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때, 광주 “운동권-대학생”들 숨어서 오금 저려 지냈다
스크롤 이동 상태바
5.18 때, 광주 “운동권-대학생”들 숨어서 오금 저려 지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항쟁기간 내내 도망가 있던 사람들이 5.18 주동자로

▲ ⓒ뉴스타운

5.18 직전까지, 전남에서 최고의 배짱과 가장 투철한 반-박정희 정신을 가졌다는 사람은 전남대 축산학과 복학생 윤한봉이었다. 서울에서 운동권 대표들이 광주로 와서 전남의 운동권 대표를 찾았을 때, 이구동성으로 추천한 사람이 바로 윤한봉 이었다. 그런 그가 막상 분위기가 사나워지자 경찰에 잡히지 않으려고, 쉬운 말로 오줌을 질질 싸고 경끼를 하면서 한동안 숨을 곳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5,18 폭동 기간 내내 꼭꼭 숨어 있었다.  

1980년-81년의 5.18 재판에서 5.18을 일으키기 위해 김대중의 돈 500만원을 김상현의 손을 거쳐 받아 200만원은 윤한봉에, 300만원은 박관현에 주어 폭동을 사전에 기획했다는 혐의로 최고형을 받았던 정동년은 5월 17일 밤중에 그의 집에서 자다가 체포되어 폭동기간 내내 광주에 없었다. 폭동자금을 받았다는 윤한봉과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도 꼭꼭 숨었다.  

"5.18 민주화운동의 총 지도자"라고 빨갱이들이 내세운 윤상원(본명 윤개원)은 김상윤-김상집의 형제가 운영하는 참새 방앗간, 녹두서점에 가끔씩 들려 그들의 동지들을 비정기적으로 만났다가 공기가 험악하면 각자도생 하자며 뿔뿔이 헤어지곤 하면서 5월 21일에 만났다. 5월 21일 무기고가 털리고 여기저기에서 총소리가 나자 또 각자도생 하자며 헤어져 도망을 갔다가 21일 오후 5시, 계엄군이 도청을 포기하고 외곽으로 도망하자, 22일, 어슬렁거리면서 도청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나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5월 15일 서울역앞 광장에 10만 시위대가 집결하여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이는 등 사태가 험악해졌다. 당시 내무장관은 계엄사령관에, 앞으로의 시위는 경찰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으니 계엄군이 맡아 달라는 요청을 했다. 반면 김대중은 이에 고무되어 그 다음날인 5월16일에 "내각을 해체하고 계엄령을 해제하겠다는 결심을 5월 19일까지 하지 않으면 5월 22일을 기해 전국봉기를 일으키겠다"고 선언했다. 김일성이 간첩들에 지령한 그대로 였고, 국가에 대한 선전포고 였다.  

당시 김대중이 무얼 믿고 이런 무모한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단지 내 생각으로는 그가 이미 광주폭동을 알고 있었으며, 확실하게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이런 김대중을 그냥 두면 국가도 아니었다. 그래서 국가는 5월 17일 밤 12시를 기해 김대중 내란음모 집단 26명을 포함해 부정축재자들을 긴급 체포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전국적으로 운동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예비검속을 단행해 억울하게 매를 많이 맞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당시는 의심만 받아도 곧장 잡혀가 매를 맞는 시절이었다. 전국은 그야말로 팽팽한 살얼음판 이었다.  

젊은 사람이 거리를 나왔다가는 무조건 경찰에 잡혀가고 계엄군에 잡혀 가는 판이었다. 윤한봉은 멀리서 경찰 같은 사람만 보아도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고 한다. 전라도에서 가장 배짱이 세다는 윤한봉이 얼마나 그 시각에 떨고 다녔는가를 보면 나머지 운동권들과 대학생들이야 얼마나 꼭꼭 숨어 있었겠는가?  

