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망각, 90년 된 만주사변
스크롤 이동 상태바
일본의 망각, 90년 된 만주사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일본 대학생 거의 대부분 ‘중국과의 전쟁이 언제 시작됐는지 조차 몰라’
일본 정부는 ‘역할 바꾸어보기’를 스스로 해보면서 상대방의 눈높이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며,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다보고 검토하는 등의 다면적, 다층적 역사분석이 필요하며, 그러한 역사관이 없다면, 효과적인 외교도, 안보 정책도 창출되지 않을 것이다. 일본 극우정치인들에게 겸허함을 요구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일까?  / 사진은 중국 심양에 있는 9.18역사박물관 (사진 : 위키피디아)
일본 정부는 ‘역할 바꾸어보기’를 스스로 해보면서 상대방의 눈높이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며,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다보고 검토하는 등의 다면적, 다층적 역사분석이 필요하며, 그러한 역사관이 없다면, 효과적인 외교도, 안보 정책도 창출되지 않을 것이다. 일본 극우정치인들에게 겸허함을 요구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일까? / 사진은 중국 심양에 있는 9.18역사박물관 (사진 : 위키피디아)

역사는 또 같이 반복되지는 않지만 비슷한 유형의 일들이 다시 일어나곤 한다. 역사는 잊히는 대상이 아니라, 미래를 밝혀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일본은 1931918류탸오거우사건(柳條溝事件)’으로 시작된 일본의 만주침략전쟁이 발생한지 18일로 꼭 90년이 된 날이다. 그러나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자민당 총재 선거에만 집중됐지 만주사변(滿洲事變)’에 대한 언급은 없다. 기억을 못해서일까? 의도적으로 언급을 안 했을까?

역사를 잘 기억하는 사람과 국가가 있는가 하면, 상처투성이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아니면 본능적으로 잊으려 하는 사람과 국가가 있다.

역사를 말할 때 흔히 독일과 일본을 거론한다. 독일은 과거 잘못에 대한 끊임없이 반복하며 사과와 반성을 하는 반면 일본은 주변에 잊지 못할 상처 속에 살아가는 국가와 그 속의 사람들에게 오히려 무엇이 잘 못 됐어?’라며 되묻는 행태를 반복해오고 있다.

1970127일 아침, 빌리 브란트 독일(당시는 서독)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렵탑을 방문했다. 당시 폴란드는 제 2차 세계대전 기간 내내 나치 독일에 점령당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서독에 대한 반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빌리 브란트 총리는 40만 명을 추모하는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추념비앞에 무릎을 꿇고 오랫동안 추모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날 비가 내렸다. 브란트 총리는 바닥에 닿은 무릎은 물론 온 몸이 비에 젖었다. 이를 본 폴란드 국민들은 나치 독일에 대한 앙금이 슬슬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를 보도한 헝가리의 한 매체는 무릎을 꿇은 것은 브란트 한 사람이었지만, 일서선 것은 독일 민족이었다고 했다. 이 말을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은 일본 총리 한 사람이었지만, 주저앉은 것은 모든 일본 국민이었다로 바꾸고 싶다.

1931년 일본 관동군은 침략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 류탸오거우(지금의 심양 북쪽)에서 스스로 만철(滿鐵)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 측 소행이라고 트집 잡아 만철 연선(沿線)에서 북만주로 일거에 군사행동을 개시했고, 일본과 중국은 단속적인 전투를 거듭했고, 전쟁은 전면전으로 비화되면서 수렁으로 빠져들게 됐다.

중일전쟁 전체에서의 사상자 수는 미-일간의 전쟁을 훨씬 뛰어 넘는다. 중국에서 918일은 루거우차오 사건 77일과 함께 국치의 날로 불린다.

하지만 일본은 918일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나고야대학 야스카와 슈노스케(安川寿之輔, 86)명예교수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매년 계속하고 있는 조사에서도, “중국과의 전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대답할 수 있는 학생은 별로 없다는 설명이다.

통상적으로 피해 기억에 비해 가해 역사의 전승은 어렵다고 한다.” 더구나 이를 증언하는 사람도 갈수록 적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사히신문 18일자 보도에 따르면, 1940년에 징병되어 중국의 전선으로 파견된 체험을 미에현의 전 일본군 오장(伍長 : 일본 육군 계급의 하나로 하사-下士에 해당)이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1940년에 징병되어 중국 전선에 보내진 체험을 이야기해 온 미에현의 전 일본군 오장, 곤도 (近藤)씨는 올 5월에 101살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중국인 포로의 자살 훈련이나, 많은 사람을 종렬시켜 총살하는 관통 실험……. 전우들로부터는 동료들의 망신을 당하지 말라고 외면당했지만, 그래도 증언을 계속하면서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면 전쟁의 실상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의 잔학 행위와 나중에 근무지를 이동한 오키나와에서 동료 장병들이 무참히 살해되어 간 기억 등 곤도씨 입장에서는 그 두 가지 체험(만주와 일본)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그 전쟁을 전하는 의미였다고 한다.

승리의 영광만을 기억하고 싶은 일본 극우 정치인들은 과거, 역사는 불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장기집권에만 매몰되고, 그 세월의 흐름 속에 자신의 인식은 그 옛날의 인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으로 고착화된 것 같아 안타갑기도 하다.

역사는 동일한 형태로 되풀이 되지 않지만, 때로 입장과 수단을 바꿔가면서 반복되기 마련이다. 20세기 전반과 현재는 여러 조건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시좌를 과거에서 구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독일이 보여준 생생한 역사적 교훈이다.

과거 한 때 불가피한 사정에 의한 가해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최소한 피해를 본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다보지 않으면 뉘우침이라든가 사과는 있을 수 없게 된다. 피해자의 기억은 영원할 수 있다. 가해자의 망각의 기억은 피해자를 수렁으로 빠뜨리는 행위에 다름없다.

일본 정부는 역할 바꾸어보기를 스스로 해보면서 상대방의 눈높이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며,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다보고 검토하는 등의 다면적, 다층적 역사분석이 필요하며, 그러한 역사관이 없다면, 효과적인 외교도, 안보 정책도 창출되지 않을 것이다. 일본 극우정치인들에게 겸허함을 요구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일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