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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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백제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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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와 침향

1. 침향의 역사

우리가 알고 있는 오분향례는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의 향기가 삼천대천 세계에 두루 퍼져 우주 만물에 순화 동화 하는 종교 불교의 한 모습이다. 향은 불교에서 향 등 차 꽃 과일 쌀이라는 육법공양의 첫째이자 가장 귀하고 성스러운 공양물로 꼽혀 불교 3천년사에 금보다 귀한 것으로 인식 되어 온 것이다.

향은 한반도에 불교가 도래한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에 자연스럽게 도래한 듯 하나 문헌으로 확인 할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전하는 묵호자의 기록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6세기에 와서야 중국과 교통을 한 나라다.

상대국가는 양나라다. 양나라는 오래 유지된 나라는 아니나 양무제가 불교를 선양 했고 보리 달마가 인도에서 들어와 선풍을 일으킨 불교의 나라다. 이 양을 다녀온 사신이 향을 얻어 왔는데 나라안에

사용법을 몰라 전전긍긍 하자 묵호자(墨湖子)가 쓰임을 알려 주는 기록이다. 묵호자는 서역에서 들어 와 있던 포교사로 인식 된다.

불교는 신라 고려를 거쳐 이 땅에 절정의 종교적 문화적 성취를 이룬다. 고려시대의 불교의 대표적 행사는 팔관회다. 팔관회는 향으로 시작 해 향으로 끝나는 행사였다. 양나라에서 향이 들어온 이후 불과 몇 세기만에 향은 이 땅의 대표적 최상급 문화의 한 종류가 된 것이다.

불교사회에서 유교 사회로 정신적 사상적 페러다임이 바뀐 조선 시대에 와서 팔관회는 사라 졌으나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이 침향이다.

○太上王遣成均直講權克和, 掘沈香于羅州^八歆島。 先是, 克和倅羅州時, 因察鹽盆到八歆島, 見短碣在草莽間, 其銘略曰: “統和二十年, 道俗香徒三百餘人, 爲沈水香事, 在衝見正南百步, 限百年。” 克和寫其文以進, 故遣之, 竟不得而還。 태상왕이 성균 직강(成均直講) 권극화(權克和)를 보내어 나주(羅州)의 팔흠도(八歆島)에서 침향(沈香)을 캐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극화가 나주 군수(羅州郡守)로 가 있을 적에 염분(鹽盆)을 살피기 위하여 팔흠도에 이르니, 작은 비(碑)가 풀 속에 있는데, 그 비명(碑銘)에 대략 이르기를,

“통화(統和) 20년에 중과 속인(俗人)의 향도(香徒) 3백여 인이 침수향(沈水香)을 만드는 일로 충현(衝見) 정남방 백보(百步) 지점에 있었는데, 그 기간은 백년(百年)까지라.”

고 하였다. 극화가 그 글을 써서 올렸으므로 보냈더니, 마침내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태종이 권극하를 시켜 남해의 섬으로 보내어 침향을 캐오게 한 기록이다. 보물 찾기를 연상 시키는 대목이다. 이 기록은 침향에 대한 두 가지 증거를 제시 한다.

*수침향이 있었다.

* 침향이 매우 고급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조선 왕실이 침향을 구하는 노력은 필사적이다. 세종 4년의 기록외에도 세종 당시에만 20여건의 기록이 있다. 그중 두가지만 살펴 보자.


琉球國王二男賀通連遣人致書于左、右議政, 獻丹木五百斤、白磻五百斤、金襴一段、段子一段、靑磁器十事、深黃五十斤、川芎五十斤、藿香五十斤、靑磁花甁一口、沈香五斤。 回賜九升白紵布二十匹、黑麻布三十匹、白紬布二十匹、七升緜布四十匹、六升綿布百十一匹、五升緜布二百匹。 令禮曹判書答書曰:

使至辱書, 從審動履嘉裕。 所獻禮物, 謹已啓納。 涉險修睦, 敢不爲喜? 仍將土宜, 就付回使, 不腆爲愧。

유구(琉球) 국왕의 둘째 아들 하통련(賀通連)이 사람을 보내어 좌·우 의정에게 편지하고, 단목(丹木) 5백 근(斤), 백반(白磻) 5백 근, 금난(金爛) 1단(段), 단자(段子) 1단(段), 청자기(靑磁器) 열 가지, 심황(深黃) 50근, 천궁(川芎) 50근, 곽향(藿香) 50근, 청자화병(靑磁花甁) 하나, 침향(沈香) 5근을 바치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회답으로 구승 백저포(九升白紵布) 20필(匹), 흑마포(黑麻布) 30필, 백주포(白紬布) 20필, 칠승 면포(七升綿布) 40필, 6승 면포 1백 11필, 5승 면포 2백 필을 주고, 예조 판서로 하여금 답서를 하게 하니, 그 글에는,

“사신이 이르러 보내 주신 글을 받아 보아 존체가 평안하시고 다복하심을 살펴 알게 되며, 보내신 예물은 삼가 이미 국왕께 아뢰어 바치었습니다. 험난한 바닷길을 건너와 국교를 돈목(敦睦)하게 하시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돌아가는 사신 편에 우리 토산물을 부쳐 보내오며, 변변치 못함을 부끄러워합니다.”

