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의 산업혁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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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의 산업혁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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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산업국가 건설 계획 (中)

 
   
  ^^^▲ 대만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왼쪽), 경제현장을 둘러보시는 박정희 대통령(우)1965년 2월 17일 대만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에게 둘러싸여 미소짓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과 손을 잡고 활짝 웃으며 서 있는 사람이 박 대통령 경력미화시리즈의 필자로 돼있는 가오칭인(화살표), 가오칭인 왼쪽이 군관학교 동기생 차이충량이며 박 대통령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군관 학교시절 중대장을 지낸 자오궈치(만주국 마지막 황제 푸이의 매부)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외환위기 1차 5개년계획 축소 조정

1963년은 우울한 해였다. 제1차 5개년 계획 사업을 막 추진해 가는데, 가장 중요한 돈이 떨어진 것이다. 탄약이 떨어지면 전쟁은 못한다. 우리나라의 외화보유고는 5.16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961년 말에 2억 520만 6천 달러, 즉 약 2억 달러였다.

그런데 5개년 계획을 추진해 가면서 정부보유 달러를 조금씩 썼다. 국내공장 가동을 위한 원자재도 수입해야 했고, 필수 불가결한 물건도 수입해야 했다. 그래서 외환은 줄어만 갔다.

1962년 말에는 1억 6,679만 달러로 약 4천만 달러가 줄었고, 1963년 3월에는 1억 3,705만 달러, 동년 9월에는 1억 540만 달러가 됐다. 이 액수 중 순 미국 달러는 9,329만 달러로 1억 달러 이하로 떨어져 버렸다. 우리나라의 달러 총보유고가 1억 달러에도 못 미치게 된 것이다. 파산 직전이었다. 우리나라의 첫 번째 외환 위기이다.

이런 상태로 5개년 계획을 계속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제1차 5개년 계획의 축소 작업이 시작되었다. 추진이 잘 안되는 사업은 1차 5개년 계획에서 삭제하고, 다음 단계(2차 5개년계획)로 미루기로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종합제철 사업이다.

그러고 보니 당초 중공업에 속하는 금속, 기계부분에 (공업분야 투자액 중) 28.8%를 투입하여, 11개 사업을 추진하려던 원래 계획은 추진이 잘 안되자 5개 사업에 14%로 축소시켰다. 그것도 교통부소관 철도 공작창 확충사업을 빼면, 4개 사업에 겨우 2.1%를 할당했다. 즉 중공업은 제1차 5개년 보완 작업시 거의 배제하고 말았다.

경공업 분야는 40.2%를 투자하여, 23개 사업을 추진하려던 원래 계획이 12개 사업 38.6%로 변경되었다. 그 중 화학공업 분야는 전혀 변경이 없었다. 진척속도는 늦기는 하나, 추진이 잘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한 일이다.

나머지는 중소기업 육성 등 기타 사업에 대한 투자였다. 특히 중소기업 육성은 시급한 과제로 인식되어 당초 1.8% 밖에 투자 계획이 없던 것을 30.4%로 대폭 증액하였다.

교통부 소관(30.6억원)을 뺀 민간에 대한 중공업투자액 5.3억원과 화학공업 및 경공업투자액 98.2억원을 비율로 나누면 5대 95이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경공업과 화학공업에 중점 투자하도록 수정했다는 결론이다.

연평균 경제 성장률도 당초 7.15%에서 5%로 하향 조정하였고, 총투자도 당초 50.8%에서 31.9%로 대폭 축소하였다. 가용자원면에서 외자도입 계획도 8.95%에서 8.1%로 줄였다. 그리고 국무회의는 외환사정이 호전될 때까지, 민간사업에 대한 정부의 지불보증을 중지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생필품의 수입도 극도로 제한했다. 이런 상태가 되니 국민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조치로 말미암아 외환보유고는 조금씩 늘어나 연말에 가서는 1억 2,100만 달러가 됐다.

