외적으로는 단체적 행동을 했다. 엄격한 규약이 있어서 만일 회원 중에서 그 규약에 위반되는 행동을 하면 다시는 「장」을 돌며 행상할 수 없도록 가혹한 제재를 가했다.

전국에는 약 1,100개소에 달하는 「장터」가 있었는데 「5일장」이라고 해서 한달에 6회의 「장」이 서게 된다. 그래서 전국에서는 한달에 6,600번의 「장」이 서는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의 상행위는 「보부상」이라는 행상인에 의해 수매, 운반, 판매되는 구조였다는 결론이 된다. 순전히 인력에 의해 한 나라의 모든 물량을 수송한다는 것은 수송기관이 발달되지 못했다는 점도 있으나 그보다는 우리나라의 물동량이 얼마나 미미했느냐를 잘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국민들의 생활은 자급자족 상태의 경제수준을 넘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 좌상(坐商)

이상과 같이 「시장바닥」에서 행해지는 장사 외에 건물 안에서 상행위를 하는 소위 「전방(廛房)」「가게(가가(假家)」,「도가(都家)」라는 것이 있었다. 주로 서울을 위시해서 각 도의 감영 소재지(名道 監營 所在地) 등 대도시에만 있었다. 현재 사용하는 국어사전에도 「전방」이나 「가게」라는 단어가 남아 있는데 모두 건물과 관계되는 말이다. 조금 부연해서 설명한다.

- 전(廛), 방(房), 가게

정부는 일정한 지역에 상점용 건물을 지어주고 점포료를 징수했다. 정종(定宗) 원년에 ―자혜정교(自惠政橋)에서 창덕궁 입구까지― 좌우로 800여칸의 행랑(行廊)을 지었다. 이것이 「시전(市廛)의 시초이다」라고 나온다. 정부는 이들 「시전」에 「난전(亂廛)」을 금하는 특권을 부여했는데「난전」이라는 것은 함부로 상점을 열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다.

그리고 정부에서 필요한 모든 물품은 이곳에서 납품을 했으니 독점권을 가진 어용상인들이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오래 계속되지 못했는데 정부나 벼슬아치의 착취가 심해 영업상 채산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전」중 가장 규모가 큰 것 6개를 「육전(六廛)」,「육의전(六矣廛)」또는 「육주비전(六注比廛)」이라고 했는데, 일종의 도매상이었다.

1) 선전(주단, 포목상)

2) 면포전(綿布廛)

3) 면주전(綿紬 또는 明紬廛)

4) 내외어물전(內外魚物廛)

5) 지전(紙廛)

6) 저포전(苧布廛: 모시, 대마포상)

이상 「육전」은 시대에 따라 일부 내용이 달라졌으나 대동소이했고 나중에는 도가(都家)라는 명칭을 붙여서 부르게 됐다. 그러나 「도가」라는 것은 흔히 도매하는 집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조선시대에서는 「공동창고 겸 상점」이라는 뜻이다.

즉 「도(都)」라는 글자는 「많은 양의 상품」을 매매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공동창고 겸 상점」의 건물이 크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술도가」는 술을 양조하는 곳이니 건물이 클 수밖에 없다. 청포(靑布)전도가, 어물전도가도 큰 건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방」한칸가지고 장사가 되는 업종도 있다. 소경방(昭鏡房), 금은방(金銀房), 복덕방 등이다.「방」보다 큰 장사집도 있다. 그러나 살림집은 아니었다. 그래서 가게(가가:假家)이다. 곡물 파는 곳에는 창고가 필요했다.

그래서 「쌀집」,「쌀가게,「쌀전」이다. 음식점도 규모가 컸다. 그래서 「상밥집」,「장국밥집」이라며「집」자를 썼다. 한문으로도 「상식가(床食家)」「탕반가(湯飯家)」라며「집가(家)」를 붙였다. 영어에서 Beer House나 Steak House와 같다. 술집도 큰 것은 「술전」이라고 했는데 「술전」은 후에 관(館)으로 개칭했다.「명월관」이 그 예이다.