○日本國筑前州太守藏親家遣人獻蘇木二百斤、白(磻)〔礬〕一百斤、硫黃三百斤、肉桂十斤、胡椒五斤、沈香二斤、深黃五十斤、白蠟二十斤、良香十斤、緇梅木百斤, 上賜黑細麻布二十匹、緜布一百二十匹。


일본국(日本國) 축전주 태수(筑前州太守) 장친가(藏親家)가 사람을 보내어 소목(蘇木) 2백 근(斤), 백반(白磻) 1백 근, 유황(硫黃) 3백 근, 육계(肉桂) 10근, 호초(胡椒) 5근, 침향(沈香) 2근, 심황(深黃) 50근, 백랍(白蠟) 20근, 양향(良香) 10근, 치매목(緇梅木) 백 근을 바치니, 임금이 흑색 세마포(細麻布) 20필과 면포(緜布) 1백 20필을 내려 주었다.

이 기록은 유구국과 심지어 일본의 일개 주지사에 까지 보폭을 넓히며 침향을 구하기 위한 조선 왕실의 노력을 보여 준다. 유국국과 일본에서 보내온 선물중에서

최고로 손 꼽히는 명품이 침향이다. 침향이 겨우 한 근 두 근 정도의 소량임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속의 침향의 기록은 250건에 달 한다. 침향의 수입과 신하들이나 사찰등에 선물용으로 쓰이는 기록과 침향으로 인하여 나라의 제정을 걱정 하여 침향을 금하자는 논의등이 분분 하다.

침향은 남방 지역에서 만 자생 하는 특별 한 수종에서 얻어 지는 고급 향으로 우리나라에 삼국시대 부터 들어와 고급 문화의 하나로 자리 하며 수입으로 수요를 감당 치 못하다가 고려 말에 와서 침향과 비슷한 수조인 향나무를 베어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점에 수침향을 하여 보충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침향법으로 만든 침향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오리지날한 침향의 부족이 부른 대안이다. 침향의 고급성은 고운 최치원이 지은 진감국사비에도 고스란히 반영 된다.

진감국사가 어렸을때 아이들과 놀며 나무잎을 태워 향이라 하고 꽃을 꺽어 공야으로 삼고 놀았다는 것이다. 침향이 상 하층에 넓게 퍼져 있었고 한편으로는 누구나 침향을 살라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했던 반증이다. 그러나 정작 침향은 한반도에서 미륵 신앙으로 나타 난다.

2. 미륵 침향으로 오다.

아난존자가 세존에게 물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미래에 이 땅에 계두성이 있을것인데 땅이 기름지고 백성은 번성한다. 사람들은 질병을 모르고 장수 하며 한 마음으로 화합하고 사랑한다. 계두성을 다스리는 왕이 전륜성왕이고 그의 신하들중 한 가정에서 미륵이 태어 난다.그가 오는 곳이 도솔천이다. 그는 8만4천년을 살것이며 법은 8만4천년을 갈 것이니 오직 그의 나라를 보려거든 부지런히 정진하고 배우라.]


ㅡ어둠에 다가갈때는 서서히 완만하게.

미륵하생경은 불교의 경전중의 하나다. 불교는 지극히 생활 불교의 방편으로 지장신앙을 중심 삼고 도무지 현실에서 해결키 어려운 문제들은 미륵 신앙이란 용천[꿈의 세계]으로 풀고자 하는 양 날개로 9만리 장천을 날아온 대 사상이다.

불교는 8톤 트럭으로 1천여대의 분량에 달하는 논 소 율로 이론을 삼고 소진 공양이란 진중한 결단을 하는 우직한 신도들에 의해 유지 발전 되어온 종교다.

팔리어로 쓰여진 초기의 불교는 지극히 현실 참여적이다. 불교는 애초 현실속에서 모든것을 구하고 해결 하고자 했다. 중아함경으로 추론이 가능한 세존의 원음은 간단 명료하다. 인간속에 들어가 인간을 구하자는 세존의 사상이 시간이 지나며 복잡다기 하고 신비화 된것은 유감이다. 그 또한 불교라는 큰 세계를 위한 변증일까.

우리나라에 미륵 신앙이 융성한것은 백제 무왕때이다 . 무왕은 전술전략가로 불교의 병책으로 미륵 신앙을 활용해 성공을 이룬 왕이다. 백제에 미륵신앙이 널리 보급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륵 신앙은 성왕이 겸익을 인도로 보내어 율장 81권을 수입할 때 부터 미륵신앙은 충청 전라 지역에 번성 했던 종교다.

무왕은 29대 법왕의 아들이다. 법왕은 재위 2년만에 죽었고 그위 왕인 혜왕이 1년만에 죽는 격동기에 왕에 등극한 무왕은 재위초 미륵신앙을 방책으로 미륵의 화현을 모토로 세고취화를 견지한다.

