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 바람이 불다
스크롤 이동 상태바
겨울 - 바람이 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가 바람을 기다리는 까닭

어릴적 겨울이면 바람이 몹시도 심하게 불곤 했었다. 내가 어린시절을 보내었던 그 곳은 바닷가라 언제나 바람이 많이 불곤 했지만, 겨울밤엔 특히 바람소리가 심하게 울곤 했었다. 동네 뒷산에 키가 높은 송전탑이 들어선 후로 그 울음소리는 한층 더 커졌다. 때로는 그냥 무심하게 듣기도 하지만,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은 송전탑과 고압선을 울려대는 그 바람소리가 무섭게 들리기까지 했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겁을 주시려고 “저건 마귀할멈이 말 안 듣는 아-들 잡아 묵을라꼬 동네마다 돌아다니는 소리다.”라고 하셨다. 그러면 동생과 나는 겁이 나서 숨을 곳을 찾아서 이불을 뒤집어쓰곤 했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면 자꾸만 발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왔다. 자연히 무릎을 굽히고 궁둥이를 든 자세로 엎드려있게 되었다. 그런 자세에서 자연스럽게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제발 우리 안 잡아가게 해주세요.”

우리가 평소에 지은 죄가 너무 많았기 때문인지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해도 마귀할멈은 밤새 우리동네를 떠나지 않았다. 밤을 새워서 알 수 없는 소리로 떠들며 우뢰 같은 고함을 질러대곤 했었던 것이다. 무서움에 떨다가 깜박 잠이 들면 마귀할멈은 꿈속에까지 따라오곤 했었다. 나는 꿈결에 얼핏 마귀할멈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마귀할멈은 그렇게 무섭게 생기지가 않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착한 마귀할멈은 아이들을 잡아가지는 않고, 그렇게 소리를 내면서 겁만 주는 것 같았다.

낮이 되면 밤새도록 마귀할멈이 올라타고 않아서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울어대던 송전탑이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서 산 위로 올라가 보기도 했다. 아무리 보아도 송전탑은 그 전에 보았을 때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낮인데도 송전탑 주위에는 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고, 고압선은 웅-웅- 거리며 낮은 소리로 신음을 내며 울고 있었다. 혹시 마귀할멈이 부근 어디에서 잠자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면 사방엔 온통 메마른 모습의 겨울 산들 뿐이었다.^

산들 사이로 멀리 보이는 바다를 보면서 조그만 바위위에 걸터 않아서 있으면, 주위에 서 있는 나무들이 춤을 추었다. 나무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팔과 손을 흔들며 춤을 추듯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나무를 흔든 바람은 털실로 짠 내 두터운 옷 안으로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정작 괴로운 것은 귀였다. 그렇게 바람을 맞고 있으면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침내 떨어져나갈 듯이 아프면 털실장갑을 벗어서 손으로 귀를 부벼주어야 했다. 그러면 귀의 통증은 조금 덜해졌기 때문이다. 귀를 부비는 동안 빨개진 손은 귀보다는 훨씬 덜 아팠었다.

온몸이 추위에 절어서 뻣뻣해진 몸으로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이렇게 추운 날씨에 어디에 갔다 왔노.”하며 야단 반 안도감이 반이 섞인 소리를 지르셨다. 나는 얼른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면서 “산 위에 가 봤는데 마귀할멈은 집에 갔는 갑더라. 인자는 없데.”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었다. 그러면 이불속에 발을 넣고 내 옷을 짜고 계시던 할머니는 함빡 웃음을 웃으면서 “우리 손주가 착해서 마귀할매도 그냥 가뿟는 갑다.”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마귀할매는 밤이 되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바람이 심하게 불지 않는 날에도 저녁에 마당에 파묻어 놓은 김장독에서 총각김치를 꺼내려고 김장독 위에 덮어놓은 가마니를 벗기고 있노라면, 마귀할멈은 살며시 다가와서 조용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소곤거리다가 돌아가곤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바람을 몰고 다니는 그 할멈과 점점 친해져갔다. 그 할멈은 더 이상 무서운 마귀할멈이 아니었고,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난 후에는 그냥 바람 그 자체로 느껴지게 되었다.

서울로 떠나오고 나서 한동안은 서울생활에 적응하느라고 바쁘게 지냈었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이 내 곁에서 떠나지 않는 허전함의 정체를 알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야 마침내 그게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겨울바람이었다. 바닷가가 아닌 서울의 거리에는 세찬 바람이 없었던 것이다. 서울거리의 추위는 그곳과 비교할 수 없이 심했지만, 바람이 없는 추위는 어쩐지 밋밋하기만 했었던 것이다.

한번씩 가슴속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히 차면 나는 서울의 거리를 걸어 다니길 좋아했었다. 너무 난방이 잘되어 있는 서울생활에 젖어 있다보면, 겨울거리에 나서려고 옷을 따뜻하게 입어도 오래 거리에 서 있기엔 너무 추웠다. 그래서 대학로 거리나 인사동 어귀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다 보면 금새 내 몸은 추위에 젖어들었다. 조금 후에는 손이 곱아들고 귀가 따갑게 아파왔다. 그러나 그 아픔은 왠지 어린시절 나의 친한 친구이던 바람이 가져다주곤 하던 살을 애이는 아픔과는 달라서 그다지 맵지가 않았었다.

그렇게 밋밋하고 깊은 맛이 없는 것이 서울의 추위였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겨울구경을 하고 나면 한동안은 속이 후련해지곤 했었다. 밤을 지새워 울어대던 바람이 잠들고 없는 겨울거리의 밤은, 그래서 그리움이 별들처럼 가슴에 가득히 고여 있곤 했었나 보다. 겨울밤의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그림자지는 나뭇가지 그늘 아래에 서 있노라면, 자꾸만 알 수 없는 허전함이 가슴에 가득히 밀려 올라오곤 했었다. 왠지 모르는 눈물이 솟아올라서 손으로 훔쳐내어도 자꾸만 눈에 어른어른 고이곤 했었다.

무심코 손으로 눈물을 딱을 때, 추위에 언 내 손이 얼굴에 닿는 순간에 느껴질 그 섬듯한 차가움이 내 그리움을 봇물처럼 터트려 놓을까 봐 나는 손을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했다. ‘사내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법이다.’라고 스스로에게 윽박질러보아도, 내 친구 마귀할멈이 주던 그 매서운 추위에 대한 그리움과 그 따뜻한 위로의 손길에 대한 그리움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주문처럼 읊조려 보곤 했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곧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기획특집
가장많이본 기사
칼럼/수첩/발언대/인터뷰
방송뉴스 포토뉴스
오피니언  
연재코너  
지역뉴스
공지사항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뉴스타운TV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