전국적인 연쇄점 조직을 갖고 있는 것도 있는데 개성상인이 운영하는 조직의 지방출장 상점을 「송방」, 서울상인의 것을 「경방」이라고 했다. 서울 종각 뒤에 동상전(東床廛)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는 일종의 백화점으로서 주단포목, 혼수용품, 관립모자(官笠帽子) 등 여러 상품을 한 건물 안에서 분야별로 나누어, 좌판(坐板) 즉 앉아서 판매했다.

따라서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은 동상전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소요물품을 거의 모두 살수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연립군"이라는 거간꾼이 진치고 있어 물건을 소개하고 매매를 성사시키면서 구전을 챙겼다.

- 서울의 상가

당시 서울에는 종로(鐘路) 복판 일원에 있는 「육의전」,「무슨도가」하는 몇 개 상점과 「동상전」 , 전동(典洞)에 있던 「가죽 및 모물상(毛物商)」,「보료상」 동현(銅峴)의 「신발가게」,「약종상」,「건재상」, 남대문 내에 있었던 「오방재가(五房在家: 경방, 송방과 같은 연쇄점 조직)」, 종로 뒷골목의 「입전(笠廛: 모자 판매점)」, 「소경방(거울 등속 판매점)」「금은방」등속에 있었는데 이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이들 업자가 취급하는 물건의 종류가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공산품의 전부라는 뜻이 된다.

 

 
   
  ^^^▲ 종로의 상점
ⓒ 서양인이 본 꼬레아(박영숙 편저)^^^
 
 

당시 서울의 인구는 어느 정도였을까? 흔히 만호한양(萬戶漢陽)이라고 했으니 서울에는 집이 10,000호 미만이었다는 뜻이다. 한 집에 7~8명이 거주했다면 서울인구는 7~8만명이다. 조선조시대의 서울이라는 도시는 이 정도였을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조선조시대의 작업장

이상과 같은 자료를 기초로 조선시대의 제조업 실상을 재구성해 본다.

우선 5인 이상이 단체로 일하고 있는 작업장은 어떤 곳이 있을까? 나라에서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작업장(소위 현재의 국영기업체) 이외에는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벽돌, 기와, 옹기 등을 굽는 도자기 가마, 큰배를 건조하는 조선소, 한지(韓紙) 뜨는 곳, 소금 굽는 곳, 절에서 책을 인쇄하는 곳 정도가 떠오를 뿐이다. 공장이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이다. 제철소도 없어 철물은 주로 중국에서 수입해서 썼다.

대장간도 2~3명이 일하면서 농기구나 소달구지 바퀴를 만들었고 그 유명한 안성유기나 전주 부채도 가족단위로 만들었고, 약간의 금은(金銀)세공품, 왕골 돗자리, 대나무 가공품, 담뱃대도 가족들끼리 만들었으며 면포, 모시, 명주 등은 집안에서 부녀자들이 짰다.

술도가(양조장)도 가족 단위의 공장이다. 조선시대의 제조업이란 이런 정도였을 것이다. 더욱이 외국과 교역할 정도의 상품은 인삼정도가 아니었을까?

조선조시대의 상공업 정책

조선시대를 파악하려면 우리나라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사실은 조선시대의 모든 면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 왕실은 중국 황제를 군주로 모시고 신하된 의무를 다 함으로써 국가안전을 보장받았다. 이러한 입장이다보니 우리나라로서는 중국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않아야 했다.

군사력을 강화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오히려 때마다 조공을 바쳐 중국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했다. 또한 조선 왕실은 유교를 국교(國敎)로 정하고 中國보다 더 숭상하는 유교 모범국이 됐다. 사농공상의 계급제도도 엄격해서 상공인(商工人)을 중국보다 더 천시했다.