얼마전 10세기의 고문서 한 점이 일본에서 공개되었는데 '관세음응험기'다. 이 기록은 미륵보살의 내력을 적고 백제 무광왕(무왕)의 기록을 적고 있어 우리 사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기록에 그동안 우리 학계의 변방에서 전설처럼 떠돌던 익산 금마의 백제 왕도설의 단서였던 탓이다.

- 무광왕이 지모밀지(祗慕密地)로 천도하고 새로운 정사(精舍)를 지었는데 정관 13년(639년) 겨울 큰 벼락이 내려 제석정사(帝釋精舍)가 재해를 입었다.

익산 금마지역이 백제의 왕궁지라는 말은 이미 이 지역에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서 기록에 단 한줄도 그 기록이 없는 탓에 그저 시골의 전설로 치부되어 오다가 관세음보살응험기가 나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대단한 성과를 보게 된다.

동양 최대의 사찰지(5만여 평에 해당)인 미륵사터와 그리고 그 주변에 아주 견고하고 공을 들여 지었던 듯한 대형 집터(궁터)에 최고급 수막새와 기와 파편, 그리고 회충 촌충의 죽은 알까지 나온 대형 화장실터의 발굴은 이 지역에 상당한 규모의 사람들이 모여 산 궁이었다는 반증이다.

동시에 관세음보살응험기의 기록에 보이는 제석사란 절의 와편이 궁터의 뒷쪽에서 발굴되어 이 책은 고서의 범주에서 사서(史書)로 인정을 받는다. 미륵사는 바로 이 관세음보살 응험기가 나와 빛을 본 시찰이다. 무왕도 마찮가지 일 것이다.

ㅡ세력이 약 하면 화평을 취하라.

무왕은 왕실의 후계구도에서 밀려 금마에서 청년기를 보낸다. 그는 금마에 은둔 하듯 살며 준비하고 기다린다. 서동요란 노래를 지어 신라의 선화 공주를 대려 오는 간계를 성사시켜 금마지역의 인정을 받는 한편 자신이 왕실의 친자가 아니라 사자산의 용이 자신의 어머니를 겁간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소문을 내어 치열한 왕실 암투에서 비켜 서 있다가 서슬 퍼런 청년기에 대업을 잇는 신중하고 주도면밀한 사내였다.

순식간에 왕위에 오른 무왕은 자신을 견제하려는 왕족과 귀족들을 일거에 제압할 방책을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미륵 하생경의 실현이다. 무왕은 온 나라에 미륵 하생경을 퍼트려 자신이 전륜성왕임을 공포 한다. 당시 불교 국가를 자처 하던 백제의 사회 분위기는 미륵 하생경에 환호 했고 전륜성왕의 등극을 축복했다.

무왕은 이런 백성들을 부추겨 왕족 과 귀족들을 압박 했고 그들 가정에서 미륵이 태어 날 거라는 신념을 주어 그들을 분열 내지는 동조세력으로 만든다.

무왕은 백성들과 귀족들의 힘을 모아 익산 사자산에 거대 사찰을 짓는다. 한반도 아니 동양 역사상 가장 큰 가람으로 여겨지는 미륵사의 창건을 보게 된 것이다. 5만여평의 대지에 오늘날 30층 높이에 해당하는 거대한 석탑 두 기를 세운 미륵사는 사찰임과 동시에 새로운 도읍의 기반이 된다.

무왕은 미륵 하생경을 내세워 사비에서 금마지역으로 수도를 천도 하려는 놀라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다. 무왕은 현실에 안주 하려는 귀족 기득권층을의 안일함을 깨고 패배주위에 침잠했던 백성들의 심성을 자극해 백제의 제 2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뛰어난 왕이었다.

그는 재위 40년간 신라를 반도의 한 끝으로 몰아 세웠고 미륵사 건립은 물론 사비에 신선이 뛰어 놀았다는 밀교사원 왕흥사를 세운 불왕이었다. 무왕은 미륵사에서 침향의 오리지널을 보여 준다. 법당을 연못을 메워 세우고 용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든 이유가 그것이다. 무왕은 연못속에 수침향을 하여 장차 자신의 후대에 올 미륵의 재림을 기다린다.

3. 침향의 효용성.

침향은 우리의 역사속에서 보물중의 보물로 인식 된다. 조선 왕조실록 정조 17년의; 기록이다.