朴 대통령이 1964년도 연두교서에서 외환보유고 1억 2,100만 달러를 굳이 1963년도의 실적으로 내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 www.ceoi.org^^^  
 

경제 총수

당시 우리나라의 최긴급 과제는 「민생고 해결」과「경제 자립」. 이를 위해 혁명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키로 하고, 행정계획을 단행했고 정부조직을 개편했다.

그리고는 우리나라 경제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인재, 즉 경제총수를 물색했다. 아마도 「제갈공명」또는 ―독일을 통일시킨― 「비스마르크」와 「모르트케」같은 인재를 갈구했을 것이다. <도표 3-5>는 1960-70년대의 경제장관 명단이다.

경제기획원 장관이라면 우리나라의 경제 총수이다. 이 표를 보면 역대부총리(초대장관 김유택을 위시해서 김현철, 유랑순, 원용석씨)등 모두 당시로서는 내노라하는 경제행정계통의 거물급이었다.

그러나 경제기획원 창설(1961. 7) 이후 제7대 장관이 퇴임하는 1964년 5월까지 2년 10개월동안 ―즉 34개월 만에― 7명의 장관이 바뀌었으니 평균재임기간은 5개월도 못된다.

이 기간 중 김유택씨는 초대, 제4대, 제7대 장관으로 세 번씩이나 같은 장관자리에 올랐다. 그러니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이 얼마나 곤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朴 대통령은 우리나라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경제총수에 합당한 인재를 추천 받아 이 사람을 채용해도 안 풀리고 저 사람으로 바꿔도 잘 안되고 구관이 명관이라 구관을 또 한번 시켜도 별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경제기획원장관의 권한이 약하다는 여론이 있자 제7대 장관부터는 부총리라는 직함도 부여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은 수렁속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물가고, 인플레, 실업자 문제 등으로 민생고는 극심했고, 국민의 여망을 등에 업고 혁명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제1차 5개년 계획도 지지부진해서 1963년도에는 축소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963년도에는 외환위기까지 일어났다. 그러니 朴 대통령으로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朴 대통령은 단안을 내려 경제정책의 일대 전환을 한다. 1964년 5월이다. 이 후 「수출제일주의+공업입국」이 국가 최고 경제시책이 된다.

朴 대통령은 자신의 모든 정력과 국력의 모든 것을 수출에 쏟아 부었다. 아울러 이를 추진하기 위해 경제기획원장관겸 부총리에 장기영씨, 상공부장관에 박충훈씨를 임명했다(1964. 5).

매크로적이나 실무경제에 밝고 불도저식 추진력이있는 - 장기영 부총리와 - 수출장관이란 별명을 얻고있던 -박충훈 상공부 장관의 콤비는 그 후 우리나라 경제를 수렁에서 구하고 나아가서 산업혁명으로 발전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하게된다.

경제기획원장관은 장기영씨가 3년 5개월, 그 바톤을 이어 받은 박충훈씨가 2년 9개월, 김학렬씨가 2년 6개월 근무 중 공직서거 했고, 이어 태완선씨가 2년 9개월, 남덕우씨가 4년 3개월(최장수 부총리), 신현확씨가 1년 근무 후 총리 승진 등 모두가 장기 근무하게 된다.

장기 근무한다는 것은 경제정책이 안정되고 있었다는 중요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 광양(포스코광양제철소#이고시오)만 일대를 해상시찰 하시는 박정희 대통령(왼쪽)남해안 고속도로를 공중 시찰한 뒤 공업단지 예정지인 광양만 일대를 해상 시찰하면서 선상에서 작업지시를 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연두교서 (1965~66년도)

1965년도 대통령 연두교서(年頭敎書)(1965.1.16)

1. 요 지

가. 1964년도 업적

(1) 기간산업 건설의 진척

(2) 수출 : 1억2천만 달러

(3) 일용품의 국산화

(가) 자전거 생산 : 15만5천대
(나) 재봉기 생산 : 15만대

나. 1965년도 시책방향(경제)