그런데 매우 기이 하게도 5월 18일 오전 9시 반에는 일반 군인들도 경찰도 무서워하는 공수부대를 감히 찾아가 돌을 던졌고, 무려 7명의 대원들에 부상을 입혔다. 이는 이변 중의 이변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5월 21일, 공수부대를 도청에서 쫓아낼 때까지 광주의 어리석은 부나비들을 소모품으로 삼아 온갖 기발한 공격방법을 선보이면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이들이 북한군 600명이었던 것은 5월 21일에 보여준 전광석화와 같은 홍길동 작전들에서 매우 선명하게 나타났다.  

경찰에 경끼하는 전라도 운동권의 영웅, 윤한봉  

2006년 2월 5.18 기념재단이 "5.18의 기억과 역사2" 라는 제목의 책에 윤한봉과 정동년의 증언이 있다. 윤한봉은 1947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2007년 6월 27일, 59세로 사망했다. 5.18의 핵심 주역 중 한 사람으로 수배를 받다가 1981년 4월 화물선에 숨어 35일에 걸쳐 미국으로 밀항했다. 미국에서는 민족학교와 재미한국청년연합 등을 결성해 운동권 일각을 형성하여 활동하다가 1993년 김영삼의 선처(?)로 수배가 해제되자 귀국 했다. 귀국 후 5.18 기념재단 설립을 주도했고, 민족미래연구소와 들불야학기념사업회를 창설했다.

고교 때, 빈둥대며 부모 속 썩였다  

광주일고, 학교생활을 땡땡이 치고 엉망으로 했다. 대학진학 안 하고 1년간 절간에서 살았다. 산에나 오르내리고 물가에 누워 낮잠이나 자면서 한가로운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군에 자원입대를 했다. 병참학교에서 교육받고 12사단 최전방 부대인 52연대 군수과로 배치됐다. 성격이 꼬장꼬장해 군대에서도 많이 싸우고 다퉜다. 군대에서 대학 나온 놈들, 대학에 적을 둔 놈들이 나를 고교출신이라고 멸시했다. 그래서 대학가기로 결심하고 전남대 축산학과에 입학했다. 농촌에서 목가적으로 살고 싶어서 축산과를 택했다. 자취생활을 하다가 하숙생활을 하면서 모범생으로 공부했다. 부모 속 썩인 것, 땡땡이 친 것 반성했다. 만학이라 동료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데도 동료들에 반말 안하고 좋은 말 썼다.  

나이 어린 운동권 학생들이 꼬득여, 소영웅심으로 학생운동 시작  

매너가 좋고 학업에만 열중하다보니 학생들이 따랐다. 전남대 학생운동의 맥은 1971년에야 형성되기 시작했다. 광주일고 출신들이 금서인 "리슨 양키"(Listen Yankee! 양키들아 들어라)를 구독하면서 미국을 제국주의로 인식, 반미감정을 갖게 됐다. 사상이 붉으스름하게 변하게 됐다. 광주일고 9회 선배들이 반공법 등으로 잡혀갔고, 10회가 통혁당 막둥이로 고생했고, 나는 광주일고 11회다. 3년 후배(일고14회) 중에는 정상용(5.18 항쟁지도부 외무부장)과 이양현(5.18 항쟁지도부 기획위원) 등이 주축이 돼서 전남대에 '민족사회연구회'를 만들었다. 그 후 일고 후배 김정길, 박형선, 문덕희 등 민청학련 출신들도 이에 가담했다.  

1971년에는 교련반대 시위가 유행했고, 정부는 이 시위자들에 대해 강제입영을 단행했다. 정상용, 이양현, 김진 등이 강제입영 당했다. 이때부터 사상 처음으로 전남대 영내에 경찰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나를 꼬득인 사람은 박형선, 문덕희 등이었다. 나는 이들에 동조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멀리 한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경찰의 최루탄 공세를 받았다. "원자탄이 날아와도 우리는 이 자리를 지키겠다" 호언했던 학생들이 먼저 도망을 갔고, 나는 나중에 도망치다가 경찰과 교수들로부터 "비겁하다, 떼어 버려랴"등 야유를 받았다.  