臣等由口外取路, 直向熱河, 他餘任譯及幕屬, 領率方物雇車, 一行人馬, 由山海關, 直向燕京。 六月二十八日到瀋陽, 七月初二日到白旗堡, 初四日到新店, 捨大黑山大路, 徑取白臺子路, 過廣寧地界及義州府城。 初七日出口外, 初九日到朝陽縣, 十二日到建昌縣, 閣老和珅送軍機章京, 促臣行曰: “若在四百里內, 兼程疾馳, 可趁十五日。 大慶宴禮在十六日, 必及其前。” 臣等自建昌縣, 晝夜行, 十五日申時達熱河。 臣等陪表咨, 向禮部, 滿侍郞鐵保曰: “各國使臣, 皆親呈表文於御前, 本國使臣, 亦於明日宴禮, 親呈。” 鐵保引臣等, 先奉萬壽進賀表文, 入殿庭。 和珅以爲, 表文姑待皇旨親呈, 只使臣等先入。 鐵保還傳表文於通官, 引臣等, 立殿陛下。 閣老和珅、福長安、王杰等, 左右侍立, 皇上御沈香榻上, 後倚沈香屛, 下布黃氍毹。 和珅出傳皇旨, 使臣等進前, 臣等進跪 진하 정사(進賀正使) 황인점(黃仁點)과 부사(副使) 서호수(徐浩修)가 장계하기를,

“신 등은 관문 밖으로부터 길을 잡아 곧바로 열하(熱河)로 향하였고, 그 밖의 역관(譯官) 및 부하들은 토산물 수레와 인부와 말을 거느리고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곧바로 북경(北京)으로 향하였습니다. 6월 28일에 심양(瀋陽)에 도착하고 7월 2일에 백기보(白旗堡)에 도착하였으며, 4일에 신점(新店)에 도착하여 대흑산(大黑山)의 큰길을 버리고 백대자(白臺子)의 지름길을 취하여 광녕(廣寧) 지경과 의주부성(義州府城)을 거쳐 7일에는 관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9일에는 조양현(朝陽縣)에 도착하였으며 12일에는 건창현(建昌縣)에 도착하였는데, 각로(閣老)인 화신(和珅)이 군기(軍機) 장경(章京)을 보내 신의 길을 재촉하여 말하기를 ‘만일 4백 리 이내의 거리에 있을 경우 밤낮으로 달려간다면 15일에 대어갈 수 있다. 대경연례(大慶宴禮)가 16일에 있으므로 반드시 그전에 가 닿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은 건창현에서부터 밤낮없이 걸어서 15일 신시(申時)에 열하에 다달았습니다. 신 등은 표문과 자문을 받들고 예부(禮部)로 향하였는데, 만족(滿族)의 시랑(侍郞) 철보(鐵保)가 말하기를 ‘여러 나라의 사신들이 모두 표문을 어전(御前)에 직접 바쳤으니, 본국의 사신도 내일 연회 때 직접 바치라.’ 하고 철보는 신 등을 인도하여 먼저 만수절 축하 표문을 받들고 대궐뜰로 들어갔습니다. 이에 화신이 ‘표문은 황제의 지시를 기다려 직접 바치게 된다.’고 하면서 신 등만 먼저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철보는 표문을 통관(通官)에게 되돌려주고 신 등을 인도하여 대궐뜰 아래 서게 하였으며, 각로 화신·복장안(福長安)·왕걸(王杰) 등은 좌우에 시립하였는데, 황제는 침향탑(沈香榻) 위에 나아가 뒤로는 침향병(沈香屛)을 의지하고 바닥에는 누른 주단을 깔았습니다.

중국의 황제는 청의 옹정제다. 옹정제는 강희제의 아들로 사치와 호사를 누리던 황제다 . 조선의 사신단이 중국의 황제를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사신으로 가도 대개는 유력자들을 만나 외교 관계를 마치고 돌아 오는 것이 다반사다.

조선 사신단은 황제의 모습에 감격 하면서 특히 놀라움을 표시 한것이 바로 침향으로 만든 의자와 집무실을 보고 입을 벌린다. 한근 두근만 있어도 왕실이 기뻐 하던 침향으로 아에 집무실을 꾸미고 있는 중국 황제의 호사(?)에 더 이상 할말을 잃고 돌아 온다.

중국은 침향을 단순한 향의 효용성 보다도 침향을 가까히 하면 인체의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 주목을 하고 연구를 한다. 향보다는 약재와 건강 증진용으로 주목할 것이다. 이 기록을 승정원일기 경종 원년조가 고스란히 보여 준다.

藥房再啓曰, 臣等入診退出後, 與諸御醫反覆商議, 皆以爲, 聖候諸症, 痰火爲主, 加減神秘沈香丸及加味調中湯二三十貼, 兼爲進御宜當云。 丸藥則一劑劑入, 湯藥則五貼爲先劑入之意, 敢啓。 傳曰, 知道。

경종은 이유모를 병으로 재위 2년만에 죽은 왕이다. 그가 병이 나 사경을 헤메자 약방(내의원)에서 침향으로 지은 약 30첩을 지어 올린다. 위의 기록은신비의 침향을 넣어 제조 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경종의 몸은 더욱 위중해 진다. 이에 약 한달 후 다시 침향을 써 마지막 약을 지어 올린다.

藥房再啓曰, 伏承問安批答, 則繼進之劑, 與諸醫更定事, 命下矣。 臣等卽與李時聖等諸御醫, 反覆商議, 則皆以爲所進湯劑, 已滿五十貼, 今姑停止, 前劑入加減神祕沈香丸, 連爲進御, 以爲治痰淸火之地宜當云矣。敢啓。 傳曰, 知道。 넣어 제조 했노라 기록 하고 있다.

