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70년 ‘일본은 죽어도 독일이 될 수 없다’
전후 70년 ‘일본은 죽어도 독일이 될 수 없다’
  • 김상욱 대기자
  • 승인 2015.08.1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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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받는 독일 vs 멸시 속의 일본’ 앞으로의 명암은 ?

▲ ⓒ뉴스타운

8월15일로 대한민국의 광복 70년을 맞이한다. 동시에 남북분단 70년도 된다. 한국인에게 그 의미는 남다르다. 제 2차 세계대전 전후 70년을 맞이해 다수의 외신을 종합, 한국, 중국, 폴란드, 네덜란드 사람들의 독일과 일본을 보는 눈을 들여다본다.

‘총리 한 사람이 무릎을 꿇으니 국민 전체가 일어서는 국가는 독일이요, 이와는 정 반대로 총리 한 사람이 뻣뻣하게 서 있으니 전체 국민이 무릎 꿇어야 할 형편인 일본’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특히 아베신조 일본 총리와 그 정권은 이른바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해 ‘보통국가’ 즉 ‘전쟁을 언제라도 치를 수 있는 국가’로의 전환에 온 힘을 쏟고 있는 가운데, 식민지 지배(일제강점)를 당한 한국, 침략을 당한 중국인들의 일본을 보는 눈과 역시 독일의 침공을 받은 폴란드와 네덜란드 사람들이 보는 눈은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독일과 일본이 전 후 지금까지 피해자들에 대한 자세와 행동에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 대한민국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놓여 있다. 한국에게는 한국을 완전 무시하거나 비아냥거리는 일본의 아베 정권이 있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희망하지만, 그 지긋지긋한 일제강점기에 한국정신 말살을 위한 수많은 잔혹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의 아베 정권은 진정성 있는 반성과 사죄 한 마디 하지 않고 오히려 한국을 짓누르고 있다.

한국인들은 안중근 의사를 존경한다. 특히 극우성향의 일본인들은 안중근 의사를 살인자, 암살자라 부른다. 차이가 나도 너무 그 차이가 크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일제강점기 시절의 한국 총독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에 총을 겨눴다. 한국민 전체에 대한 극악무도한 일본의 압제자에 총알의 맛을 보인 것이다.

턱에 수염을 기른 젊은 안중근은 자신의 손가락 일부를 잘라 대한민국의 애국심을 표시했다. 손도장이다. 안중근 의사의 그러한 손도장 찍힌 대형 현수막이 서울 거리에 걸려 있다. 오가는 한국인들은 안중근 의사의 애국적 행동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부산대학의 로버트 켈리 교수는 “한국 전역에 걸쳐 일본에게는 놀랍고도, 대단히 부정적이며 고정관념이 존재 한다고 말할 정도다”고 에이피통신은 전했다. 한국과 일본의 양국 국민들은 상호간의 문화를 인식하면서 특히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는 안보 측면에서는 같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온갖 고충을 겪은 한반도는 해방 이후 소련과 미국에 의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북으로 분단됐다. 남북한은 아직도 정전협정이 존속되고 있기 때문에 남북한은 종전(終戰)이 아니라 기술적인 전쟁 상태에 놓여 있다. 잠시 전쟁을 쉬고 있다는 뜻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지배자들은 한국인 정체성을 말살하려 했다.

에이피통신에 따르면, 시흥에 사는 36세의 허 교사는 “일본은 죽어도 독일이 될 수 없다”면서 “세월이 흐르며 기억에서 조금씩 잊혀 가고 있는데 일본이 자꾸 자꾸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고 있다”며 일본을 비판했다.

* 중국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주를 점령했다. 1937년 7월 7일에는 만주 지역을 빼앗기자 그들은 만주에 잇는 수많은 마을의 여성들은 물론이고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강간을 하는 등 잔혹성을 드러냈다. 난진 대학살도 그 일환의 하나이다. 난징대학살로 무려 3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나 일본은 지금까지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국은 교육제도와 대중문화, TV쇼 등을 통해 일본의 대학살, 잔혹상 등을 기억하도록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일본의 잔인성을 폭로하는 역사 기록물을 발굴, 영문과 중국어로 전 세계에 시리즈로 알리기도 했다.

