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해도 유쾌한 내 인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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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해도 유쾌한 내 인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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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고단하지만 유쾌한 인생(독서).

(내 인생 특히 학창 시절은 독서, 음악, 영화. 그리고 사색과 아르바이트로 꾸며졌다. 그 중에 여기서는 독서와 음악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본다.)

나는 그간 딱딱한 글을 지루하고 길게 써왔다. 그리고 혹시 누군가가 충고할 때면 "이렇게 길고 복잡한 인생을 피와 땀과 눈물로 직접 살면서 생각하고 정리해서 다시 글로 쓴 사람도 있으니 열심히 읽고 생각해두면 나중에는 모두 연결되면서 보약이 될 것이다. 단 내 글이 어려우면 정신이 맑은 아침이나 한가할 때 다시 읽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최근에 내 머리 속에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만일 이렇게 살다가 죽게 된다면?」 하고 자문했다. 이는 내가 오래 어려운 상황을 버텨온 당연한 생각이고 내 인생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쨌든 이렇게 생각해보니 한참 동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냐하면 나야말로 이 세상에서 정말 아름답고 즐겁게 살면서 때로는 푼수처럼 속절없이 마냥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염라대왕 앞에 갔을 때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즐겁게 살다온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겠다고 장담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내가 이대로 죽는다면 "딱딱하고 힘들게 살다 죽어버린 혼자만 똑똑한 우둔한 인간"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나는 가족에게 "내가 죽으면 세상에 존재했던 흔적을 어떤 곳에도 추가로 남기려고 하지 말라."고 부탁 아닌 유언을 남겨놓은 상태다. 이런 말을 한지도 벌써 20년이 되어간다. 그리고 묘나 위패도 만들지 못하게 했으며 아무도 나를 향해 기도하지 못하도록 당부해두었다. (이 말을 듣고 내 아내가 나에게 말했던 기상천외하고도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쌈? 아닌 말씀? 아닌 명언은 여기에 소개하기는 너무 아까워서 좀더 발효시켰다가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순박하게 인간적으로 살아온 사람인지에 대해 학창 시절 일부를 소개하기로 했다.

1. 독서.

나는 고전 음악과 독서가 내 인생의 버팀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창 시절 내내 함께 했던 최고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책은 항상 세 가지 종류를 동시에 준비해놓고 읽었다. 한 가지는 까다로운 철학 책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사상이나 심리나 종교나 칼럼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교양, 취미, 퀴즈, 자서전이었다.

이렇게 여러 책을 함께 읽게된 이유는 초롱초롱 맑은 정신에는 어려운 철학 서적을, 평소에는 사상이나 심리나 종교 서적을, 머리가 복잡하고 피곤할 때는 교양이나 자서전이나 취미 서적을 읽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은 거의 읽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읽어본 이광수 전집과 한국 단편집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3-4권을 읽은 것이 전부다. 소설을 읽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소설은 내 머리를 소설 책 속으로 몽땅 끄집고 가버렸다.

나는 책을 통해 세상사나 인생사를 모두 배워서 이해하고 싶었다. 과연 세상과 인간에 대해서 누가 어떤 분야에서 무엇을 어떻게 피력했는지, 어떻게들 살았는지 등이 궁금했다. 그런데 소설책을 펴들면 잠시 후 특별히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책의 줄거리 속으로 머리가 파묻혀 버렸다. 그리고 종말에 이르면 진한 감동이 전해왔다. 대충 이런 이유 때문에 소설은 읽기 싫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남들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가 나에게는 읽지 않는 이유였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유년기와 아동기 내내 특수한 환경으로 인해 내 자신을 일부라도, 잠시라도, 누군가에게, 어딘가에 조금도 맡겨놓을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을 보냈다. 그래서 항상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살펴야 했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만 생각하면 금새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는 했다. 아마 성인이 다 되어버린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나를 무엇인가에 맡길 수가 없었다. 내 상황이 너무나 복잡했고, 그런 나를 이해할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영향인지 나는 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면서 단 1-2%도 빈틈을 허용할 수 없는 처절한 입장을 각오하고 생활했다. 그것이 내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죽지 않고 살기 위해 내 스스로 철인도, 깡패도, 성인군자도, 바보 같은 천치도, 비굴하고 비열한 속물도, 조물주의 사명을 받은 사람도, 최상으로 존엄한 존재도 닥치는 대로 모두 되었다. 삶의 극단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때도 있었고 적극적인 선택일 때도 있었다. 죽임을 당하지 않고 싶었고, 죽임을 당하고도 싶었고, 내 스스로 죽고 싶었고, 내 스스로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도 치며 혼란과 갈등과 고통과 방황으로 유년부터 청소년기를 보냈다.

