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여 독서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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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여 독서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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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육체의 웰빙시대 독서 속에서

"젊은이가 무엇 때문에 독서(讀書)해야 하는가?" 이 바쁜 세상에 애써 독서해야할 목적은 무엇인가? 이러한 명제(命題)는 젊은이가 독서해야한다는 입장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라 할 것이다. 또한 최초의 문제이며, 최후의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명제에 대한 구명(究明)없이는 젊은이의 독서에 대한 노력은 허공에 뜬 것에 불과할 것이며, 볼만한 성과도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 때문에 독서해야 하며, 독서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생각 해 보면, 이러한 문제는 젊은이가 독서를 완성(完成)하고 나서 (완성이란 말의 의미가 수사학(修辭學)적으로 쓸 수가 있다면) 말해야 할 성질의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독서의 마당에 있는 젊은이는 그 자리에 들기전 이러한 명제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일에 다름아니다.

젊은이는 원래가 더러 비번이 있다손 치더라도 일반적으로는 평범(平凡)한 것이며, 불완전(不完全)한 존재다. 이 평범하고 불완전함을 알고, 조금이라도 완전한 것으로 하고자 하는 노력이 곧 젊은이의 독서인 것이다.

그래서 독서의 노력은 하나의 "배움"으로도 정의 할 수 있다..
이 배움의 과정 즉 독서의 노력이 바로 젊은이로 하여금 나아가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로부터 구별케 하며, 다른 동물과 달리 오늘과 같은 문명,문화적 번영(繁榮)을 가져오게 한 요소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러한 "배움"이 우리가 독서해야 하며 독서하는 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서한다는 것은 젊은이들에게"사람"이란 무엇인가를 구명하며, 사람의 생활을 합리화(合理化) 하며, 미화(美化)하기 위하여, 대 자연의 원리를 찾아 내고자 함을 말하는 것이다.

젊은이가 스스로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것을 타파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어서는 안될 것인데, 이 노력이 곧 독서의 제 일보인 것 이다. 그렇다면 우리 젊은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알고자 노력하여야 할 것인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한 인간으로 하고자 노력하고, 생활을 미화하며, 합리화하여 번영하는 방법을 알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양(洋)의 동서 시(時)의 고금을 통해서 이러한 노력의 결정(結晶)에 대하여, 일반 사람들은 존경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노력이 젊은이 그 개인의 인격 완성과 행복(幸福)되게 함에 그치지 않고, 사회까지도 번영케 하며, 행복하게 할 것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만일 젊은이들의 독서노력이 지나치게 이기적(利己的)이거나, 사회적으로 무가치하거나 유해(有害)한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소박(素朴)한 대중을 우롱(愚弄)하기 위한 수단을 내포한 독서나, 배움이 그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랴? 독서하고 배운다는 욕구는 이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젊은이는 대 자연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일월성진(日月星辰) 대(大)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며, 개인과 사회의 행복과 여유를 찾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젊은이의 평범성(平凡性)과 불완전성을 알고, 이것을 좀 더 가치 있고 완전한 것으로 하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독서의 목적은 대 자연의 진리를 탐구하며, 젊은이의 가치(價値)를 찾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대(大)자연과 젊은이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언급해 보기로 한다.

젊은이는 자연(自然) 속에 살고 있다.
자연은 모든 것을 지배(支配)한다. 젊은이도 자연의 지배를 받고 있다. 다른 동물은 자연의 지배에 순종하여 태고(太古)이래 발전 없는 생존(生存)을 하고 있을 뿐이다.

조류(鳥類)는 하늘에서만 살아 왔으며, 어류(魚類)는 물 속에서만 살아왔고, 금수류(禽獸類)는 혈갱(穴坑)에서만 살아 왔다 그들의 생활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대차(大差)가 없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자연의 지배에 대하여 좀 더 능동적(能動的) 이었다.
젊은이는 유아시절 원래 기어 다니던 것이었으나, 일어서서 다닐 것을 생각해 냈고, 이로 인하여 손이 해방되어 평면적인 관찰에서, 입체적(立體的)인 관찰로 이행하게 되었다. 드디어는 생활 필수기구를 만들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되자, 땅 판 자리에 씨를 뿌려 곡식을 키우고 저장케 되었던 것이다.

외적(外敵)의 침입에서 스스로를 보전하기 위하여, 인적, 지리적 집단생활을 영위하게 되었고,거기에 하나의 필연적인 규율(規律)이 생기게 되었으며, 그들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은 예술(藝術)의 형태를 나타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대(大)자연의 제약을 받으면서도, 이것을 자기의 환경(環境)에 적합하도록 노력하여 왔던 것이다.

이 노력이 곧 사람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된 원인이다.