경종은 이 약을 쓰고 얼마후에 죽는다. 죽기전 내의원에서 마지막 비급으로 침향으로 만든 환을 왕에게 올린 례다. 조선 시대 침향이 기사회생의 약제로도 전용된 사례다.

그랬다. 조선은 왕실에서 침향을 종묘에 올리는 최상의 성의로 생각 하면서도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이른 순간에는 침향의 성분속에 기생회생 할 수 있는 어떤 성분이 있다는 것을 인식 하고 사용 했다. 우황이 쇠뿔을 재료로

한 약재이듯 침향은 남방에서나 자라는 나무의 상처에서 진이 나와 수백년 응고된 것이다.

한반도는 물론 일본 중국에서도 자라지 않는 수종(樹種)이고 진액이 극히 회괴한 까닭에 침향의 회소성은 금보다 몇 배나 귀하고 비쌌던 것이다. 이 런 탓에 고려 시대부터 침향과 비슷한 색감과 향을 내는 향나무를 이용 바다속에 묻어 침향을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침향일 수 없으며 또한 침향도 아니었다.


4. 미륵과 무왕.

정조9년의 기록으로 침향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강조된 기록이다. 섬리국은 오늘날의 오끼나와로 인식되는데 조선 국왕을 황제로 칭 하고 스스로 속국임을 자청 하며 사신을 보내고 그들에게 많음 선물을 보낸 내용이다.

暹羅國長鄭華, 叩首叩首, 上貢大皇帝陛下萬歲萬歲萬萬歲。 伏以皇恩浩蕩, 澤及遐荒, 聖德宏敷, 光臨海隅。 念故父任, 政暹羅, 遣使朝貢, 業蒙容納, 不勝榮幸, 何期更邀隆遇, 格外加恩懷? 遠屬國, 無微不照 使華感激無地, 補報無門。 玆華繼嗣父業, 當續父志, 供奉貢典, 不敢少忽。 聿修厥職, 永效忠誠。 但華僻處海隅, 遐荒粗定, 今備方物來朝, 貢禮誠難合式。 俯思鴻慈, 鑑華悃忱, 必沾涵育。 玆謹虔備金葉表文。 公象一隻, 母象一隻, 龍涎香外一斤、內八兩, 金剛鑽外七兩、內三兩, 沈香外二斤、內一斤, 氷片外三斤、內一斤八兩, 犀角外六介內三介, 孔雀尾外十屛、內五屛, 翠皮外六百張、內三百張, 西洋氈外二張、內一張, 西洋紅布外十疋、內五疋, 象牙外三百斤、內一百五十斤, 獐䐉外一百斤、內五十斤, 降眞香外三百斤、內一百五十斤, 白膠香外一百斤、內五十斤, 大楓子外三百斤、內一百五十斤, 烏木外三百斤、內一百五十斤, 白荳蔲外三百斤、內一百五十斤, 蓽撥外一百斤、內五十斤, 檀香外一百斤、內五十斤, 甘蜜皮外一百斤、內五十斤, 桂皮外一百斤、內五十斤, 藤黃外三百斤、內一百五十斤, 蘇木外三千斤、內一千五百斤。 特差貢使帕史滑里那突朗ㆍ喎汶悉呢霞喔撫突郞ㆍ扷察那丕汶知突ㆍ汶丕匹洿遮辦事, 匍赴恭進金闕, 懇蒙容納, 華不勝感激, 榮幸之至。 冒呈。

한자로 쓰여진 섬라국(暹羅國)의 표문(表文)에 이르기를,

“섬라국 장(暹羅國長) 정화(鄭華)는 머리를 조아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대 황제 폐하에게 만세 만세 만만세를 올립니다. 엎드려 황제의 은혜가 커서 은택이 먼 나라에까지 미치고, 성덕(聖德)이 넓고 커서 바다 구석에까지 멀리 미쳤습니다.