조선 왕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중국이 우리나라 영토를 탐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나라가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나라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했다. 금이나 은 등 귀금속도 없고, 진귀한 특산물도 산출되지 않음을 보여야 했다. 더욱이 이런 물건이 있으면 중국 황실에 조공으로 바쳐야 하고 중국 사신에게도 뇌물로 바쳐야 했으니 없는 것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우리나라는 먹고 살 정도의 생산품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외국과의 무역도 금지시켰고 광산도 폐광시켰다. 조공품 내역도 인삼, 호랑이 가죽, 나전칠기, 붓, 방석류 등 보잘것없는 것이었고 양도 많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우리나라 영토는 탐낼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중국에 인식시키고자 했다.

 

 
   
  ^^^▲ 서도에 있는 대장간거문도 에는 철광석이 없어 쇠붙이를 녹여 연장이나 생활용기를 만들었다. 1885년 당시 거문도의 유일한 공산품 생산시설이었을 것이다.
ⓒ 서양인이 본 꼬레아(박영숙 편저)^^^
 
 

이런 환경에서 상업, 제조업, 무역 등이 발전할 리 없었다. 제조업이란 단지 진상품 제조와 국민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물건을 만드는 정도에 그쳤다. 공산품의 대량유통이 없으니 상업이 발달할 리 없었다.

그 결과 서울을 비롯한 극히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상설 상점이 없었다. 시장바닥에서 생필품을 물물교환하고 우수리 돈만 엽전으로 계산할 정도였으니 화폐가 발달할 리도 없었다. 이렇게 돼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금화나 은화가 없는 나라가 되었다. 中國이나 日本에서 중상(重商)정책을 쓴 결과 거대한 기업가가 생겨나고 나라경제가 부강해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화폐가 없는 나라

우리나라에는 화폐가 없었다.

고대 희랍이나 로마 때 사용되었고 성서에도 나오는 금화나 은화가 우리나라에는 없었다. 그저 엽전(葉錢)만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는 은화(銀貨)가 화폐의 기본단위이다. 물론 금도 화폐구실을 했고 보조화폐인 엽전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당(唐)나라 때, 이미 개원통보(開元通寶)라는 동전이 널리 유통되었다고 되어 있다. 송(宋)나라 때는 2억 관(貫)이나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 관이 1,000장이니, 2천억 개의 동전이 유통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엽전이란 동의 합금으로 동전 자체에 가치가 있어 외국과의 무역에서도 그대로 유통되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동남아, 페르시아까지 유통되는 국제화폐 구실을 했다. 그러나 동전만으로는 큰 거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은전이 사용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금화가 기본이다. 단위가 금 1냥(兩)이다. 은도 화폐구실을 했고 엽전도 유통되었다. 일본에서 부자라고 하면 최소 금화 1,000냥은 있어야 했다. 1,000냥을 한 궤짝에 넣어서 1,000냥 상자라고 했다. 큰 장사꾼 창고에는 이런 1,000냥 상자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금화와 은 또는 엽전간의 교환비율이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이들 화폐를 교환해주는 재벌급 환전상(換錢商)이 있었다. 지금의 은행이다. 그래서 마르코 폴로가 일본을 황금의 나라라고 칭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은화나 금화가 없었다. 은화나 금화가 있으면 상주국(上主國)인 중국에 빼앗기게 되니, 아예 만들 생각을 안한 것이다. 그래서 엽전만 있게 된 것이다. 엽전이란 보조화폐이다.