(1) 증 산

(2) 수 출

(3) 건 설

다. 1965년도 경제목표

(1) 농수산물의 증산 : 양곡 3천7백만석

(2) 광공업부문의 증산

석 탄 : 1천만 톤
전 기 : 77만 kw
석 유 : 3만5천 바렐/日
양 회 : 190만 톤
유 리 : 60만 상자

(3) 수출목표 : 1억7천만 달러

(4) 국토종합개발 및 전력, 철도, 주택 등의 건설

(가) 기 착공한 공사의 완성
(나) 정선선, 경북선, 진삼선(晋三線) 개통을 비롯한 240여km의 철도 부설
(다) 마이크로웨이브의 신설
(라) 자동전화 확충 : 3만7천 회선
(마) 외항선 도입 : 4만여 톤

1964년도 업적으로는 1억 2,000만 달러를 수출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1965년에는 「증산, 수출, 건설」을 시정방향으로 설정했는데, 증산에서는 양곡 3,700만석, 석탄 1,000만 톤 등등 수출에서는 1억 7,000만 달러를 책정했다. 건설에서는 국토개발, 전력, 철도, 주택 등의 건설을 나열했다.

그리고는 「나는 금년을 "일 하는 해"로 정하고 정부와 국민이 일치 단결하여 거족적으로 일하고 전진할 것을 사랑하는 2,700만 동포에게 호소한다」고 했다.

이 연설문은 전년도까지의 연두교서와는 달리 활기에 넘치고 자신에 차 있다.

朴 대통령은 작년에 국가경제 정책을「수출제일주의 +공업입국」으로 일대 전환을 하고 난 후 수출에 매진한 결과, 년수출 증가율 40%, 액수로는 1억 2,000만 달러를 달성했다. 이로서 朴 대통령은 경제발전에 대한 돌파구를 찾았다고 확신했다.

수출을 계속 밀고 나가면 우리나라도 가난을 면하고 나아가서 중진공업국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1965년의 수출목표는 1964년에 비해 40% 증가한 1억 7,000만 달러로 책정하고 국민들에게 「증산, 수출, 건설」을 하자고 호소한 것이다. 국민들에게 1965년을 "일하는 해"로 정하고 모두 열심히 노력하자고 다짐한 것이다.

1966년도 대통령 연두교서(年頭敎書)(1966.1.18)

1. 요 지

가. 1965년도 업적

(1) 경제성장률 : 8%

(2) 양곡생산 업적 : 양곡 350만 톤, 맥류 128만 톤

(3) 제2차 산업성장률 : 17.5%

(4) 전 력 : 77만 kw

(5) 석 탄 : 1천만 톤

(6) 정 유 : 3만5천 바렐

(7) 시멘트 : 172만 톤

(8) 비 료 : 제3, 4, 5 비료공장의 착공

(9)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10) 수출증대 : 1억8천만 달러

(11) 경제 체질 개선 : 환율 현실화, 금리 현실화, 저축의 증가 238억원

(12) 세수(稅收)증대 : 45.5%
 
나. 1966년도 시책방향(경제)

(1) 경제 체질 개선 : 환율, 금리, 금융, 조세, 공공요금의 현실화

(2) 물가안정 : 물자 수급 원활, 공정거래, 수입의 자유화

(3) 재정, 금융의 안정 : 통화 팽창 억제, 조세 재정 수입 증대, 내자 동원 체제 보강

(4) 외자도입 체제 정비 강화

다. 1966년도 경제목표

(1) 수출목표 : 2억5천만 달러

(2) 경제성장률 : 7% 이상

이 도표를 보면 朴 대통령은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맨 처음 언급한 것이 1965년도에 경제성장률 8%(공업 성장율은 17.5%) 달성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성과이다.