중국인들의 반일감정(反日感情)은 현재 갈등을 빚고 있는 동중국해에 위치한 댜오위다오(조어도, 일본에서는 센카쿠 열도라며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에 대한 영유권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중국은 댜오위다오는 일본이 침략해 가져간 전리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본래 중국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늘 일본에 대한 증오감이 존재한다. 우리가 일본 제품을 구매하고 있지만, 그걸 좋아하지는 않는다. 젊은 사람들이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62세의 장쑤성 거주민의 말을 에이피통신은 전했다.

* 폴란드 

1939년 9월 1일 독일이 침공을 할 때 유럽 전쟁이 시작됐다. 독일은 현재 가장 많이 사과하고 있는 국가가 바로 폴란드이다. 1970년 당시 통일 독일 이전인 ‘서독(West Germany)’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바르샤바 게토(Warsaw Ghetto)의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다. 바르샤바 게토는 제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강제로 입주시켰던 바르샤바의 한 구역이다.

빌리 브란트는 그 9년 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가 ‘무릎 꿇은 모습은 증오를 파묻고 화해를 추구하는 행위’로 전쟁의 아픔을 씻는 모습으로 전 세계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기에 충분했다.

독일은 폴란드를 향한 그러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폴란드인들은 당시 600만 명이 고통을 받았다. 한 번의 사죄로 모든 것을 끝낸 것이 아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폴란드인들에게 사죄하고 보상하는 등 줄기차게 과거의 아픈 역사를 사라지게 하는 노력을 해왔다.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몰락한 이후 독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재통일 과업을 이룩했다. 독일은 폴란드가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독일은 이 후 기대 이상의 번영을 지금도 누리고 있다.

최근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톡일 총리도 지난해 선거에서 도날드 투스크(Donald Tusk) 폴란드 총리가 브뤼셀의 유럽위원회의 수장이 되도록 적극 도왔다. 폴란드 지도자가 유럽연합 내의 지도급 인사가 되기는 사상 최초이다. 독일은 그렇게 폴란드를 지금도 돕고 있다.

독일은 이웃 국경을 자유롭게 통행하게 하면서 학생 교환 프로금래도 진행하고 무역도 활발하며 젊은 폴란드 청년들과 독일인들이 과거의 아픔을 극복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부 폴란드인들 사이에서는 감정이 복잡하다.

30대 나이의 일부 폴란드 젊은이들은 과거 역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독일 침략의 고통스러움을 알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독일이 자꾸 사죄를 하니 오히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이 있는가 하면 나이 든 사람들의 일부는 아직도 독일에 대한 감정을 풀지 못하고 있다.

* 네덜란드 

과거 전쟁에 따른 어두운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재 독일과 네덜란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연합의 동맹국이다. 특히 오늘날 경제적으로는 더욱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은 진정한 ‘사죄’로 과거의 잘못을 미래의 친분으로 만들어 왔다.

네덜란드 내에서는 전쟁 당시 남성은 물론 여성, 어린이 등을 포함 10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독일 나치에 의해 죽음으로 몰렸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에 있는 운하 쪽에 줄지어 있던 창고나 서점 책장 뒷방에 숨어 많은 이들이 살아남게 되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Anne Frank)이다. 안네 프랑크는 나치 치하의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다소 유복한 유대인 가족에서 태어난 소녀였다. 안네 프랑크와 가족은 네덜란드로 도망쳐 나왔다. 안네 프랑크는 창고 등 뒷방에 숨어 나치를 피해 2년 동안 살면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그 유명한 일기를 남겼다. 독일은 폴란드 침공에 이어 1941년 네덜란드를 점령했다.

안네 프랑크는 1942년부터 2년 동안 숨어살아야 했다. 안네 프랑크를 기리는 기념관에는 지금도 매년 100만 명 이상이 찾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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