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도 버스에서 내리는 딸의 손을 잡고 가로등도 졸고 있는 골목길로 접어들어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이틀 전에 끝난 2004학년도 대입 수능고사가 딸에게도 단연 화두였다.
"아빠, 올 수능도 재수생은 강세인데 반해 재학생은 약세로 나타나서인지 수능을 치룬 3학년 선배들의 코가 납죽해 있어요."라며 벌써부터 내년에 딸 아이 자신이 맞딱뜨릴 대입수능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제 급우는 오는 겨울방학엔 서울강남의 유명한 학원까지 가서 수강을 하겠다더군요. 하지만 나는..."
수능은 사고력 위주의 문제이고 내신은 암기력 위주로 측정하는 이중적 평가체제이기에 그래서 재학생에 비해 재수생의 강세가 올해도 어김없이 나타나자 딸은 그처럼 좌불안석이 되었던 것이다. 허나 딸의 그러한 아쉬움의 토로는 금세 예리한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마구 헤 저었다. 나는 딸에게 할 말이 없어 그저 함구하면서 땅바닥만 응시하면서 걸어야 했다.
나는 현재 경제적으로 그야말로 나락에 빠진 즈음이다. 그러한 극빈의 내 처지에서 딸을 학원에, 더군다나 웬만한 월급쟁이의 월급을 죄 쏟아부어도 쫓아가기가 힘들다는 그 고액이 드는 서울 강남의 학원에 보낸다는 건 그야말로 대단한 사치였기에 나는 딸아이를 보기에도 그저 면구스럽기만 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딸아이는 가방에서 상장을 꺼내주었다. 딸은 지난 중간시험에서 다시금 전교 1등을 했다고 했다. 그처럼 공부를 잘 하는 여식에게 변변하게 뒷바라지조차 못 하는 무능한 아비라는 자격지심에 난 다시금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속이 상하기에 가게로 나가서 새우깡에 소주를 한 병 들이켜고 돌아왔다. 그러자 풍기는 술냄새에 딸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아빠는 이젠 술을 안 마시겠다고 저랑 약속을 한 지가 불과 사흘도 안 됐는데 또 술을 드셨어요?"라며 힐난하는 것이었다. "미안하다, 아빠는 늘 이렇게 너와의 약속을 못 지키는구나"
하지만 이 풍진 세상에 술이라도 안 마신다면 이 아빠는 금방이라도 돌아버릴 것만 같으니 어쩌겠니. 술기운을 빌어 잠을 청하려 했으나 천장에서는 어제 아침에 신문에서 보았던 모 건설업자가 빌라에 숨겨 놓았다가 검찰에 적발됐다는 현금 75억원이 나비가 되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동안 살면서 남에게 악행하지 않고 착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거늘 하지만 오늘날의 내 삶의 질은 왜 늘상 이 모양 이 꼴일까' 하는 자괴감이 다시금 거대한 중압감으로 짓눌렀다.
서울 강남이란 곳이 대체 어디던가. 30평형 아파트가 자그마치 10억원 가까이나 된다는 괴이한 도시이기에 나같은 빈자는 언감생심 감히 들여다보지 조차도 허용이 안 되는 곳 아니던가 말이다. 무너진 공교육, 입시 한탕주의가, 기형적 부의 집중과 부동산 광풍, 그로 인해 탄생한 '강남'이란 우상, 혹은 괴물은 우리사회에 광범위한 자조와 열패감의 검은 바이러스를 구석구석에 뿌려놓았다.
연거푸 한숨을 몰아 쉬노라니 이 무능한 아비의 속터짐을 알아챈 딸아이가 다가와 "아빠, 염려 마세요. 전 서울강남의 학원에 안 가도 잘 할 자신 있어요!"라며 위로해 주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울컥 눈물이 솟구쳐서 얼른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언제가 돼야 나에게도 경제적 봄은 찾아오려는지, 악마보다도 더 무서운 현실의 겨울은 벌써부터 성큼성큼 들어서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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