수출은 1억 8,000만 달러를 달성했는데 작년대비 50%의 증가율이다. 세수(稅收)도 45.5%가 증가됐고, 지지 부진하던 5개년 계획 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되기 시작해서 제3, 4, 5 비료공장 모두 착공했다는 내용이다. 금년도(1966)는 수출증가율 40%, 즉 2억 5,000만 달러 목표를 달성, 7%의 경제성장을 이룩하겠다는 것이다.

朴 대통령은 「금년이야말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매듭짓고 제2차 5개년 계획의 준비작업에 착수하여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중략)

정부는 지난 수년동안 우리가 이룩한 경제적 성과를 토대로 하여 금년에도 무엇보다 안정기조 위에 경제성장을 이룩해 나가고 우리 경제의 국제경쟁력 강화에 힘쓸 것입니다.」 그리고는 1970년대 말까지를 내다보는 장기 구상도 발표했다.

「나는 조국근대화 작업이 다음 3단계를 거쳐 비로소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업국가의 기초가 마련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66년을 그 첫 단계로 한다면 제2단계는 공업화를 이룩하는 제2차 5개년 계획이 끝나게 될 1971년을 말하는 것이며, 제3단계는 제3차 5개년 계획이 끝나 대량생산을 거쳐 대량 소비가 이루어질 1970년대 후반기가 될 것입니다. (중략)

년간 경제성장률 7% 이상의 수준을 견지하여 1970년대까지의 국민총생산을 현재의 2배 이상으로 증가시키자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그 해(1966년) 11.9%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우리나라는 고도성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출은 2억 5,000만 달러, 그 중 공산품 수출비중은 63%에 달했다. 수출증가는 공업입국 정책의 결실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67년에는 대망의 수출 3억 달러 돌파(목표수치는 3억 5,000만 달러)를 위해 매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를 달성하게 된다. 이 해 경제성장률은 11.9%에 달했다.

 

 
   
     
 

경제개발 5개년의계획의 변질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 즉, 1962년으로부터 시작해서 1966년으로 마감하는 5개년은 우리 민족이 「빈곤과 절망」으로부터 「근대화와 번영」으로 탈바꿈하는 위대하고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 기간 중 우리는 시행착오로 절망을 하면서도 굳은 의지로 이를 극복, 드디어 활로를 찾은 것이다. 이 후 우리나라는 고도성장을 지속하게 된다. 소위 Take Off(이륙)를 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1차 5개년계획은 대성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설명한대로 제1차 5개년 계획은 상공부 등 라인(Line) 부서에서 매크로적으로 성안한 소위 쇼핑리스트를 경제기획원에서 매크로적으로 종합한 것이다.

그래서 마이크로적인 것과 매크로적인 것이 동시에 포함돼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이 끝나고 이를 평가하려고 하니 매크로적 즉, 국가경제 전반을 통계수치로 파악할 때에는 모든 면에서 경이적인 성공이었다.

한 예로 수출 같은 것은 1966년 말(1차 5개년 계획의 목표연도)의 목표치가 1억 1,750만 달러이었는데 실제로는 2억 5,575만 달러를 수출했으니 218%의 초과 달성이다.

그러나 마이크로적인 면 ―즉 사업하나 하나를 따지면― 어떤 사업은 성공을 했으나 어떤 공장은 건설도 끝마치지 못한 것도 있고, 심지어는 ―1963년에 1차 5개년계획을 축소 보완할 때― 아예 취소된 사업도 많았다. 그러니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입장이 됐다.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니 경제기획원에서는 제2차 5개년 계획부터는 매크로적으로만 다루고 마이크로적인 것은 빼기로 했다. 즉 국가경제 전반에 대한 방향설정과 이를 뒷받침할 통계수치만을 담고 개개 사업은 문장으로 대치해 버린 것이다.

물론 예산배정도 ―개개 사업별로는 하지 않고― 분야별로 배분했다. 이런 조치로 말미암아 각 사업부처는 장기사업 즉 몇년 간에 걸쳐 수행하는 사업이라도, 매해마다 경제기획원에 가서 애원을 해가며 예산확보를 해야 하는 힘들고도 고달픈 신세가 됐다.