물물교환을 주로 하면서 우수리 돈을 계산할 때나 쓰여지는 정도였다. 현대 사회에서 동전밖에 없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그리고 사실상 큰 상거래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보조화폐를 만드는 것조차 힘에 벅찬 일이었다. 조선 태종(太宗) 때 비로소 조선통보(朝鮮通寶)라는 엽전을 만들었다. 그때까지 상거래는 주로 물물교환이었고 일부만 중국에서 수입한 엽전을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 엽전을 만들어낸 것은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동(銅)이 부족했다. 궁여지책으로 범죄자들로 하여금 동을 바치게 하고 죄를 면해주었다. 무당의 세금으로도 동을 바치게 했다. 신라시대, 고려시대의 불상, 불구(佛鐘, 촛대 등)를 녹여 동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동의 국내생산을 적극 장려했으나 광산들은 이미 폐광한 후다.

창원(昌原)지방이 제일 큰 산지였는데, 매년 100근(斤)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 수입하였다. 세종 10년(1408)에 동 2만 8천 근을 수입하고 면포 2,800필과 바꾼 기록이 있다. 그 후 동 수입은 계속 증가하여 조선 말기에는 매년 10만 근 이상이 수입되었다. 주로 면포와 바꾸었는데, 면포 한 필에 동 상품(上品)은 2근 반, 하품은 5근까지 받았다.

은도 일본에서 수입했다. 중종 37년(1542)에는 은 8만 냥을 면포와 교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상태가 20세기초까지 계속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는 농업을 제외하고는 광업이나 공업, 상업, 넓게는 경제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던 상태였다는 결론이다.

조선조시대의 우리나라 금융

▶ 전당포와 대금업자

돈을 빌릴 사람이 담보물이 충분하면 전당포로 갔다. 정부는 전당포를 규제했는데 상 · 중 · 하 3등급으로 구분하고 과세를 했다.

상등포 : 자금 2만냥(兩) 이상

중등포 : 자금 1만냥 이상 2만냥

하등포 : 자금 1만냥 이하

- 전당포의 이자는 (광무 2년 전당포 세칙에 의하면)

원금 1냥~20냥 : 1냥당 월 5분(5%)

원금 20냥~ 100냥 : 1냥당 월 4분(4%)

원금 100냥~1,000냥 : 1냥당 월 3분(3%)

원금1,000냥~ 2,000냥 : 1냥당 월 2분(2%)

원금 2,000냥~3,000냥 : 1냥당 월 1분(1%)

즉 정부는 월리(月利)를 최저 1%에서 5%, 년리(年利)를 12%에서 최고 60%까지를 인정했다. 저당 맡길 물건이 충분치 않으면 「거간꾼」을 통해서 돈을 빌려 썼다. 이자율은 일반 대금업자는 월 5%, 고리대금업자는 약 10%였는데 선이자를 떼었다. 원금과 이자를 합해서 일수(日收)나 월수(月收)로 갚아가기도 했다.

▶ 장변돈

장변이라는 것은 시장 주변에서 갑자기 유통자금이 필요할 때 고리업자로부터 단기간 융통하는 것이니 고리중의 고리가 된다. 「한 판수」에 3~5%인데 「한 판수」라는 것은 5일장이 서는 곳에서는 5일인데 고장에 따라서는 7~8일인 곳도 있었다. 한 예로 5일 한 판수 3%이면 월 18%라는 고리가 된다.

▶ 개성의 시변

상업이 가장 발달된 개성(開城)에서 성행되었던 소위 「시변(時邊)」이란 제도를 소개한다. 「장변」과는 음(音)은 같지만 기실은 다른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한국에서의 특이한 금융방식의 하나이다. 개성상인 거두들이 유휴자금을 투자하는 한 개의 방식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차금인(借金人)을 물색하거나 감정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환전거간(換錢居間)」이라는 직업적 중개인을 통해서 중소(中小)상업자에게 금융을 해주는 것인데 차주는 누가 그 돈을 쓰는지를 알 필요가 없다.「거간」만을 전적으로 신용한다. 거간은 돈 쓸 사람을 구하여 자기의 보증으로 융통을 알선하고 1분5리의 거간료를 받는다. 그 대금의 결제는 대개 2월과 7월의 일년에 2회로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자율이다.