그 후 나는 "할라믄 하고 말라믄 말지 어정쩡하니 뒤 따라 다니다가 이런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운동에 앞장서기로 마음먹고 머리를 밀어부렀다. '민족문제연구회'는 정학 등을 당해 소멸되고 그 대신 이름을 바꾸어 '교양독서회'라 했다. 이 이름도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까지만 존속했다.  

"유신 쿠데타" 소식에 인생 바꿔  

2학년(1972) 10월 17일 밤, 하숙생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나'를 자꾸 나오라 해서 나갔더니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저질렀다고 했다. 휴교령, 국회폐쇄, 헌법 폐지 등등 화를 주체하지 못해 나는 들어가 내가 보던 책을 볼펜으로 찍어 버렸다. 이 새끼들이 국민 알기를 벌레로 아는가 해서 였다. "내가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부터 싸운다." 결심을 했다. 

다음 날 의기에 차서 학교에 나갔더니 교수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들어 가니까 "무등산에 단풍이 서서히 들어가네" 하는 식의 딴소리만 했고, 어린 아이들은 유신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고 행진도 했다. 내 친구놈들도 "헌법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나는 이런 새끼들에 화가 치밀었다. 친구들과 삿대질하고 욕설하며 마구 싸웠다.  

그후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궁리를 했지만 답이 없었다. 박정희를 죽일 방법도 없고, 생각해 낸 것이 학생운동 밖에 없었다. 전남대 전체를 학생운동으로 하자니 전남대는 내가 안기에는 너무 컸다. '농대'로 범위를 축소하니 좀 감이 잡혔다. 농대라 해도 아직 내 말에 따라 줄 사람은 없었다. 곧 3학년이 되니 선거를 통해 학생회장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 답이었다.  

얼떨결에 영웅 돼  

50만원이 넘게 든다는 학생회장 선거에서 7백원으로 당선되는 이변을 낳았다. 7백원으로 선거를 치르겠다는 동키호테 같은 소리가 온 학내에 퍼졌다. 처음에는 미친 놈들이라 외면하더니 나중에는 신선한 학생운동이라는 소문이 났다. 내가 갑자기 유명해 졌다. 그 다음 나는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을 벌었다. 이러는 사이 정보사찰기관은 나를 요주의 인물로 선정했다. 학교는 나를 문제아로 찍었지만 나는 내가 노렸던 바대로 학내 영향력을 굉장해 키우게 됐다.  

73년 2월, 서울 문리대 학생들이 유신에 반대하는 기념비적인 시위를 벌였지만, 실은 그보다 더 빨리 나와 박형선이 유신반대 시위를 기획했다가 학교 당국에 발각돼 3일간 절에 연금당했다, 73년 한 해에 서울에서 간헐적으로 유신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박정희는 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발동했다. 5년 이하의 징역이라기에 나는 5년간 살려고 작정했다. 73년의 유신반대 시위가 왜 실패했는지 분석해 보았다. "전국적으로 아무리 학생들이 떠들어도 동시다발적인 시위가 아니면 효과가 없다. 전국적 연결을 갖고 동시다발적으로 동일한 목표와 구호를 외치며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서울 학생들이 내려왔다. 영남권, 호남권, 서울권을 하나로 연결하여 정보를 교환해 가면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유명한 운동권의 스타였던, 김정길, 이강, 김남주를 만나 의논했다. 이들은 나를 호남권의 대표자로 추천했다. 김정길이 내게 와서 '서울 사람들'을 만나게 다리를 놓았고, 내가 만난 서울 사람은 이철과 황인성이었다. (주:인혁당재건위로 사형된 여정남은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서울대의 이철, 유인태, 황인성을 통해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했다).  

