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궁궐과 창덕궁의 역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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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과 창덕궁의 역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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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우리 궁궐 이야기 (5) 창 덕 궁 (5)

^^^▲ 창덕궁. 인정전-선정전으로 연결된 회랑사진은 선정전쪽에서 인정전쪽을 향해 촬영한 것임^^^

지난 회에서 우리는 조선 궁궐에 대한 전반적인 역사를 살펴 보았는데요. 1392년 7월, 고려를 대신한 태조 이성계의 조선왕조 개창과 더불어 조선 궁궐의 역사도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왕조 역사와 더불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등 오늘날 우리가 5대 궁궐이라고 불리우던 궁궐들이 역사적 흐름 속에 잇달아 세워지면서 조선의 역사와맞물려 궁궐의 역사도 건립과 화재 소실, 그리고 중건이라는 부침의 순환을 거듭한 채 오늘까지 이어져 왔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둘러볼 창덕궁의 역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덕궁의 역사 (상)

창덕궁에 대해 일제시대 사학자인 호암 문일평 선생(1888-1939)은 일찍이 창덕궁의 특징에 대하여

1. 조선왕조 초기의 건물인 돈화문이 유지되고 있고,
2. 후원과 같이 서울 제일의 심오하고 아름다운 대 정원을 가지고 있으며,
3. 궁궐 규모가 굉장히 화려하며.
4. 각 시대의 새 건물 및 옛 건물이 들어서 있고,
5. 궁궐 제도가 그대로 구체적으로 남아 있으니 자랑거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호암전짐 3권 (고건물 순례) 편-

고 할 정도로 창덕궁을 조선시대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자 궁궐로 손꼽았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건축이자 궁궐로 손꼽히는 창덕궁은 조선이 생긴 이래 두 번째 궁궐로 정궁, 즉 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건립됩니다.

창덕궁이 처음 지어진 정확한 시기는 조선 3대 태종 5년이던 1405년 음 10월 19일의 일이었으며, 지금의 창덕궁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그보다 약 1주일 뒤인 10월 25일의 일이지만 왕자의 난과 같은 골육상쟁의 비극을 꺼렸던 태종의 뜻에 의해 지어졌다는 사실을 지난 회에 우리는 조선 궁궐의 역사에서 살펴 본 바 있습니다.

어쨌든 이때 지어진 창덕궁의 크기와 규모는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 기록을 보면 당시 창덕궁의 규모가 어떠했는 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침전 3간, 동서침전 각 2 간, 동서 천랑(회랑) 6간, 동서 누랑 과 북행랑이 각 11간, 연배 서 별실 3간, 동서 행랑 15 간, 동루 3 간, 상고 3간, 양전 수라간 및 사옹방 및 탕자, 세수간, 잡간각 등 내전 건물이 총 118 간 이었고, 임금이 정사를 다스리던 외전 3간 , 보평청 3간, 정전 3간 등이었으며, 그밖에 승정원 청 및 각 행랑과 부속 시설 물들을 규격에 맞게 시설하였다.

창덕궁이 완공된 그 이듬해인 1406년인 태종 6년 4월에는 후원에 광연루 라는 누각이 건립되었고, 1411년인 태종 11년에 진선문과 그 안의 돌다리인 금천교가 들어섰으며, 정문인 돈화문이 지어진 것은 다시 그 이듬해인 태종 12년인 1412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대체적으로 창덕궁이 완성되자 태종은 줄곧 이 곳에 머물며 나랏일을 보았고, 때에 따라 경복궁으로도 옮겨 들며 나랏일을 보는 등 필요에 따라 옮겨 드는 궁궐로 이용됩니다. 하지만, 태종은 골육상쟁이라는 큰 비극을 겪은 끝에 왕위에 올랐기에 선뜻 경복궁에 머무르기가 꺼림칙 했던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태종의 다음 임금인 4대 세종 원년인 1419년에는 창덕궁 외전의 정전 3간을 헐고 그 자리에 정면 5간, 측면 4간의 큰 규모의 건물을 짓고 이름을 인정전이라 하였습니다.