삶에 지쳐서, 아니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지쳐서, 아니 살겠다는 생각에 지쳐서 차라리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나마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마음을 풀어버렸다. 이런 죽음의 각오 덕택에 죽음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죽음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양하게 살펴보게 되었다. 이렇게 내 개인의 죽음을 감당하게 되면서부터는 곧바로 죽음의 의미를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생과 사의 의미에 대해서 남들에게 설명해줄 수 있게 되었다.

내 생각에는 「인간은 철이 들면 무엇보다 태어남과 죽음부터 정리해야 한다. 물론 인간은 자신이 미리 알고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며 태어나기 위해 특별히 각오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죽음이란 잘 알아야 하며 각오도 해야 한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죽음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특히 죽는 순간이나 죽은 이후에 대한 관심보다는 실제로 숨이 떨어지기 직전까지를 잘 정리해놓아야 한다. 자신이 잘 태어날 방법이 없었듯이 잘 죽는 방법도 없다. 그래서 죽기 직전까지 잘 정리해서 사는 것이 잘 죽는 것이 된다.」고 정리를 해놓았다. 물론 죽음 자체만을 붙들어서는 얻을 답이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연약하고 순진한 내 개인 입장만으로 생각했을 때는 하늘이든 하느님이든 조물주든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하늘도 믿지 못할 상황에서 하물며 철부지나 속물 수준인 인간을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는가. 특히 우리처럼 수 천 년을 어둠에 갇힌 사람들은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다시 말해서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존재했던 그 어떤 것과 그 누구도 믿지 않았으며 의지하지 않았다. 단지 생활 속의 것들을 기대 없이 망설임 없이 최선을 다해 함께 관계하며 지냈다. 때문에 어느덧 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도움만 주는 강한 사람이 되고 강자 입장이 되자."라고 작심을 해버렸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 이후로는 더욱 편해졌으며 탄력을 받았다. 그리고 생각하니 내 이름도 翊柱(도울 익, 기둥 주)여서 기분이 괜찮았다.

내가 만일 어려운 시절에 술에 의지했거나 술과 자주 접촉했다면 이미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일찍부터 복잡한 내 환경을 고스란히 말짱한 정신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소화를 시켜서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보약을 제조해서 제공해주기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이런 일을 당할 수도 없고, 버텨낼 수도 없을 것이어서 오직 내 인생이고 나의 임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짱한 정신에 습관(훈련, 중독)되어서인지 평소 컨디션보다 많이 나쁘거나 많이 좋으면 술이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면 술은 냄새도 맡지 않는다. 특히 약간이라도 흥을 돋울 정도의 상황이면 부담 없이 술을 먹기도 한다. 그래서 술에 취해 흐느적거려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인간은 세상 만사를 활용하고 참고하고 응용하는 존엄한 존재여서 감당하지 못하거나 흐느적거리고 비틀거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내가 무엇이든 말짱한 내 정신으로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과정들이 나에게는 당초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절대적인 기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

책을 읽는 속도는 철학 책을 한 권 읽으면 그 사이에 사상과 심리서적은 2-3권을 읽었으며 교양서적은 5-6권 이상이 읽혀졌다.

여기서는 내가 경험한 독서의 진짜 맛을 한 가지만 소개한다. 나는 독서할 때 책의 중요한 대목에서는 책을 덮어놓고 나서 저자의 가슴과 머리와 마음과 그 시대나 생활 속으로 차례로 들어가서 한참 동안 저자가 되거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저자가 그런 말이나 표현을 하게 된 이유나 과정이나 배경이나 심리를 내가 직접 겪은 것처럼 체험해서 실감이 나면 다시 책을 펴들고 읽었다. 이 때 나는 저자가 생각했던 이상을 느끼기도 했으며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것들을 깨닫기도 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맛이고 경험이고 체험이었다.

그리고 이후 군대에서 읽던 책을 내동댕이치면서 "나는 다시는 책을 읽지 않겠다. 그리고 이후 내가 세상을 직접 확인하고 정리해서 죽은 귀신들과 철학자와 사상가는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정리를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손에서 책을 놓은 지 20년이 되었다. 20년 동안 아마 2-3권 정도를 읽은 것이 전부인 것 같다.