전북대 학생들은 술만 마셔쌓고 뜨뜨미지근하고 자수하고 그랬다. 여튼 동시다발로 시위를 기획했는데 저쪽 안테나에 다 걸려 일망타진 됐다. 교수들은 내게 잘해줬다. 출석을 못했는데도 출석한 것으로 해주고, 장학금도 타게 해주었지만 여전이 돈이 모자랐다. 서울 갈 용돈이 없어 화투 잘 치는 박형선과 문덕희를 시켜 삼봉치기를 하라고 내가 밑봉을 대주었다. 새벽차를 타고 서울로 가야 하는데 화투꾼이 오지 않아 욕을 하고 있는데 이들이 눈이 퀭해 가지고 뛰어왔다. 딴 돈을 내놓고 그 자리에서 푹 쓰러져 자브렀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 언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 받았다. 긴급조치 1,4호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예비내란 음모 등의 혐의였다. 하지만 75년 2월 16일 대전 교도소에서 출소했다. 그리고 4월 9일, 인혁당 관련자 8명이 사형을 당하셨다. 그 뉴스를 듣고 나는 아 한목숨 다 바쳐 박정희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후배들을 의식화 시키는데 열중했고, 운동원 인사들에 대한 옥바라지에 나섰으며 김지하의 옥바라지도 했다.  

그해(75) 8월에 장준하 선생님이 의문사를 당하셨는데 그 때만 해도 우리는 암살로 봤다. 그때 나는 책판매 관계로 다른 곳에 있었는데, 서울서 학교 다니다 감방에 갔다 온 친구 일부와 광주 친구들이 자취방에 모여 사상계 구절을 읽어가면서 장준하 추도식을 하다가 잡혀가 매를 맞았다. 누가 주동했느냐, 뭣 땜에 했느냐, 베트남 멸망을 핑계로 다 깨브렀다. 장준하 추모식 하다가 두둘겨 맞은 학생들이 억울하다며 홍남순 변호사를 찾아가 소송제기 해 달라 하소연 했지만 홍 변호사는 '글쎄'만 연발했다. 그들은 배신감 느껴갖고 나와 부렀다.  

여기저기 홍 변호사님을 욕하고 다니는데 새로운 사실 발견했다. 홍남순 변호사는 '민주회복 국민회의' 전남지부를 책임지셨는데 중정에 끌려가 해체 각서를 강요 받았다. 못하겠다 하니가, 자식뻘도 안되는 것들이 60이 넘은 홍 변호사님 고추를 잡고 '30센치 자'로 두들겨 팼다 하더라. 이런 수모를 받고 나온 분이라 '글세 글쎄'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였다. 민주니 자유니 외치던 모든 조직이 다 깨졌다. 밥 사준다던 사람들이 나만 보면 옆 골목으로 피했다. 교수들도 나를 피했다. 어울려 주는 사람 없고 집에선 애물단지 됐다. 버스 탈 돈도 없었다. 월부 책장사 하고 포장마차를 했다. 참으로 비참한 시기였다.  

교도소에서 얻은 피부병이 병원가도 소용 었다. 누군가가 해수욕하고 모래찜질하면 없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교도소 갔던 친구들이 닭 한 마리 사들고 냄비 사들고 버스타러 갔다가 붙잡혀 동부경찰서로 연행돼 갔다. 이모임 주모자 누구냐, 3시간 취조 받고 허탈하여 자취방 벽에 서로 고개들 푹 숙이고 앉아 있었다. 서로 쳐다보다가도 또 고개를 푹 숙였다. 겨우 이것 갖고 목숨걸고 싸운다 한 것이 한심해부렀다. 신문에도 안 나고.  

내가 긴급조치 4호를 비판하는 유인물 2천매를 잘못 관리한 죄로 감옥에 갔고, 그 유인물에 손을 댄 친구 용운이도 생똥을 싸부렀다. 형사들이 들이닥쳐 어느 다리가 아프냐 물어가지고는 그 아픈 다리만 마구 차부렀고, '너 윤한봉이 간첩인지 정말 몰랐느냐' 다그쳤다. 그리고 현금 150만원을 뺏어가 브렀다. 그 친구 엄마다 돈으로 해결한 거다.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되자 3월 1일, 함석헌, 김대중 등이 구국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언론들은 이를 기사화 하지 못했다. 나는 성결교회에 초대받아 몰래 획득한 구국선언문을 읽어주었다. 그후 김영종이 학교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다가 잡혀 갔고, 그가 내 이름을 댔다. 나는 두 번째 구속되어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 받았다. 이때까지 감옥에서 지낸 총 시간은 20개월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수감됐던 대구교도소에는 긴급조치 위반 정치범들이 총 집결돼 있었다. 최열이도 거기 있었다.  