장기적인 사업에 착수하고 난 후, 제때에 충분한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면 사업중단이라는 낭패를 본다. 그러니 장기적인 사업은 추진하기에 앞서 단단한 조치가 필요하게 됐다.

우선 명목적이나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예산을 달라는 말조차 꺼낼 수가 없게 된다. 두 번째가 朴 대통령에게 브리핑을 해서 사전에 결제를 받아 놓는 조치이다.

이때 연도별 소요자금을 명시해서 재가를 받아놓아야 한다. 이런 조치를 「목돈확보 작전(略해서 목돈작전)」이라고 했다. 결국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사업추진을 위한 계획이 아니라 경제전망을 통계적 숫자로 나열한 계획으로 바뀌어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각 부처에서는 5개년 계획은 「계획은 계획이되 확정은 아니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5개년 계획이란 수정 가능한 계획이라는 뜻이다. 각 부처마다 여러 개의 5개년 계획이 나오게 된 연유이다.

다음에 그 실 예를 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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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복 2007-04-15 20:35:06
그런데 제가찾고있는내용이 아니에요. 그렇면다른내용을 찾아야 하는것이죠?ㅠㅠㅠㅠㅠㅠ.......,그럼어디서찾으면 되요? 내일아침일직 학교가야되는데 숙제에요 . 그러니깐 답꼭 적어줘요.^ㅡ^^ㅡ^^ㅡ^ㅠㅠ엄마한태않하면 혼나요.

지만원 2006-05-20 07:49:35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친일파였으며 독재자였다는 내용의 글로 차 있으나, 진정 위대한 인물은 제아무리 음해 세력이 흠집을 내려 해도 시간이 흘러갈수록 도리어 죽은 후에 그 위대함을 알 수 있게 되듯이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참으로 감탄을 금할 수 없게 되는구나.

박정희는 한국 역사상 보기 드문 위대한 인물임에도 지금은 평가 절하되고 있지만 수백 년 후에는 어쩌면 세종대왕 정도의 존경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박 대통령의 위대함은 여러 곳에서 드러나지만 난 첫째로 부정부패 친인척 비리가없는 것을 꼽고 싶다.

박 대통령 이후 부정부패 비리로 얼룩진 후임 대통령들을 보라!
전두환은 7년간 수천억을 꼬불치고 동생 등 일가친척들에게 온갖 이권을 나누어 주었고, 노태우는 5년간 대기업에서 역시 수천억을 뜯어내고 재벌가와 사돈을 맺은 후 특혜를 베풀어 주었으며, 김영삼은 스스로는 뇌물 한푼 안 받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결국, 그 아들이 수많은 비리에 개입하여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것으로 드러났다.

김대중은 앞선 대통령들이 친인척 비리 때문에 그렇게도 비난받은 것을 완전히 망각했는지, 그 아들들이 비리로 줄줄이 법정에 서고야 말았으며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의혹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박정희는 무려 18년간이나 절대적인 권력을 유지했음에도 불가사의하게 친인척 비리나 부정부패에 연루된 일이 한 건도 없었다.

사후 그의 정적들이 조금이라고 더 박정희를 깎아 내리려 눈에 불을 켜고 비리를 찾아 보려 했으나 결국 어떠한 숨겨놓은 돈도, 자녀들에게 노골적인 특혜를 베푼 것도 알려진 게 없으며 그의 재산은 죽은 후 주머니에서 십만원과 고물시계을 팔에 차고 있었던 것뿐 이였으며, 그 이상 발견된 것이 없었다.

그가 마음만 먹었으면 가족은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도 팔자를 고치게 할 수 있는 것이 가능했던 만큼 그렇지 않다는 것은 과연 박정희란 인간이 얼마나 청겸결백 했었는 가을 보여주는 것 안이 갰는가.

사후 후임 대통령들의 부정부패와 각종 비리들을 보면 그의 위대함은 더욱더 빛날 뿐이다.