생각하건대, 죽은 아비 정임(鄭任)이 섬라를 다스리며 사신을 보내서 바친 조공을 이미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은혜를 입은 것만도 영광스럽고 다행하기 그지없는데, 어찌 다시 높은 대우와 상격(常格) 외의 더한 은덕을 받으리라고 기대하였겠습니까? 멀리 있는 속국(屬國)을 회유하고 조금이라도 살피지 않는 데가 없으니, 정화로 하여금 감격을 이기지 못하게 하지만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이 정화는 아비의 기업(基業)을 이어받았으니, 마땅히 아비의 뜻을 계승하여 공물을 바치는 전례를 감히 조금이라고 소흘히 할 수 없으며, 이에 그 직무를 닦아서 영원히 충성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화는 외따른 바다 구석에 처해져 있어서 멀리 있는 땅이 거칠고 메말라, 지금 방물(方物)을 갖추어 내조(來朝)하지만 조공을 바치는 예들이 진실로 법식에 맞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러러 큰 사랑으로써 정화의 정성을 헤아려서 반드시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삼가 금박을 칠한 표문을 갖추고, 공상(公象)은 1쌍, 모상(母象)은 1척, 용연향(龍涎香)은 황제에게 1근, 황후에게 8량, 금강찬(金剛鑽)은 황제에게 7량, 황후에게 3량, 침향(沈香)은 황제에게 2근, 황후에게 1근, 빙편(氷片)은 황제에게 3근, 황후에게 1근 8량, 서각(犀角)은 황제에게 6개, 황후에게 3개, 공작미(孔雀尾)는 황제에게 10병, 황후에게 5병, 취피(翠皮)는 황제에게 6백 장, 황후에게 3백 장, 서양전(西洋氈)은 황제에게 2장, 황후에게 1장, 서양홍포(西洋紅布)는 황제에게 10필, 황후에게 5필, 상아(象牙)는 황제에게 3백 근, 황후에게 1백 50근, 장뇌(獐腦)는 황제에게 1백 근, 황후에게 50근, 강진향(降眞香)은 황제에게 3백 근, 황후에게 1백 50근, 백교향(白膠香)은 황제에게 1백 근, 황후에게 50근, 대풍자(大楓子)는 황제에게 3백 근, 황후에게 1백 50근, 오목(烏木)은 황제에게 3백 근, 황후에게 1백 50근, 백두구(白荳蔻)는 황제에게 3백 근, 황후에게 1백 50근, 필발(蓽撥)은 황제에게 1백 근, 황후에게 50근, 단향(檀香)은 황제에게 1백 근, 황후에게 50근, 감밀피(甘蜜皮)는 황제에게 1백 근, 황후에게 50근, 계피(桂皮)는 황제에게 1백 근, 황후에게 50근, 등황(藤黃)은 황제에게 3백 근, 황후에게 1백 50근, 소목(蘇木)은 황제에게 3천 근, 황후에게 1천 5백 근인데, 특별히 조공사(朝貢使) 파사활리나돌랑(帕史滑里那突朗)·와문실니하악무돌랑(喎汶悉呢霞喔撫突朗)·요찰나비문지돌(扶察那丕汶知突)·문비필오차(汶丕匹遮)를 임명하여 일을 준비하고 조심스레 가서 삼가 대궐에 바치도록 하였으니, 너그럽게 거두어 주신다면, 정화는 지극히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외람되게 바칩니다.”

이 기록속에는 당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희귀 하고 값비싼 물품이 눈이 부실 정도로 많다. 이속에 장뇌를 1백근 보낸 기록이 있는 데 장뇌는 양식한 산삼을 말한다. 장뇌를 1백근 싸 보내며 침향은 겨우 왕과 왕비 두 사람 앞으로 3근을 보낸다.

위의 물목을 침향을 제외 하고 한 한의사에게 값을 셈 하여 보라 하니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 하면 총 20억원 정도가 소요될 것이란 의견을 낸다.

침향은 이 모든 물목의 합한 값과도 비슷했던 듯 하다. 이 물목을 모두 돌려주고 침향 10근만 얻으면 좋겠다는 관원의 말이 그것을 증명 한다.

왕실도 침향을 얻기가 이토록 힘이 들었다. 이런 환경에서 고려 조선의 사찰과 민가에서는 스스로 침향을 얻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수침향의 절차인 매향제다.

매향제는 미륵신앙과 연결이 되어 충청도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자생 했던 문화적 행사다. 미륵 신앙은 한반도에 최초로 청양 익산 지역에 들어와 당시 마한의 토착 신앙이던 용신앙과 결합을 하여 발전 한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미륵 신앙을 태동 발전 시킨 사람이 백제의 무왕이다. 그는 청양 지역 칠갑산에 각산성을 쌓고 도솔천이라 하고 익산의 사자산 아래에 미륵사를 세우고 용화세계를 대비 한다.

무왕이 살던 사비 부여는 전륜성왕이 온 땅 현실 세계다. 무왕은 자신이 전륜성왕이라 한바 있다. 미륵은 도솔천에서 전륜성왕의 자식으로 와 용화세계를 만든다는 신앙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3요소를 모두 관장 하는 신인것이다.

ㅡ 무왕6년(605) 春二月築角山城.

봄에 각산에 성을 쌓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의 기록이다.

왕위에 오른 1년여 만에 죽은 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무왕이 한 첫번째 사업이 토목 공사다.

그는 각산에 성을 쌓는다. 무왕은 전술전략가로 탁월한 정치력을 갖은 강골의 왕이다.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로 중국 기록에는 위덕왕의 아들로 나온다.

무왕은 익산에 동양 최대의 사찰을 조성 한다. 대공사가 그의 전공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는 산성의 나라라 할 정도로 무수한 산성이 나온다. 그러나 성을 축성할 정도의 단순한 기록은 드물다.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지에서 청양 지역을 소개 하며 이렇게 적어 놓고 있다.