공소시효 지났으니 박정희 암살 계획 밝힌다!  

1975년 4월 9일, 전남대 도서관 잔디밭에 앉았다가 인혁당 관련자 8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악을 썼다. 유인물이나 뿌리고 집회나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박정희를 암살하기로 맘 먹었다. 5명을 여기에 끌어 들였다. 4명의 이름은 밝힐 수 있는데 1명은 발표 않겠다. 4명은 나 윤한봉, 정상용, 박형선, 조계선(농민운동 하다가 남민전에 가담)이었다. 총은 구할 수 없고 수류탄이나 다이너마이트로 특공자살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다이너마이트 4상자 구했다. 소리 없이 이 계획을 추진하다가 구국선언 관계로 감옥에 가면서 암살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출소해서 황석영과 농민운동 같이 했고, 광대극단 운동 같이 했다. 부부갈등을 해소시키기 위해 여성을 상대로 강연을 했다. 그것이 송백회라는 여성 단체로 발전했다. 나에 대한 신뢰들이 상승했다. 여성들을 이용해 교도소에 덧신 보내기 운동을 했다. 양심수들을 상대로 한 옥바라지 운동도 했다.  

78년 5월, 서울 백낙청 교수가 내려와 전남대 송기숙 교수, 조선대 문병란 교수와 함께 유신헌법을 비판하고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성명서는 5월 27일 발표 됐다. 기득권자인 교수 사회가 움직였다는 것은 학생운동과는 차원이 달랐다. 송기숙 교수가 정보부로 연행돼 갔고, 우리는 송기숙 선생 댁에 대책본부를 세웠다, 백낙청 교수가 내려와 교내시위를 하고 이어 시가지 행진까지 했다. 그런데 송기숙 선생 부인이 우리 대책위를 싫어하는 눈치를 보여 쫓겨나 부렀다. 정보부 광주지부장이 나와 황석영을 보잔다 하여 갔다. 송기숙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었다.  

80년 1월 극단 '광대'가 출범했다. 양희은, 김민기가 내려와 공연을 하여 성공적으로 출범했다. 79년 10월 부마항쟁이 터졌다.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커다란 시위가 어떻게 부산과 마산에서 그렇게 대규모로 커질 수 있는가에 대해 궁금했다. 10월 23일, 내가 만든 '현대문화연구소'에 형사들이 들이닥쳐 무조건 나를 끌어갔다.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기 전에 불쏘시개 역할을 할 놈들을 미리 잡아간거다. 물고문을 당한 후 또 감옥에 들어 갔다가 12월 9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는 바람에 출소했다.

광주 5.18을 예견하고 이를 막아보려 고민했다  

부마사태의 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부산으로 가 많은 서민들과 이야기를 나웠다. "내가 앞장 서면 따라오겠지, 따라오지 않는 민중은 고생을 해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등등의 내 생각이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부마사태의 동력이 바로 민중의 힘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이제 곧 광주가 터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80년 3월 말이었다. 70년 내내 민주화를 열망해온 각계각층의 열망이 곧 불타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어나면 무조건 지고 피가 바다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비극은 막아야 한다. 그러나 운동권도 나도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조직화되지 못한 봉기는 필패다. 광주가 피바다에 잠긴다. 나는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골돌히 생각하면서 4월을 맞았다.  

전국각지에서 가두 시위들이 발생했는데 전남만은 조용했다. 4월 10일이었다. 서울에서 여러 사람들 와 가지고 왜 전남은 움직이지 않느냐 추궁을 했다. 4.19를 맞아 가두로 진출하자는 소리들이 나왔다. 나는 내 소신에 따라 피를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광주만 일어서면 광주에만 피가 흐르니 전국각지에서 동시다발로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아무도 내 말에 공감하지 않았다.  

