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 오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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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 오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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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하고 아찔했던 순간들

“쏘아 죽여 버린다!” 쌕쌕이 굉음이 스치는 순간 마루로 뛰어오른 인민군에게 “신발신고 어디를”

인민군이 아버지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하얗게 질린 아버지 얼굴, 급하게 어머니가 총구를 옆으로 밀어내며 그를 달랜다. “괜찬습니다요, 괜찮아”

인민군들이 한참 후퇴 중이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신발신고 마루로 뛰어오른 인민군을 나무라던 아버지 때문에 생긴 위급상황이었다.

쌕쌕이가 사라지고 그는 안방을 통해서 뒤쪽울타리를 뛰어넘어 빠르게 도망가고 말았다. 순간 우리들은 가슴이 또 한번 섬뜩했다. 당시 인민군에 끌려갔던 막내 외삼촌이 도망와서 우리 집에 숨어 있었다. 숨어있던 천정다락에서 나와 있다가 열린 안방문 뒤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 문 뒤에 있었기에 그는 외삼촌을 보지 못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아찔한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죽을 고비를 넘긴 상황이 또 있었다. 우리집은 대전 문화동이었다. 6,25 발발 후 미군들이 계속 우리 집 앞을 지나 산속 대덕군 방향 산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딘 소장이 포로가 된 지점이 당시 이곳 대덕군으로 기억된다. 인민군들이 우리 집을 수색하고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에 다니던 때 동생이 6.25 발발 하던해에 태어났기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하고 있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것이 아버지의 심산이었다고 후에 말씀하셨다.

동내 어귀에 있던 관계로 지나는 피난민들이 무거운 짐들을 쳐마 밑이나 마당에 맡겨놓고 갔다. 그중에 경찰관이던 고종사촌형이 맡겨 논 짐 속에서 권총반도가 나왔던 것이다. 권총을 들이대는 인민군 장교 앞에서 모른다고 변명하던 백지장 같던 아버지 얼굴이 떠오른다. 역시 어머니의 모르는 사람들이 맡기고 갔다는 침착한 설명과 호소가 아버지를 구했다.

어린 다섯 남매들은 아버지가 덮어놓은 솜이불을 들치고 나와 마루 빈지문 사이로 전쟁실황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앞산과 뽕나무 밭 사이로 대전시내 쪽으로 진격하던 인민군들이 쌕쌕이가 나타나면 순간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된다. 포격 속에서 총알이 빗발치는 길에는 먼지가 풀석풀석 했다. 영화 보듯이 어린 우리는 신이 나게 이런 상황을 보았던 것이다. 아찔하고 섬뜩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55년 전의 6.25를 다시 한번 상기해본다. 6월 하늘은 맑기만 한데 그분 아버지는 옆에 안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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