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에게 주는 허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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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에게 주는 허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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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허전함을 경험하게 하다

어쩌다 보니 나도 맞벌이 부부가 되었다. 절대로 아내에게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는데. 살아가다 보니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다. 처음 호기롭기만 하던 신혼 초기에는 아리따운 그저 아내를 집안에만 가두어 두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 나는 대로 찾아가서 놀아주고 보듬어주고 그렇게 편하게만 해주고 싶었었다.

요즘은 아침 식사를 마치면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선다. 내 사무실에서 함께 일을 하는 것이다. 자연히 학교를 다녀오면 아이들이 집에 저희들끼리 남게 되었다. 동네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지만, 나를 닮아선지 외향적이지 못한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남자아이 둘을 한살 차이로 둔 것이 이럴 때 위안이 된다.

때로는 저희들끼리 친구도 되고, 때로는 저희들끼리 형 동생의 위계질서를 잡기도 한다. 때로 싸우기도 하고, 금세 같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공부를 하기도 한다. 아이들 공부를 돌봐주는 선생님이 다녀가기는 하지만, 남는 시간이 아이들에게는 허전함으로 느껴질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빈집이 주는 공간은 무척 크게 느껴질 것이다.

아내가 친정에 다니러 가면, 모처럼 자유를 누리리라는 기대감과는 달리 빈 집에서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이 감돌곤 했었다. 대학초반에 잠시 어머님이 직장에 다니시던 무렵, 가끔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면 집에는 정적만이 가득했었다. 어머님이 집에 계셔도 대개 내 방에서 혼자 책이나 보고 지냈지만, 그럴 땐 왠지 모르게 쓸쓸함 같은 게 느껴지곤 했었다.

일찍 집에 오는 잦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점심을 차려 놓으시지는 않으셨다. 언제나 식욕만은 무지 좋았던 나는 큰 그릇에 밥하나 가득 퍼고, 큰 김치 하나 쭉 째서 김치 한번 먹고는 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워버리곤 했었다. 그리고 밥을 먹은 식탁에서 빈집을 바라보면 조용하기만 했었다. 문단속을 철저히 한 집은 대낮에도 다소 어두웠고, 왠지 약간 우울했었다.

여기저기에 눈길을 줘 보았다. 주방. 항상 어머니가 서 계시던 자리였다. 마루. 식구들이 모여 함께 TV를 보면, 나는 독서에 방해가 된다고 슬며시 책을 들고 방으로 숨어들곤 했었다. 현관. 그때는 비어있지만 저녁이면 다시 식구들의 신발로 가득히 찰 곳이었다. 그랬다. 다소의 쓸쓸함이 있었지만, 얼마 후에는 가족들이 다시 모여들 것이므로 나는 외롭지는 않았다.^

요즘 아이들이 직장으로 자주 전화를 한다. 처음에는 아직 초등학교 일학년인 아이들이, 전화를 할 줄 아는 게 대견했었다. 그런데 하루에 몇 번씩 전화를 해 오면 약간 짜증이 난다. 아이들이 한가할 때와 바쁠 때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적당할 때 전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저 그들이 느끼는 허전함이, 그들에게 전화를 하도록 만드는 것일 뿐이다.

‘엄마 연필이 안보여.’ ‘엄마 길진이가 자꾸 귀찮게 해.’ ‘엄마 숙제가 너무 많아서 힘들어.’ 대부분 전화를 한다고 해서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일들이 아닌 것이다. 비록 어리지만 아이들이라고 해서 그런 사정을 모르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그저 그런 저런 이유를 핑계로 삼아,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일 것이다.

“엄마는 옆 집 엄마처럼 왜 집에 안 있어?” 혹은 “엄마 나 심심하니까 빨리 집에 와.” 우리는 한번도 엄마가 직장에 나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혹은 직장이란 곳은 쉬 자리를 비울 수 있는 곳이 아니란 것을 아이들에게 설명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나에게 혹은 엄마에게 한번도 이런 질문을 해오지 않았다.

조숙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아이들을 너무 엄격하게 키우는 것일까. 그런 점들이 조금씩 마음에 걸린다. 오랫동안 가족의 따스함을 받으면 그만큼 정서적으로 안정될 것이다. 자신들끼리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많으면 그만큼 독립심이 많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러는 사이에, 가슴 한가운데 어딘가에 왠지 모르는 허전함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참 나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내가 살아온 인생길은, 그리고 지금도 내가 살고 있는 삶은 그리 편안하지 많은 않다. 그러나 아마도 그 아이들도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게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삶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안목.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삶의 뒤 안에 숨어있는 또 다른 의미를 읽어내는 눈길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얻어지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다양한 모습을 깨달고 살아가는 삶은 그리 수월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삶이야말로 보람된 삶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결코 나와 닮은 삶을 강요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어린 아이들의 모습 곳곳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점들이 참 신기하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삶에 대한 그런 태도를 교육시킨 것 같기도 하다. 혹은 아이들이 스스로 아빠의 모습들을 닮아가는 지도 모른다. 혹은 유전인지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아버지를 참 많이 닮았다. 아버지와 나는 세대가 다른 만큼이나 사회적 문제를 보는 시각이나, 시류에 관한 의견이 다르고 관심의 대상도 많이 다른 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선만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족이다. 자주 대화를 할 기회는 많지 않아도 가끔 만나보면 항상 마음이 통한다.

나는 원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아이들에게 허전함이란 정서적 경험을 선사하게 되었다. 우연히 그것은 어린시절에 내가 경험하곤 하던 것과 상당히 비슷한 경험일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여러 경험들을 아이들에게 전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유난히 나를 닮은 아이들이 티격태격하면서 자라가는 모습이 예뻐 보이기만 하다.

아마도 내 아이들은 아빠인 나보다는 더 훌륭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문약한 아빠처럼 필요 없는 과잉고민을 하지 않고도, 나보다는 자신이 할 일들을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훗날 세상의 어디쯤에 무엇이 되어 있던, 그들은 진주같이 빛나는 맑고 눈동자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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