4월 중순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그러던 5월 5일, 50명 정도가 '민주가족야유회'를 갔다. 진달래 피고 기분들이 좋았다. 그럴수록 나는 답답하고 조급하기만 했다. 따라주는 사람이 없자 나는 나 혼자 해야 할 일을 준비했다.  

당시는 1만5천분의 1 지도를 구하려면 신분이 확실해야 했다. 단파 라디오 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1만5천분의 1로 축소된 광주지도를 구했다. 당시 내 이론은 이러했다. "광주는 꼭 깨진다. 부산 마산에서처럼 일어난다. 일어났다가 곧바로 꺼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깨지더라도 정치적으로 성공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청을 장악해야 한다. 최후까지 싸우다 깨져야 한다. 저들은 반드시 무기를 사용할텐데 우리라고 맨손으로 싸울 수는 없다. 예비군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다이너마이트가 어디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대국민용 그리고 대 국제사회용 성명서 초안에 대해서도 구상을 했다. 피해를 줄일 수는 없지만 피해로부터 반드시 정치적 성공을 얻어내야 한다."  

이러한 내용들을 나 혼자 준비하고 있었다. 5월 15일, 전홍준 선배의 아기가 돌인지 100일인지 잔치를 했고, 거기에 8명이 갔다. 이를 8인모임이라 한다. 윤한봉, 정상용, 정용화, 이강현, 윤강옥, 김영철, 박용준, 윤상원이다. 이들 대부분은 80년 5월 26일부터 형성된 "항쟁지도부"(자칭)의 핵심간부들이었다.  

내가 그 이야기를 또 꺼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랬더니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5월 20일, 계엄령 해제 결의안을 제출하기 위해 국회 소집이 예고돼 있었다. 신군부는 반드시 21일-25일 사이에 전면적인 쿠데타를 일으킨다. 완전한 군사독재가 실시된다. 광주가 터지고, 터지면 박살난다. 어차피 치를 피라면 그로부터 정치적 이익을 얻어내야 한다. 이렇게 말했더니 이들은 감이 좀 잡힌다고 했다.  

이들이 신났다.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우리 다시 만나자. 지금부터 집에 들어가지 마라. 그리고 혜어졌다. 나는 다 준비해 놓고 있었다. 목욕도 하고 문건과 사진도 치워 버렸다. 그리고 2일 후인 5월 17일, 기습을 당했다. 일이 이렇게 터질 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항쟁기간 내내 도망가 있던 사람들이 5.18 군사재판에서 주동자로 선고돼  

5월 17일, 전남지역 농민들이 5월 19일의 대규모 시위를 준비하기 위해 광주 카톨릭센터에 집결해 시위준비물들을 만들고 있었다. 서울역 회군 이후 전국 총학생회 회장들이 이화여대에 모여 회의하는 것을 신군부가 급습을 했고, 이때 박관현(전남대 총학생회장)은 용케도 도피했다는 소식이 왔다.  

돈이 없어 여관에서 잘 수는 없고, 잘 사는 문병란 선생님 집에 농민회 간부 몇 명을 데리고 갔다. TV자막에 계엄령 전국확대, 의회해산, 휴교령 이런 글자가 나왔다. 자막이 나오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당시 광주에서 전화를 놓고 사는 집은 황석영, 송기숙 교수, 문병란, 오직 이 세 사람밖에 없었다. 그리고 흑백 TV 있는 집도 몇 집 밖에 없었다.  

박형선이도 잡혀갔다 하고, 김상윤도 잡혀 갔다 하고, 나를 찾느라 눈에 불을 쓰고 있다 했다. 이런 기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전남대, 조선대 다 접수되어 버렸고, 모두 들 잡혀가고, 도망가고, 박살나브렀다. 아무런 준비 없이 당한 나, 이처럼 후회스러울 수 없었다. 왜내면 나는 21-25일로 봤지. 17일이 될 것이라곤 생각 못해브렀다. 나는 19일 새벽에 튀어 부렀다. 튀고 보니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전화기가 없던 시대였응께.  