다른 동물에 이러한 지적(知的) 노력이 없었다는 것이 그들이 태고이래 시종여일(始終如一)한 생존밖에 할 수 없었던 원인인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하나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그것은 사람도 확실히 동물(動物)이란 것이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은 사람의 우수성이 자칫하면 사람이 동물이 아닌 어떤 별개의 것으로 착각하기 쉽게 한다.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생각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확실히 동물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사람이 동물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을까?
사람이 동물이란 것을 자각(自覺) 함이 없이는 진정한 인간의 행복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리적 조건에 역행하는 교리(敎理)는 하나의 허위(虛僞)일 것이며, 이러한 허위와 가면(假面)으로서는 사람의 생리와 감정에 알 맞는 배움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배움의 원천 (源泉)인 독서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이러한 동물적인 약점과 과오(過誤)의 반복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사람이 가진 오해와 약점을 시정할 수 있음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대(大) 자연의 지배 속에 생활하는 동물로서의 인간, 그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인격"을 완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독서운동이 필수적이라 함은 두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할 것이다. 그러면 과연 언제부터 이 독서운동이 시작되어 왔는지의 근거를 현재 찾아보기로 하자.

하나의 시스켄으로 본다면, 지금으로부터 86 년 전(前)인 1919 년에 미국(美國)의 소년단 도서관장 이었던 "프랭크린 게이메슈"가 소년들에게 독서를 장려(奬勵)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제창(提唱) 했다는 사실만은 들어서 알 수 있다. 그 후 미국 도서관 협회가 주동(主動)이 되어 젊은이는 물론, 국민 전체에 이르기 까지 독서의욕을 고취(鼓吹) 시키기 위해서 장려 했다.

이 운동은 점차적으로 세계 각국에 전파 보급되어, 오늘에 와서는 세계 인류의 독서 보급 운동으로서 정착, 국제적인 행사의 하나로 된 것이다. 그에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도 1927 년부터 연중 행사로 실시되어 오고 있으며, 이 독서 기간을 매년 10 월 20 일부터 26 일까지로 정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周知)하는 바이다.

끝으로 오늘 날, 우리 젊은 독서계의 일반적인 경향을 논함으로서, 이 글을 맺으려 한다.

지금 독서계의 가장 유감(有感)된 현상은, 두말 할 것없이 "인간학의 결핍(缺乏)"일 것이다. 독서의 목적이 인간의 생활을 미화하며, 합리화함에 있거늘, 오늘의 학문과 독서계는 송두리채 형식적인 미(美)에서 배회(徘徊)하며, 이기적인 합리에서 침체(沈滯)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의 현실에 있어서는, 상당한 학식을 쌓은 자라 하여도 젊은이 어르신 가릴 것없이 인간적인 면에 있어서는 극히 각박(刻薄)한 존재인 것을 다반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참다운 정서(情緖)를 이해하지 못하며, 참된 인간의 미를 즐길 줄도 모르며, 의리를 위한 한계마져 찾기 곤란한 형편이다.
인간의 행복과 삶의 가치는 인생의 끝없는 미 즉, 즐기며 따뜻이 흐르는 서로 서로의 정서를 이해하는데 있다.

특히, 젊은 그들이 이것을 맛보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의 독서 경향이 형식적이며 이기적 공리주의(功利主義), 그리고 고답성(高踏性)에 그 원인이 있는바, 그 근본엔 그들이 독서의 목적이 인격의 완성에 있으며, 인간학의 규명에 있음을 망각(妄覺)한데 서 비롯한다 할 것이다.

인간적 무게 없는 자, 어찌 존경의 대상이 될 것이며, 그러고서야 어찌 젊은이가 한 인간으로서 사회에 기여(寄與)한다 할 것인가. 결국 그런 젊은이의 세계는 개인적인 소득(所得)의 정점인 행복권을 누리기에도 힘들 것이다. 최하급의 젊은이란, 사회를 생각함이 없이 자기만을 생각하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독서와 진리 탐구의 길은 결코 평탄(平坦)한 대로(大路)를 걷는 것과는 다르다. 이 길은 들어가서 한(限)이 있는 야산(野山) 길도 아니며, 노(櫓)를 저어 가서 끝이 있는 바닷길도 아닌 것이다. 사람의 일생(一生)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과 같으며, 독서의 길도 생(生)을 두고 하는 고난(苦難)의 길인 것이다. 독서의 길은 일생을 통하여, 피 땀의 정진(精進)을 요구하는 길이다.

이와같은 진지한 정신 없이는 젊은이의 독서 길은 개척(開拓)되지 않을 것이다. 독서한다는 것은 한 단계에서, 다시 높은 단계로, 낮은 지식에서 높은 지식을 학구(學究)하는 것이다. 독서 삼매(三昧)로 얻는 환희(歡喜)는 참으로 인생이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한다.

독서를 통한 인간 정신의 발전은, 지식과 지혜를 높여, 인격을 향상케 하며, 인간으로서의 무게를 더 하게 할 것이다. 독서의 길이 비록 일생을 통한 고난의 길이긴 하지만, 이러한 기쁨은 고난을 겪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것임을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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