이 금융은 금전을 빌려줄 때에 정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갚을 때 그때 그때의 시황에 비추어서 쌍방 협의하에 이자율을 정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시변(時邊)」이라고 한다. 간변(間邊)쟁이라는 금융업자도 발달되고 있었는데 장기의 금융을 받아 가지고 이것을 소상인이나 농민층에게 비교적 단기로 그리고 상당한 고리(월평균 6분변(邊))로 대부함으로써 중간취득을 한다.

▶ 가장 가혹한 금융제도

정부의 돈을 높은 이자를 내고 빌릴 수도 있다. 그러나 빌려 쓴 돈을 갚지 못하면 옥중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고, 자칫하면 곤장을 맞아 병신이 되기 십상이다. 정부는 보릿고개나 가뭄이나 수해, 기타의 변란에 대비해서 사창(社倉), 관고(官庫), 의창(義倉), 상미창(常米倉) 등을 시설하고 운영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많은 이자를 챙기는 대금업의 일종이었다.

사창 등에서 빌려쓴 곡식이나 「변돈」을 갚지 못하여 처자를 팔아서 갚거나 목을 매어 자살하는 사건들이 기록에 나오는 것을 보니 가장 가혹한 금융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외에도 특수한 대금형식이 각 지방마다 행하여졌지만 결국은 그 모두가 사회경제의 몰락을 독촉하는 불미한 고리업자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당시는 소상인과 농민이 이자를 갚다가 일생을 마감하는 비참한 환경 속에서 살아야 했던 시절이다.

이조시대에는 「금화」나 「은화」가 없었고 보조화폐인 「엽전」만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상거래는 물물교환식으로 이루어졌으니 화폐의 유통량이 많을 리가 없다. 그러니 「돈」이라는 것은 귀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귀한 돈을 빌려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자율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높은 이자를 물고 사업을 한다는 것은 타산이 맞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당시의 금융제도는 사업자금조달 목적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다만 긴급한 유통자금이나 개인적인 목적으로 돈을 빌려 쓸 때에 활용됐다. 물건이나 토지를 담보로 할 때에는 기한을 어기면 빼앗기게 되며, 담보 없이 빌려쓰고 갚지 못하면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됐다.

여러 문헌을 보면 주로 돈줄은 양반, 그 중에서도 사대부였다고 한다. 이들이 보유하게 된 유휴자금은 「거간」을 통해서 최종 수요처까지 풀리게 되는데, 이자는 전주(錢主)와 「거간」이 나누어 먹는다. 그렇다면 당시의 금융이란 전주의 재산 불리기 수단뿐이었고,「거간」은 구전(口錢)을 먹는 직업적 중개인이었다. 현재의 은행설립 목적과는 다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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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향미 2007-05-11 23:08:20
안녕하세요. 경기대학교에 재학중인 심향미입니다.
보부상이 아닌 부보상이 정식명칭입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는 악랄한 식민사학을 유포시켰습니다. 또한 일제시기에 조선역사를 변조하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지른 가운데 하나가 부보상 명칭을 보부상으로 바꾼 것입니다. 부보상은 태조이성계가 중상육성정책으로 하사한 명칭이고, 보부상은 조선총독부에서 억상이간책략으로 변조한 명칭입니다. 일제의 잔재인 보부상을 퇴출시키고 한국전통상인의 뿌리인 부보상의 명칭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이민영 2007-05-11 15:55:15
안녕하세요. 경기대학교 경영학과 재학중인 이민영 이라고 합니다. 위의 기사 내용 중 보부상이라는 표현이 잘못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보부상이 아닌 “부보상”이 정식명칭입니다. 보부상은 일제 조선총독부가 억상이간정책으로 변칭 시킨 잘못된 말입니다. 일제의 잔재인 보부상을 퇴출시키고 한국전통 상인의 뿌리인 “부보상”의 명칭을 회복해야 합니다. “부보상”으로 정정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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