ㅡ현 서쪽 시오리 각산에 두솔성이 있다. 자비성이라고도 한다.

김정호는 칠갑산을 각산이라 했다. 뿔 모양의 산이란 의미일까. 칠갑산 주봉을 보면 영낙없는 외뿔 모양이기는 하다. 560미터로 산이 그리 높은편은 아니지만 산세가 자리한 폭이 넓고 깊어 일찍부터 명산으로 대접을 받아온 산이다.

그 산정에 4060미터에 달하는 산성이 있다. 물론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다. 칠갑산의 주봉의 7부 능선에서 도림리쪽으로 내려온 포곡식 산성이다. 이 산성은 그동안 수수께끼로 인식되어온 산성이다.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산악 지역에 이런 대규모 성을 조성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백제의 도읍지인 웅진성도 2천미터를 겨우 넘었고 사비 도성도 겨우 이정도였다. 사비도성과 비슷한 산성이 칠갑산성인것이다. 그 산성안에 도림사지가 있다. 물론 폐사지다. 고려시대 조성한것으로 보이는 3층 석탑과 석등 석불 조각등이 덤불과 대나무 등걸속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다.

도림사를 지표 조사할때 칠갑산성도 함께 조사된 적이 있다. 도림사는 고려 시대의 것이고 산성은 통일신라에서 고려 시대에 조성했던 듯 하다는 조사보고가 있었다. 도림사가 산성을 지키는 장병들의 무훈을 바라는 사찰로 보인다는 의견도 첨부되었다. 조사 경비와 시간등에 쫓긴 성의 없는 조사 자료다.

나말여초는 청양 지역에 이런 대규모 산성을 조성할 위급성과 여력이 없었다. 궁예와 왕건의 쟁투의 최전선에 해당 하는 이곳에 수년에 걸친 대토목 공사를 벌일 이유가 있을까. 더구나 이런 토목 공사라면 그 시대의 역사 기록에 포착되어야 한다. 칠갑산성은 백제 무왕이 쌓은 각산성이 분명 하다.

거대한 산성 공사이기에 무왕은 이곳에 여러번 행차를 했을 것이다. 그는 법왕의 이동로를 따랐다.

법왕의 갑작스런 죽음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무왕은 칠악사를 수호 하기위해 성을 쌓았던 것일까. 법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아마도 암살일것이다. 무왕은 마를 캐던 서동으로 극적으로 왕위에 오른 전설을 갖고 있는 왕이다. 다른 왕은 몰라도 무왕이라면 이런 산성 공사를 강행 했을 수 있다. 그는 스케일이 큰 왕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무왕이 법왕을 제거 하고 왕위에 오른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법왕이 왕흥사를 시작하자 수십년 넘게 그 공사를 진행 시켜 완성 시킨 사람이 무왕이다. 정적의 치적을 계속 진행 발전 시킬 정치 세력은 없다. 더구나 무왕은 선왕인 법왕의 불교를 승화 발전 시킨 사람이다.

무왕은 스스로를 전륜성왕에 비교 했다. 전륜성왕은 미륵이 오기전 앞 시대에 와 미륵을 맞을 준비를 하다는 미륵하생경의 중요 인물이다. 그가 익산에 세운 미륵사는 지금 남아 있는 석탑 한기가 10층 건물에 맞먹을 정도로 엄청나다.

그런데 칠갑산 아래에 미륵원이라는 오래된 지명이 전해 온다. 미당리 일원인데 그곳에서는 1960년대 농지조성 공사중에 거대한 석미륵상의 불두가 발견되어 지금 몸체를 별도로 만들어 세워 놓고 있다.

무왕은 이땅의 미륵신앙의 전파자이자 수호자였다. 무왕은 당대에 과거 현재 미래를 담아 내고 있는 미륵 신앙을 칠갑산 사비성 익산의 사자산에 구현 한 왕이었다.

이 점이 바로 익산 지역이 주목 되는 이유다.

5. 매향제의 재현과 필요성.

미륵사가 익산에 세워진 것은 전북 이북과 충청 남부 지역에 자생 발전 하던 용신왕과 칠성 신앙의 새로운 해석으로 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지역은 백제의 본류이면서 마한의 본류기도 한 곳이다.

주서는 마한을 음양오행에 능하고 마을에 큰 나무를 세우고 위했다는 기록으로 고대의 이 지역의 신앙을 증거 하고 있다.

용신앙은 수신에 대한 기대이며 칠성 신앙은 별에 대한 기대로 당대의 제천의식의 한 형태다. 물신 별신 산신은 물론 당대의 사람들은 자연의 모든 것에 신성이 있다고 믿었다. 삼국시대를 거치며 불교가 이 땅에 들어 온다. 최초의 불교의 도래는 이 땅에서 별로 환영 받지 못한다. 기존의 정신적 이데오르기에 반 하는 종교가 쉽게 받아 들여지기 힘든 것은 자명 하다.