나는 한 때 무수히 많은 책을 읽었다. 하지만 내가 읽은 책들을 가지고는 어느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읽으면 읽을수록 맑아지고 밝아지고 명료해지고 투명해져야 함에도 전혀 그렇지를 못했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여기서 거론하면 오히려 혼란일 수 있어 생략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떤 형태로든 최종 정리를 해서 초등학생부터 할아버지까지 상식만으로도 인생이든 세상이든 진리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로 작심했다. 특히 그간 수없이 존재했던 자의반 타의반의 사기꾼이나 말장난이나 교묘한 술수가 더 이상 인류에게 먹혀들지 않도록 상식적인 거름장치를 만들기로 했다. 이런 거름장치가 만들어져야만 수많은 상황과 갈등과 고통과 고민과 방황 속에서 결국에는 사람들이 사리분별과 사리 판단을 도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성인군자들도 나름대로 어느 한 세상에 몸담아서 어느 부분을 말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더구나 시대 흐름에 따른 다양한 변화 내용이나 정보는 오히려 내가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속물처럼 사는 존재가 아니라면 처음부터 구태여 성인군자를 의지하거나 따라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성인군자를 알면 알았지 성인군자는 나라는 존재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 개인이 처한 구체적인 환경과 특수한 입장도 알지 못한 채 단지 자기 말을 해놓은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일 남들이 내가 오래 전에 했던 말을 쫓아 살거나 그대로 따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끔찍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주장, 이론, 사상, 진리, 철학도 세상의 어느 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그리고 누가 얼마나 어떻게 도움을 받았는지,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연관되었는지,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왜 전혀 연관되지 않았는지, 혹시 그로 인해 직접 간접으로 피해를 받은 사람은 없었는지. 있다면 이유는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등을 따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선과 정의처럼 이론이나 주장이 막연히 옳고 바르다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그 효과와 병폐와 부작용과 각종 영향에 대해서 시대와 상황과 효과와 인류 발전과 자유 평등과 인간의 존엄성에 얼마나 어떻게 이바지하고 문제들을 초래해왔는지를 연구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중요한 다른 분야나 삶과는 어떤 유기적 관련성을 갖고 있는지를 세부적으로 따지고 총체적으로도 따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후 원리나 체계의 밑바탕을 깔기 위해 책을 펴내기도 했으며 지금도 출판사에서 편집 계류 중에 있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독서는 독서일 뿐이라고 말해주곤 한다. 물론 나름대로 의미나 가치가 없다면 어느 누가 책에 정신을 집중하겠는가. 하지만 과다한 의미를 두면 안 된다. 특히 책을 읽는 사람이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남자는 필히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읽어야 한다)라는 고사성어다. 이는 독서의 의미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독서의 질보다 양을 따지는 천박한 말이다. 물론 당시의 책들은 모두 질적이어서 무조건 옳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책을 읽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단지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소장한 사람은 대단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속절없는 이야기다.

인간은 독서를 통해 지식과 지혜와 교훈을 얻는다. 하지만 인간은 책이나 독서보다 천 배 만 배 상위 개념이다. 그런데도 흔히 사람들은 독서를 통해 참된 인간, 대단한 지식과 지혜를 갖출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인간이 "책"을 만들어놓고 "독서"로 표현만 바꾸어서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해서 쉽게 의지하려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은 책이든 독서든 해당 작가는 존중해야 하되 내용은 자신이 참고해야 할뿐이다. 그러나 만일 쉽게 믿거나 의지하거나 큰 가치를 부여하면 자칫 시간 낭비 뿐 실제로 얻을 것은 없다. 특히 이런 식의 배움과 지식과 지혜는 자신을 합리화하고 미화할 뿐이며 열정이 생기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는 열정만 부족한 것이 아니다. 남의 것을 쉽고 빨리 얻어서 편히 살려고 하는 방식으로 독서를 하게 된다. 나는 책을 많이 읽고도 자기 열정을 찾지 못한 사람에게 "게으른 독서가 원인"이라고 말해준다.

게으른 독서로 대충 책을 읽는 사람은 갈수록 남이 정리해준 것이나 쉽게 요약해놓은 것을 찾으려고 한다. 심지어 길고 지루하고 복잡한 것은 외면하게 된다. 이는 책에 써진 활자만 보고 감동적이고 감각적으로 받아들인 나머지 활자 이외의 행간 즉 작가의 열정은 보지 못한다. 때문에 작가가 어떤 열정을 얼마나 가졌는지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말장난에 불과한 책에 빠져서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들 중에는 "책을 아무리 많이 보아도 도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라는 사람도 있다. 이는 "인생을 살았지만 결국에는 허무하고 허망하다."는 표현과 같다. 이는 작가나 작품의 이면에 깔린 열정을 헤아려서 존중하고 경외하지 못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인생에서의 혼과 열정은 다음에 이어질 음악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합니다. 좀더 솔직하고 강력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면서 이만 줄입니다.
(다음은 "음악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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