두 번째로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나라에 목표의식을 심어 주었다.
그는 남이 해놓은 것에 대해 불평하며 비난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말로 불평하고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일을 하며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그는 스스로 남이 뭐라 건 상관없이 나라에 명확한 목표를 세우고 올바른 사람을 배치한 후 권한을 주고 전력투구하여 일관된 정책으로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새마을 운동이 실패라고 어느 누가 그러는가?

농촌의 보릿고개를 5000년 한민족 역사에 처음으로 없앤 것이 박정희 그가 안인가.
지금 세대는 기억 못 하지만 70년대에는 나라에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부국 강병" 이라는 당연한 목표 말이다.

그리고 사업가는 최소한 십 년 정치가는 백 년 앞을 내다보는 안목과 지혜가 있어야 된다고 한다.

79년도 수도 서울 이전 "백지계획" 의 청사진을 보면 1000년 후의 먼 장래를 내다보며 구상한 그의 탁월한 안목과 지혜에 정말 감탄과 경탄을 금치 못하겠다.

마지막으로 박정희가 가장 위대한 점….
엽전정신 즉 "조선인은 해도 안돼"라는 패배의식에 쪄 들었던 국민에게, 우리가 뭉치고 노력하면 할 수 있다" 라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을 들 수 있겠다.

혹자는 말한다.
박통 시절의 경제 기적이 박통 혼자만의 공이냐고,--
모든 국민이 죽자살자 일해서 나온 결과라고, 하며, 박대통령의 위업을 절하시키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은. 일반 국민이 그토록 몰입하여 일할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 지도력, 우리도 일하고 노력하면 나도 잘살고 나라도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자신감, 동기유발 이야말로 리더자로서의 지도력과 솔선수범하는 언행의 일치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박정희는 명확한 국가 비전과 각 단계별 목표달성을 명확히 국민에게 인식 시킴으로써 국민들이 스스로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훌륭한 리더자의 지도력이 안이 갰는가.

요즘 주위를 둘러보라.---
´한국 사람은 XXX라서 안돼" 하는 자포자기 성의 멘트가 유달리 많이 들리지 않는가?
이것은 나라에 리더쉽이 실종되고 사람들이 더이상 지도층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박 대통령 생전에 박대통령의 경제 개발계획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며 고속도로 건설현장의 불도저 밑에 누워 반대를 위한 반

익명 2006-05-20 07:05:43
시국이 참으로 어지럽습니다. 불안감이 높은 데 반해 뉴스 매체들은 우리를 혼란케 합니다. 매월 월례 강연을 실내에서 하고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회원님들이 오셔서 장소가 비좁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월례 강연만으로는 듣고 싶은 말들을 다 들을 수 없고, 궁금증 때문에 한달이 너무 길다는 말씀들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한번 야외 강연을 서울역에서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한번 해보고 의미가 있으면 자주 해볼까 합니다.

우리의 회지인 ‘월간 시국진단‘ 이 날로 넓게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애정 어린 동참에 늘 감사드립니다.

일시: 2006.5.27 (토) 오후 2시

장소: 서울역 광장

연사: 지만원(시국진단), 박복덕(전자개표)

준비물: 깔고 앉을 물건(신문지나 플러스틱 방석 등)

후원: 자유시민연대


감사합니다.


2005.5.19
지만원 올림

서중호 2006-05-18 16:11:07
정말 박정희 박물관 입니다.
다음 또 무엇을 연재 하실 것인가?
궁금합니다.


진실은... 2006-05-18 16:09:54
지나간 역사는 말한다.
우리의 조국근대화 역군이 누구인지...
우리는 하나로 뭉쳤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선진 조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왜곡하는 붉은무리들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이 많은 욕을 먹었다. 이 시점에서 뉴스타운이 왜곡된 역사를 바로쓰고자 이런 코너를 마련한 것은 먼 훗날 후손들에게 영광을 얻으리라....

뉴스타운에 찬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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