무조건 서울로 향하다 중간에 생각이 바뀌어 대전으로 갔다. 기차에서 내리니까 검표하는 군인이 명단을 들고 있었다. 일부 수상한 청년들 다 붙잡아 놓고 있었다. 이 상태로 서울 가다가는 잡힐 것이 틀림없었다. 다시 내려가는 기차를 탔다. 내려 가는데 낯이 익은 사람과 서로 눈이 마주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 본 사람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상대방도 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그는 목포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잡으러 다녔던 형사 였다. 그 형사 그룹이 나를 놓고 이리 저리 시위를 했다. 나는 기차가 서기 전에 뛰어 내렸다. 내리고 보니 장성역, 내 똥가방은 그대로 버리고 내린 것이었다.  

아줌마가 아기 업고 광주 가는 차를 잡고 있었다. 나는 같이 가자했다. 타고 보니 기사가 '광주 난리 났다' 했다. 나는 그래도 가자 했다. 친구 집에 간 후 나는 밤새내 돌아 다녔다. 날이 새면 얼굴이 팔려 못 돌아 다닐 테니까. MBC가 불 탈 때 마구 시내를 돌아 다녔다. 그때 내게는 시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내 동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찾아 가는 데마다 사람이 없고 마지막으로 문병린 선생 집에 가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경끼 내가면서 도피 

의대 앞에 있는 내 동생 경자 집에 갔다. 난리였다. 오늘 경찰이 두 번이나 찾아 왔다. 개죽음 하려고 왔느냐 야단을 쳤다. 벽장에 나를 넣어놓고 나가더라. 작은 형님이 오시더라고. "야, 한봉아 지금 너 잡히면 개죽음 당한다. 빨리 빠져나가라". 형님이 준 양복을 입고 조카를 업은 여동생과 부부행세하고 백운동-남평-나주로 갔다. 21일에는 나주에 있었다. 차량 시위대가 나주 경찰서에서 무기 탈취를 하더라. 그거 보고 운동화로 갈아 신고 광주 가는 버스를 타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 손을 덥석 잡아 몹시 놀랬다. 전남민주청년연합회 지부장인 김남표 였다. 그는 차는 위험하니 걸어서 가자했다.  

남평까지 걸었다. 가서 후배들을 만나고 사정을 알아보니 도저히 광주로는 갈 수 없었다. 월 27일, 광주가 함락됐다는 뉴스를 들었다. 갈 곳이라고는 서울 밖에 없었다.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어둠의 자식들' 이라는 책을 썼던 철용이 형이 사는 성북구 삼양동 빈민촌으로 갔다. 거기에서는 내가 피난 올 곳은 거기 밖에 없다며 여러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때부터 해외 도피를 할 때까지 1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박정희 암살팀에 속했던 정상용과 또 한 친구는 '항쟁지도부'(5.26일 아침 형성)로 가부렀고, 박형선이는 예비검속에 걸려 잡혀 가 부렀다. 내가 전흥준 선배 집에서 했던 이갸기 즉 무장투쟁을 해야 하고 전남도청을 장악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후배들이 "자유노트"에 기록해 놓았다. 그 자유노트를 한 놈이 자수하면서 갖다 바쳤다. 하지만 송선태라는 친구가 그건 자기가 작성한 것인데 상상력으로 작성했다 이렇게 둘러대 무사했다. 광주 출신 검사들이 우리에게 정보를 알려줬다. 검사가 내 동생을 통해 '당신 형이 잡히면 사형 당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윤한봉이 잡히면 곧장 죽는다, 잡히지 말라'는 정보를 주었다.  

사건수사 결과를 보니 정동년이 내란 수괴가 돼 있더라. 김대중 방문하고 방명록을 쓴 것이 화근이 되었더라. 이렇게 사건이 끝났다, 그런데 내가 잡혀 불면, 사건이 복잡하게 다시 시작된다. 그러면 다시 조사가 시작돼 광주에 남아 있던 그 나마의 운동 역량이 모두 작살난다고 했다. 그래서 해외 도피를 한 것이다.  

www.systemclub.co.kr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