신라의 이차돈의 순교는 당 시대 불교의 박해를 이해 하는 기록이다. 미륵신앙은 백제로 부터 시작 된다. 미륵신앙의 전파자는 무왕이다. 무왕은 웅진 시대에 인도로 부터 직접 들여온 율종을 뒤로 돌리고 미륵신앙에 메달린다.

웅진 백제 시대는 한성에서 도피를 하여 내려온 백제 왕실과 웅진 부여 금마 지역에 퍼져 사는 호족들간의 치열한 갈등을 겪은 시대로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등 여러명의 왕들이 피살 당한 때이다. 사비로 천도한 이후에도 혜왕 법왕등이 재위 1년 2년만에 실각 하는 격변을 겪는다.

법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무왕은 웅진 부여 금마 지역의 여론을 등에 엎고 등극한 왕이다. 무왕은 이 지역의 민심인 용신앙과 칠성신앙과 당시에 융성을 보려는 불교를 한데 아우르는 작업을 통해 백제를 다스리려 한다. 이 때 나온것이 미륵 신앙이다.

미륵신앙은 신비주의와 밀교적 성격을 띄고 있어 용신앙과 칠성신앙등 기존의 신앙과 크게 배치 되지 않는다. 산식각이나 칠성각등이 사찰안에 공존 한것도 이때부터다. 미륵신앙은 부여의 창국신화인 동명 과도 맥이 다아 있다. 동명은 순수 우리말인 동여 매다의 향찰식 표현이다.

대동단결 협동등이 다 이 말에서 비롯된다. 무왕에 의해 백제에 강력하게 전파 보급 되었지만 그 보급의 지층이 나타나는 곳 또한 이 지역을 크게 벗어 나지 않는다. 미륵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는 이 주변을 살펴 보자.

1. 익산 미륵사.

2. 금산사.

3. 부여 무량사.

4. 청양 장곡사.

5. 영동 미륵면.

6. 청양 미륵원.

7. 논산 관촉사.

위의 지역은 미륵신앙과 매우 밀접된 지역으로 문화적 유적도 함께 전한는 곳들이다. 장곡사에는 국보 미륵괘불이 있고 무량사 또한 보물 미륵괘불이 있다. 미륵사 관촉사등은 언급을 할 필요도 없다. 이 들 지역의 범위는 불과 수백리에 불과 하다.

미륵신앙은 대동 평등을 담아 내고 있는 사상이다. 이 사상은 이 지역을 미륵의 성지로 인식 시키며 지역민들의 협동심을 고취 하여 역사를 통하여 독립 저항 정신으로 나타 나며 역사에 충격을 준다.

백제 부흥군의 주요 거점이 이 지역이었고 견횐이 후백제의 기치를 들기도 했고 구한말 의병의 창의의 대명사인 동학이 일어난 것은 대표적이다.

무왕은 미륵사를 세우며 매향을 한다. 미륵사가 둠벙을 메우고 그위에 세운 절임을 유의 하면 미륵의 화현을 고대 하는 의식인 매향을 한것은 자명하다. 미륵사의 본당 밑으로 용이 다니는 수로를 만든 고고학적 발견도 이를 뒷받침 한다.

성덕대왕 신종에는 향불을 사르고 향이 저 세상을 비추사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신라의 사찰 감은사지 본당 아래의 수로도 미륵사의 그것을 본딴 것이다. 익산의 미륵사지는 이 땅의 최초의 미륵신앙의 발원지이다.

무왕은 미륵신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 미륵신앙은 청양 부여 익산이라는 백제 미륵 불교의 성지 벨트다. 요 근래 부여 익산을 중심으로 일어 난고 있는 무왕의 부활은 이 땅에 다시 한번 흥기 하는 미륵 신앙의 미래다. 미륵신앙은 단순 불교의 행사가 아닌다.

미륵을 통하여 평등 자유 사상에 대한 통찰을 깨닳고 새로운 사회 인식을 고취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예로부터 미륵 종보 사찰을 세울 때면 어김 없이 매향제를 했다. 매향제는 대동 화해 사상의 발로이며 오늘의 우리만을 생각 하지 않고 먼 훗날 이 세상에 와 살 후손들 까지 생각 하는 자연주의 사상이 반영 되어 있다.

오늘 이 값비싼 매향을 다 쓰지 않고 훗날에 올 사람들을 위하여 남겨 놓는 사상은 미륵의 화현 이전에 지극한 인간애의 발로다. 오늘날 난 개발로 전 국토가 유린 되고 도박장에 투기 하듯 재물을 함부로 남용 하는 세상에서 매향제가 담고 있는 정신은 참으로 빛이 난다.

침향 그리고 매향제는 이런 까닭에 불교의 행사를 벗어 난다. 고려 조선 시대 매햐을 했던 사람들이 유불선을 가리지 않던 까닭도 그것이다. 매향은 21세기가 필요로 하는 환경주의 자연주의 사상의 거울이다.

*자료제공 천태훈 침향 연구소 소장.김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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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2006-06-06 11:56:45
어디에 자빠져 계시오??
나타나슈..선상님^^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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