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마지막 보내드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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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마지막 보내드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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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8순 넘으신 친정아버지를 호상이라지만

“언니 나야, 엄마, 아버지 언제 원주에 가신대?”
“응, 원주에서 전화 왔었는데, 내일 오시라고 해서 아침에 내가 터미널에 모셔다 드리려고..”

8순이 훨씬 넘으신 친정부모님은 작년겨울 더 이상 두분 만 사시는게 무리라는 큰형부의 거의 강제적인 청으로 큰언니 네로 들어가셨다.

아직은 내손으로 끓여 드실 수 있다시며 지금까지처럼 따로 사실 것을 고집하셨지만, 아들없는 큰사위의 입장에선 내집에 모셔야 도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식들 입장에선 두분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런 형부의 선택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집에만 계시기가 답답하시면 한 두달에 한번씩 원주에 사는 셋째언니 네에 가시는 것이 큰낙이요, 나들이셨다. 이번에는 오랫만에 가신다며 오래 계시다 오신다며 떠나셨다고 한다.

예전에 따로 사실 때에는 그저 아무 일 없어도 자주 찾아 뵈었었는데, 큰언니 네에 계시니 믿거라 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그나마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있었다. 자식들이란 다 그런가보다.

그 날도 아직은 내 다리로 갈 수 있으니 시외버스로 가신다며 터미널까지 배웅을 해드린 큰언니에게 걱정 말라면서 표도 당신 손으로 끊으시겠다고 고집을 피우셨다고 한다. 엄마, 아버지가 원주에 가신후 십여일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어느 단체의 연수차 충북 진천에 가 있었다.

진천에 도착하여 연수가 막 시작되려할 때 큰언니로부터 계속 전화가 들어오고 있었다. 바로 전날 저녁에도 통화를 한터이라 무슨 일인가 하면서도 나중에 할까 하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회합장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영진아, 난데... 원주에서 전화가 왔는데..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같대...”
“아니, 왜?...아버지가 갑자기 왜?..”
“집밖에 나가셨다가 넘어지시면서 그랬는지... 아직 조사중이라. 어떻게 돌아가신 줄도 잘 모른데..”

그길로 사무실의 도움을 받아 택시를 불러타고 증평터미널로 나왔다. 증평에서 원주까지는 두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한낮의 시외버스엔 몇 사람만 제외하곤 뒷좌석은 텅 비어 있었다.

눈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메어졌다. 딸만 넷을 두신 아버지는 마흔이 넘으신 나이에 나를 낳으셨고 옛 어른들이 아버지하고 막내딸하고는 합이 들었나보다고 하실 정도로 유난히 나를 아끼셨다. 나이 서른둘이 될 때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있던 막내딸에게 칠순이 넘으신 나이에도 돈을 버시면서 막내딸 책상에 살그머니 용돈을 놓고 나가시던 아버지....

‘부모는 자식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그 평범한 말이 내 가슴에 비수로 꽃히는 순간이었다.

남들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9순이 다 되신 부모님이시니 '호상'이라고.. 그런데 사람은 서로의 입장과 살아 온 세월이 다르듯 아직은 아직은, 하며 ‘이삼년만 더 사세요’ 하고있던 내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아픔이었다.

결혼해서도 유달리 부모님 걱정을 많이 끼쳐드린 나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주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것도 갑자기, 말씀 한마디 없이.. 심장이 안 좋으셔서 박동기도 달고 계시고 여러번 돌아가실 위기가 없었던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더 사실거라며 철썩같이 믿고만 있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던지.

병원에서 사망진단서를 기다리는 그 몇 시간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와중에서도 엄마가 충격받지 않으셨을까 그것만이 걱정이었다. 평생을 아버지 곁에서 그 뜻을 다 받드시며 대꾸 한마디 없으시던 엄마가 함께 나가셨다가 그리 되셨으니 얼마나 놀라셨을 것인가.

모든 절차를 밟고 서울에 도착하여 아버지를 모시는 동안 너무도 많은 분들이 와주셨다.

행여 아들 하나 없이 딸만 두셔서 초라하면 어쩌나 하는 것은 쓸데없는 기우였다. 평생을 조카들은 물론 남들에게도 베푸시기만 하셨던 부모님의 덕을 우리 자식들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당신 스스로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베푸시고 가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또 가슴이 메어졌다. 태어나서 부모님 돌아가실 때까지 자식은 받기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를 모신곳의 위치가 너무 마음에 들어 자식노릇 해드리지 못한 죄를 그나마 조금은 씻은 것 같았다. 삼오제를 모시고 내려오면서 아버지가 내 가슴에 영원히 살아 계신다는 생각으로 위로를 삼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 언젠가 그렇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할수 있겠지, 이젠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지금 부족하더라도, 아직 없더라도, 있는 그대로 마음을 다하며 살아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불전’에 ‘부모에게 해 드릴 것이 없으면 다만, 하루 두 세번 웃어 라도 드리라’는 그 말을 나는 알았지만 실천하지 못했다.

이제 아버지가 내게 주셨던 그 많은 사랑을 가슴에 새기면서 남으신 엄마는 물론 내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것이라도 뒤로 미루지 않으리라.

‘지금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아버지가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라고 믿으며 누군가의 말처럼, ‘아버지는 돌아가신 후에 보고 싶은 사람’ 이라는 말이 내가슴에서 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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