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부의 순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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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부의 순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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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우리는 충분히 부유하다

“행복이란 얼마나 많이 가지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만족하느냐에 달려있다.” 이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흔한 명제입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말이 얼마나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이해하기란, 생각보다는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많은 것을 가지기를 위한 노력을 줄이는 것, 혹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실제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랜 동안 보다 풍요로운 삶이란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타의에 의해서 가지고 있던 것들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실의에 빠지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그 힘든 고난을 이겨내는 사람들의 사례들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후 온갖 노력을 하고도 끝내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고도 실의에 빠지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에서 참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서도,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런 이들에게 아낌없이 갈채를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가난을 자청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이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가난한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결단이 필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우리들이 기본적인 삶만을 누리려고 한다면 생각보다 그리 많은 돈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많은 수입을 원합니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 훨씬 더 편리한 삶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장이라는 거대한 메커니즘에 의해, 인간의 지혜를 동원해서 고안하고 힘든 노동을 통해 만들어 낸 거의 모든 편의를 돈만 있으면 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삶을 산다는 것은 이런 모든 편안함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이란 단어에는 편리함의 상실이란 것 외에 또 다른 하나의 차원이 있습니다. 바로 모욕감입니다. 모욕감 혹은 모멸감은 상대적인 빈곤감에서 나타납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에서 친구가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나 게임기를 자신이 가지지 못할 때, 마음 아파하고 상처받는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조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소위 명품열풍에 휩싸여 저마다 마음고생을 앓으며 사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장난감이나 명품을 소유함으로 오는 만족감의 반면에는,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가난이란 그렇게 편의성의 상실과 상대적인 박탈감이라는 날카로운 두개의 칼날을 가진 검입니다. 어느 것도 무시할 수 없는 가난의 두 가지 속성 중에서 더욱 예리한 아픔을 주는 것을 골라야 한다면,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상대적인 박탈감을 선택할 것입니다. 다같이 못사는 사회에는 비록 결핍으로 인한 슬픔은 있을망정, 가슴 저미는 아픔은 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해 영양결핍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행복이란 만족하기에 달린 것이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죽어가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한쪽의 칼날로 인해 사회가 겪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어느 정도의 생산력을 갖추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산력의 정도가 행복의 정도와 비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상대적인 박탈감이란 칼날이 항상 옆구리를 예리하게 찌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농기구가 발달하지 않은 전근대적 사회에서 모든 농업노동을 사람의 힘만으로 하여, 종일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하고도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시대가 행복했다고 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물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얼마만큼 생산력이 향상되면 생산력이 충분히 발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없기 마련입니다. 가난이 상대적인 만큼, 욕심도 상대적입니다.

빈부의 격차가 클수록 더 많은 저마다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은 욕구에 시달릴 것이고, 보다 큰 생산력을 향한 사회의 추구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가 더 높은 생산력의 확대를 추구하는 한은 빈부의 격차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고, 상대적인 박탈감에 의한 결핍감 또한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회가 더 향상된 생산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본의 집중이 필요하다는 점이 논리적으로 설득력을 갖기 때문입니다. 또한 더 높은 생산력을 갖추기 위한 방법을 고안한 천재적인 이노베이터(Inovator)들에게 지적소유권이란 이름으로 상당한 경제적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논리 또한 빈부격차를 정당화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단순한 경제활동의 자유라는 이유만으로 무제한적인 경제력의 집중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경우는 논의에서 제외하기에 충분할 만큼 비윤리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줄이려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수준에서 만족을 느끼는 수밖에 없습니다. 즉 만족을 느끼는 경제적 수준의 목표치를 낮추고, 생산력의 증가를 멈추고 경제적 격차를 줄이는 쪽으로 사회의 방향을 트는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충분한 정도의 사회적 생산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빈부의 격차를 허용하는 자본의 집중화와 지적소유권에 대한 권리를 제한 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느 정도의 생산력이 모든 사람이 나누어 쓰면서 물질적인 공급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인해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는 수준이 될까요. 지금 GNP가 1만 불에 가까운 한국인들은 저마다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반면에 가난을 방글라데시 국민들은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1위라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지금 한국사회가 누리는 경제적인 삶은 이미 경제적 성장을 위해 분배의 정의를 희생하는 과정을 그만두기에 충분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생각됩니다. 단지 이제까지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결핍을 느끼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절대빈곤층이 있습니다. 그들의 결핍으로 인한 가난은 경제정의의 실현으로 메꿔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절대적 빈곤층이 아닌 사람들이 느끼는 결핍감은 빈부의 격차가 줄어들면 자연히 줄어들 것입니다. 이제 우리사회는 성장에서 경제적 정의와 복지로 방향을 전환할 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복지를 위해서 성장이 필요하다고. 그러나 이제 우리사회는 복지를 누리기에 충분한 성장을 이룩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의 해소입니다. 그것이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이 더 많은 행복을 누리기 위한 해결책입니다. 그 옛날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력이 충분히 발달되면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했을 때, ‘그가 꿈꾸었던 충분한 생산력이란 것이 과연 오늘날 우리나라의 평균적인 사람들이 누리는 삶의 수준보다 더 높은 것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마르크스는 오늘날의 우리나라의 평균적인 사람들이 누리는 삶의 수준을 결코 상상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들의 삶은 충분히 풍족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전히 가난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기꺼이 만족의 수준을 낮출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일 뿐입니다. 일자리를 나누어 실업자를 해소하고, 기업의 이윤을 줄여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몫이 돌아가게 한다면. 경제적 정의가 실현되어 빈부의 격차가 줄어든다면 우리들은 보다 풍요로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가난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사회가 일자리와 경제활동의 산물과 경제적 정의를 실현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3D업종은 인력난에 시달리는데 실업난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보다 많은 경제적 성취만이 우리사회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 세계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경제발전이란 끝없는 경쟁에서 다른 국가를 앞지른다고 해서, 결코 우리국민의 보다 더 행복해 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족이란 물질과 편의 지상주의에서 벗어나는데서 얻어질 것입니다. 행복은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데서도 얻어질 수 있고, 경제정의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는 과정에서도 얻어질 수 있습니다. 또 국제적 경제 불균등의 성취와 불의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에서도 얻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이란 얼마나 많이 가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만족스러운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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