세종은 경복궁에서 즉위하였으나, 부왕인 태종께 수시로 문안을 드리면서 나랏일을 보살피고자 창덕궁으로 옮겨왔고, 부왕 태종을 위해서는 창덕궁 옆에 수강궁이라는 별궁을 짓고 수시로 문안 드리면서 나랏일을 돌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창덕궁보다는 경복궁에 주로 머물렀습니다. 이후로 줄곧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면서 나랏일을 돌보기는 하였으나, 세종 재위 32년 동안의 조선 발전의 중심지는 뭐니뭐니해도 경복궁이었습니다.

경복궁에서 주로 훈민정음 창제와 같은 커다란 사실들이 벌어졌기에 창덕궁에서는 이렇다 할 사실들이 없었으며, 다만 세종이 창덕궁에 머무를 때에는 주로 광연루를 즐겨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태종 - 세종 연간을 거치면서 궁궐의 시설을 갖춘 창덕궁이었지만, 세조때 들어서면서는 여러 전각들의 이름이 지어지게 됩니다. 즉, 궁궐의 규모나 시설등은 갖추어졌지만, 정작 이렇다 할 이름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세조 7년이던 1461년에 들어와 붙여진 각 건물들의 이름들을 세조실록 및 궁궐지를 토대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조계청(보평청 으로 임금이 나라일을 돌보던 편전임)을 선정전(宣政殿)이라 하고, 그 뒤편의 동별실을 소덕당(昭德堂) 이라 하였으며, 서별당은 보경당(寶慶堂) 이라 하였다. 또한 정당, 즉 내전의 정침은 양의전(兩儀殿 - 훗날 대조전(大造殿)으로 이름이 바뀜) 그 동서쪽 침실을 여일전(麗日殿)과 정월전(淨月殿) 이라 하였으며, 그에 딸린 다락은 징광루(澄光樓)라 하고, 동서쪽 별당을 응복정(凝福亭)과 옥화당(玉華堂), 그에 딸린 다락을 광세전(光世殿) 이라 하였으며, 광연전 별실은 구현전(求賢殿) 이라 하였다.

세조때 각 전각의 이름이 붙여지고 그 2년 후인 세조 9년 (1463) 2월에는 창덕궁의 영역을 크게 확장하고자 주변에 있던 민가들을 옮기도록 하였으며, 이때의 면적은 약 20만 3769평이었다고 합니다.

세조때 확장된 창덕궁은 계속해서 성종이 경복궁을 대신하여 이곳에서 나랏일을 보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대비를 위해 창경궁이 건립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으며, 창덕궁엔 별도로 예문관 대제학으로 있던 서거정에게 명하여 창덕궁에 딸린 문마다 이름을 둘씩 지어서 바치게 한 다음 직접 일일이 낙점하여 문액을 써서 달 게 하였는데, 이때가 성종 6년이던 1475년 음 8월 24일의 일이었습니다.

이때 단봉문(丹鳳門), 숙장문(肅章門), 금호문(金虎門) 등과 같은 많은 문의 이름들이 이때 지어져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불려오고 있습니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 역시, 창덕궁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자신의 향락을 즐기기 위해 후원쪽에 새로 서총대라는 놀이터를 짓고, 그 주변을 크게 넓히기 까지 하였습니다만, 중종 반정으로 인해 폐출되어 창경궁의 선인문 쪽으로 쫓겨나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후 중종때부터 선조 25년인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전까지 역대의 임금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번갈아 오가며 나랏일을 돌보지만, 창덕궁이 경복궁보다 더 많이 애용되었습니다. 왕자의 난이라는 골육상쟁의 발생지, 풍수지리설의 문제점과 경복궁 터전의 위치와 배치가 너무나 위압적이라는 점에서 역대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자연적이고 아름다운 후원을 지닌 창덕궁을 주로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은 경복궁 및 창경궁등과 더불어 왜군들에 의해 불에 타는 비운을 겪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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